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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씩씩한 군인이 돼 베트콩 없애겠다"던 노회찬 어린이, 어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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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씩씩한 군인이 돼 베트콩 없애겠다"던 노회찬 어린이, 어쩌다? [노회찬의 나라 밖 인물 산책⑥] part 1 혁명 그리고 정치 : 호치민 上

이번 노회찬의 기록이야기 제목은 <기록으로 찾아가는, 노회찬의 '나라 밖 인물' 산책: 칼 마르크스에서 브라질의 룰라까지>이다. 칼 마르크스부터 브라질의 룰라에 이르기까지 '나라 밖 인물' 20여 명과의 직·간접적인 만남과 인연을 주제로 노회찬의 여정과 활동을 재구성한 것이다.

<노회찬의 나라 밖 인물 산책>은 11월 1일부터 매주 월·수·금 3번 씩 연재된다. '평등하고 공정한나라 노회찬재단'(노회찬재단)과 <프레시안>이 함께한다.편집자.

part 1 혁명 그리고 정치

마르크스上 "대한민국의 진보, 어디로 가시나이까"...노회찬, 마르크스를 만나다(☞바로가기)

마르크스下 "정치가 정치를 잊을 때, 가장 취약한 이들이 고통받는다"(☞바로가기)

레닌上 레닌의 '불꽃' 만난 노회찬, 한국사회 논쟁에 뛰어들다 (☞바로가기)

레닌下 노회찬, '혁명가의 길'에서 '정치가의 길'로 (☞바로가기)

▲노회찬 ⓒ연합뉴스

노회찬, '베트남 독립과 해방의 아버지' 호치민과 조우하다

: "'호 아저씨' 호치민과 '호빵맨' 노회찬"

▲ 베트남 독립의 아버지, '호 아저씨' 호치민 (출처: 위키백과)

"그는 죽어서도 아시아 피압박 민중들에게는 희망을, 총칼로 식민지 영토를 확장해 온 세계열강들에게는 충격과 좌절을 안겨준 불멸의 전사였다. 색 바랜 노동복에 왜소한 체구. 마른 발엔 언제나 낡은 타이어를 잘라 만든 샌들을 신었던 호치민. 그의 남루한 초상 앞에서 베트남 인민들은 왜 지금도 경배를 올릴 때면 자리를 쉽게 뜨지 못하는 것일까." 노회찬 (「다시 호치민을 기억한다」, <한겨레>, 2008.9.30.)

노회찬이 호치민을 '좋아하는 정치인'으로 꼽은 이유

노회찬의 인터뷰를 보면 호치민이 여러 번 등장한다. '좋아하는 정치인'으로.
"<서프라이즈>의 지승호 기자와 인터뷰를 하였다. 그는 수십 개의 질문을 준비해 왔다. 질문의 범위도 넓었다. 민주노동당에 대해 알고 싶은 것이 많았고, 그만큼 멀리 있었던 셈이다. 마지막 질문은 좋아하는 정치인을 말하라는 것이다.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는 질문이다. 그러나 쉽게 답변했다. '레닌, 호지명, 주은래.'

보도되면 한나라당에서 문제삼지 않겠냐고 물어왔다. 그랬으면 좋겠다고 답했다." 노회찬 (<노회찬의 선대본 일기>, 2004.1.20.)

"이 세 분은 공통점은 난세에 세상을 읽는 풍부한 식견과 대중적 지도력을 가졌다는 것이다. 이 분들의 삶을 책으로나마 접해보길 권한다." 노회찬 (<서울대 저널> 79호, 2006.6.)

"정치인으로 롤모델은 누구신가요?"라고 한 트친의 물음에 노회찬은 재치있게 대답했다.

"롤은 룰라 대통령, 모델은 호치민 선생입니다." 노회찬 (2012.1.17. 트위터)

노회찬은 특히 왜 호치민을 좋아하는 정치인으로 꼽았을까? 노회찬은 이렇게 답한다.

"탈권위적이며 대중친화력이 탁월했던 데다 말년까지 청렴한 인물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노회찬 (정운영,<우리 시대 진보의 파수꾼 노회찬>, 랜덤하우스중앙, 2004)

2013년 동아일보 선정 '10년 뒤 한국을 빛낼 100인'에 뽑힌 노회찬 당시 진보정의당 공동대표는 선정 소감 중에 호치민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오랜 기간 닮고 싶었던 스승은 호치민 아저씨와 신영복 선생이다. 호치민은 베트남의 독립과 해방을 성공시킨 강력한 지도자이자 혁명가였다. 그러나 그는 늘 검소했고 유례없이 탈권위주의적이었다. 스스로를 우상화시키지 않은 드문 사례이다. 호 아저씨라는 별칭에서 드러나듯이 강력한 리더십을 발휘했지만 국민들이 두려워하지 않는 소탈한 지도자였다."
※ 노회찬은 결혼 전 만남에서 김지선에게 편지 한통을 담은 신영복의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을 건네준 것으로 기억했다. <노회찬 평전>을 집필 중인 이광호 작가에 따르면, 노회찬의 기억과는 달리 김지선은 그 책이 <호지명 평전>이라고 기억하고 있다고 한다. 신영복의 책이 그때는 출간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김지선의 기억이 맞다고 본다. 책 출간 뒤 주변에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을 선물로 많이 줬기 때문에 착각한 것이 아닐까 싶다.
▲노회찬.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서 열린 동포 강연에서. 2015년 3월. ⓒ노회찬재단
2015년 3월 노회찬은 멀리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서의 동포 강연에서도 '호 아저씨'를 다시 불러낸다.
"노회찬 대표의 롤 모델은 누구인지 묻는 질문도 있었다. 노회찬은 호치민을 좋아한다고 했다.  위기에 놓였던 베트남에 강력한 리더십을 발휘해서 민족통일을 이룬 그의 강한 면뿐만 아니라 영웅으로 우상화 되지 않고, 옆집 아저씨처럼 다정한 사람으로 기억되어 호 아저씨라고 불리고 있다. 

그리고 그는 검소한 사람이었다. 베트남은 다른 나라에 정부관료나 경제계에 부패가 적은데 그것은 바로 호치민의 영향이다." 노회찬 (장광렬, 「희망은 있는가? 국민이 정부 믿지 못하는 사회: 노회찬과 함께 한 네덜란드-벨기에 여행기-2」, <레디앙>, 2015.4.9.)

'베트남 독립의 아버지'이자 국부(國父), '불멸의 혁명전사', 베트남 인민의 지도자. 호치민(1890.5.19.~1969.9.2.)은 식민지로 피폐한 약소국 베트남의 60년 투쟁을 이끌었고, 30여 년 동안 베트남 민족해방운동의 최고사령관이었다. 그는 일생을 베트남의 독립을 위해 바쳤으며, 중국에서 베트남 공산당을 창당해 이끌었고, 2차 세계대전 중 베트남으로 돌아가 항일 독립전쟁을 했다. 전쟁이 종결된 1945년 9월 베트남민주공화국을 선포, 총리(1946-1955)와 국가주석(1955-1969)을 지냈다. 베트남 전쟁이 한창이던 1969년 9월 2일 베트남의 통일을 보지 못한 채 심장질환으로 사망했다. 그는 가장 영향력 있는 20세기 피식민지 독립국가의 정치지도자의 한 사람이자 사회주의 지도자 중 한 사람이다. 일생을 독신으로 살았던 그는 물려줄 사람이 없다 하여 유산을 남기지 않았다. 사망 당시 그의 유산으로는 옷 몇 벌과 낡은 구두가 전부였다. 그가 죽은 지 6년 뒤인 1975년 4월 30일 사이공이 함락되었고 1976년 베트남사회주의공화국이 수립되었으며 남베트남의 수도였던 사이공의 이름은 호치민 시로 개칭되었다.
▲'박호(Bác Hồ), 호 아저씨'로 불리기를 원한 호치민과 어린아이들 (사진 출처: 호치민 박물관)
호치민 묘의 맨 위에는 베트남어로 '주석 호치민'이라고 적혀 있지만, 예나 지금이나 사람들 누구도 그를 그렇게 부르지 않는다. 베트남 사람들에게 그는 '호 아저씨'(베트남어: Bác Hồ)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있다. 격식을 따지지 않고 늘 국민들과 일상을 함께하고자 한 그의 삶에 걸맞은 애칭이다.
▲대구에 거주하는 한 시민(예린·예원 엄마)이 보내온, 호빵맨이 그려진 추모 손편지와 호빵맨 인형 ⓒ노회찬재단
이웃 아저씨 같던 노회찬에게도 비슷한 애칭이 있었다. "호빵맨." 넓은 이마와 늘 홍조가 도는 툭 불거진 광대뼈, 생김새가 영락없이 명랑만화 주인공 '호빵맨'이다. 생긴 것도 생긴 것이지만, 그의 지지자들에게 '호빵맨 노회찬'은 더 의미가 있다.

"노회찬 씨는 진보정치인 가운데 노동자 서민과 괴리감이 없는, 가장 대중적인 인물이기도 합니다. 쉽고 핵심을 찌르는 말로 국민들에게 즐거움을 주는 것도 호빵 속 달콤한 팥소와 같잖아요." (경향신문, 2008.4.26.)

노회찬이 떠난 뒤 대구에 사는 두 아이의 그를 추모하며 보내온 호빵맨 인형과 함께 호빵맨을 그린 작은 손편지에는 이런 글귀가 적혀 있었다.
"언제나 웃어주시던 노회찬 의원님! 이번 주는 너무 힘든 한 주였습니다. 많이 힘들고 슬프지만 언제나 힘든 이들 곁에서 호빵맨처럼 웃으며 함께 해주시던 모습 잊지 않겠습니다. 너무 감사했고 평안하십시오. - 대구에서 예린·예원 엄마 올림"
예린·예원 엄마에겐 노회찬이 단순히 정치인 캐릭터로서의 '호빵맨 노회찬'을 넘어, '용감한 어린이의 친구'이자 어려운 이들을 도와주고, 불의를 참지 못해 나쁜 짓을 하는 악당들을 혼쭐 내준다는 호빵맨으로 다가왔었나 보다.

'소년 노회찬'과 베트남 전쟁과 '맹·청·비'

"대한의 투사들! 선생님과 함께 월남에서 베트콩에게서 빼앗은 소지품, 옷, 무기들을 구경하였다. 맹, 청, 비 등이 싸우는 모습을 볼 땐 '나도 어서 커서 씩씩한 군인이 되어 소련군, 중공군, 괴뢰군, 베트콩을 모두 없애 버려야지.' 하며 마음속으로 생각했다."
1966년 5월 27일 금요일, 날씨가 맑았던 날에 쓴 초량초등학교 4학년 어린이 노회찬의 일기다. '맹, 청, 비'는 월남 파병부대였던 맹호부대, 청룡부대, 비둘기부대를 말한다. '반공 및 도덕' 과목 공부를 열심히 한 결과다. 그때 당시 남한의 모든 어린이들은 '반공' 글씨가 선명하게 찍혀 있는 벽돌로 키워졌다. 남북의 어린이가 함께 배우던 정의는 서로에 대한 증오와 배제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양쪽 권력이 어린이들에게 주입시킨 교육이 성공한 사례다.
▲베트남 파병 청룡부대 부산항 환송식 (출처: KTV 화면 갈무리)
한국군의 베트남 파병이 처음으로 시행된 것은 1964년 9월 11일이었다. 파병이 결정됐을 때 대다수 언론은 파병부대들의 용맹을 드러내며 그것이 당연하다는 논조로 보도했다. 1차 파병에는 주로 의무장교, 위생병, 간호장교 등 130명과 태권도교관 10명 등 도합 140명이 부산항 제2부두를 출항했다. 베트남 남부의 사이공까지는 꼬박 열하루 걸렸다고 한다.  이를 필두로 해서 이듬해인 1965년 3월 12일에는 후방 군사원조 목적으로 조성된 비전투병력 2000명이 비둘기부대란 명칭을 달고 역시 부산항을 출발했다. 같은 해 가을에는 두 차례에 걸쳐 해병대로 구성된 청룡부대와 육군으로 구성된 맹호부대가 부산항을 떠났다.  이어서 군수지원 목적의 십자성부대, 군수물자 수송을 맡은 백구부대 등도 출발했으니 1965년 부산 항구는 베트남으로 떠나는 병사들을 환송하는 행사로 북새통을 이뤘다. 추가파병 요청은 계속 이어져 1966년 4월에는 혜산진부대, 8월에는 백마부대 병사들이 부산항을 떠났다. 8년 동안 여섯 차례 파병이 되었고 모두 부산항에서 출발했다. 어린 노회찬의 기억 속에 베트남 전쟁은 고향인 부산의 부둣가와 함께 떠오른다.
"나는 부산에서 태어나 부산역 앞에 있는 초량초등학교와 부산중학교에 다녔다. 초등학생 때는 월남으로 떠나는 병사들을 가득 태운 군함, 수송선 등이 부둣가에 도열해 있었다. 그것들이 출발하는 환송식에 가서 나도 태극기를 흔들었다.  중학교 때는 돌아오는 분들을 맞이하기 위한 환영식에 가서 태극기를 흔들었다. 떠날 때 보면 가족들은 밑에서 박카스 한 박스라도 더 올리려고 애를 썼다. 던지다가 박카스가 물어 떨어지기도 했다. 사과를 빨랫줄에 묶어 던지기도 했다.  '잘 가라. 살아 돌아와라.' 참 엄숙한 분위기였다.
(…)
그리고 내가 중학생일 때 그들이 월남전에서 돌아왔는데, 분위기가 전혀 달랐다.  국기에 대한 경례 때도 배 위의 군인들은 경례를 안 했다. 밑에서 군악대가 연주하고 장성들이 '귀관들과 장병들의 노고를…' 이런 얘기를 하는데 군인들은 짝다리를 짚고 담배를 피우고 휘파람을 불었다. 

아주 충격적이었다. '싸우고 돌아왔으니 더 자부심 있게 잘 해야 하는 것 아닌가? 그런데 저 사람들은 누구를 위한 전쟁에 갔다 왔지?' 그런 생각이 처음으로 들었다. 그 사람들을 통해서 뭐가 애국인지, 나라를 사랑한다는 것이 뭔지, 진정한 애국은 무엇인지 고민하게 됐다." 노회찬 (<대한민국 진보, 어디로 가는가?>, 비아북, 2014)

노회찬, '사상의 은사' 리영희를 통해 베트남 전쟁의 실상과 마주치다

노회찬은 1970년대 후반 대학에 들어갈 무렵 리영희 선생의 <전환시대의 논리>와 <우상과 이성> 등을 통해 베트남 전쟁의 실상과 마주치고, 호치민을 만나게 된다.

"나는 지금도 맹호부대와 청룡부대의 군가를 다 외우고 있다. 그때 하도 많이 불러서 그렇다. 그런데 전쟁에서 돌아온 사람들을 보니 국가가 늘 정당하고 국가가 시키는 것이 늘 우선인 것은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중에 대학 들어갈 무렵에 리영희 선생이 쓴 <전환시대의 논리> 등을 보고 나서야 월남전의 새로운 면모를 이해하게 됐다." 노회찬 (<대한민국 진보, 어디로 가는가?>, 비아북, 2014)

노회찬이 언급한 <전환시대의 논리>(창비, 1974)는 프랑스 <르 몽드>지가 '사상의 은사'라고 일컬은 리영희 선생의 책이다. 그 중 4부의 베트남 전쟁에 대한 분석과 해석(베트남 전쟁(I)」과 「베트남 전쟁(II)」)은 가장 논란이 됐다. '월맹군의 침략'과 '자유세계의 대응'이라는 기존의 냉전 논리는, 베트남의 항불(抗佛) 식민지 해방전쟁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리영희의 치밀한 재구성 앞에 맥없이 무너졌다.  통킹만 북폭 사건과 미국의 사전 계획으로 인한 전면전 확대 등, 누구도 생각지 못했던 베트남전의 실체가 폭로됐다. 그런 사실은 미국의 혈맹으로 대규모 파병을 강행했던 한국 정부로서는 결코 알리고 싶지 않은 부분이기도 했다.  이 대목은 오랫동안, 이 책에 '이적표현물'의 타이틀을 씌우는 근거가 됐다.
※ 제2차 인도차이나 전쟁의 도화선, 미국의 조작된 자작극 '통킹만 사건' (「다시 호치민을 기억한다」, 한겨레, 2008.9.30). 1964년 8월, 미국은 베트남을 침공했다. 남베트남의 위기는 북베트남의 공작이며, 남베트남의 민주주의와 자결권을 수호한다는 것이 미국이 내세운 명분이었다. 미국은 침공이 정당하다는 근거를 남기기 위해 1964년 8월 2일과 4일 베트남 통킹만에 주둔 중이던 미군 구축함을 북베트남 어뢰정이 2차례에 걸쳐 선제공격했다고 발표했다. 린든 B. 존슨 대통령은 이를 근거로 북베트남에 대한 폭격 및 대규모 지상군 투입을 결정했다. 하지만 이 사건은 처음부터 북베트남 침공의 명분을 얻기 위해 조작된 자작극이었다. 이러한 사실은 미 국방성 비밀문서(The Pentagon Papers)에서 '34알파작전계획'에 따라 북베트남의 보복공격을 유도하기 위해 미군이 먼저 폭격한 것으로 드러났다. 이것이 제2차 인도차이나 전쟁의 도화선이 된 '통킹만 사건'이다. 이를 빌미로 미군은 1965년 2월부터 전면 공습을 시작했고, 대규모 지상군을 베트남에 투입했다. 이후 베트남 전쟁에 참전한 미군 측 군대는 100만 명에 달했다. 이들은 베트남 전역을 쉬지 않고 폭격했고 국토를 잿더미로 만들어 버렸다. 이들이 베트남 전쟁에서 쏟아 부은 폭탄의 양은 무려 900만 톤. 2차 대전 당시 태평양전쟁에서 사용한 전체 폭탄의 양보다 많은 엄청난 물량공세였다. 이 전쟁은 베트남의 국경을 넘어 라오스와 캄보디아로까지 확대됐다.
<전환시대의 논리>를 읽은 당시 젊은이들은 자신이 지금까지 알고 있던 것이나 주입된 지식과 180도 다른 측면을 보게 되면서 큰 충격을 받았다. 이 책이 독자로 하여금 기존의 논리, 이념, 가치들이 잘못됐을 수 있다는 생각을 처음으로 하게 만들어 사회를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시각을 갖게 해준 것이다(권우용 기자, 「전환시대의 논리, 우상화된 정치에 돌을 던진 '가설'」, 대학신문, 2016.3.13.). 노회찬도 그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리영희 선생의 <전환시대의 논리>, <8억인과의 대화>, <우상과 이성> 책 표지 갈무리
<전환시대의 논리>, <8억인과의 대화>, <우상과 이성>의 출간으로 인해 리영희는 반공법 위반 혐의로 1977년 11월 구속돼 1980년 1월까지 형을 살고 이후 해직과 복직을 반복했다.  리영희가 겪은 고난은 그의 목소리가 진실을 추구함을 역으로 증명해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한국의 독재 정권은 리영희의 글을 가장 두려워했던 것이고, 그 첫 단추에 <전환시대의 논리>가 있었던 것이다. <전환시대의 논리>는 1999년 서평전문지 <출판저널>에 의해 '20세기 한국고전'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 1980년대 초 중앙정보부는 검찰이 운동권 학생들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어느 책의 영향을 받았느냐는 물음에 대한 대답을 추려 불온한 이념 서적 리스트를 작성했다. 리영희의 저작 3권은 모두 상위권에 이름을 올렸다. <전환시대의 논리>와 <8억인과의 대화>가 각각 1, 2위를 차지했고, <우상과 이성>이 5위에 올랐다. 그의 책들은 암울한 1970~80년대의 금서였던 것이다. 그의 예견대로, <전환시대의 논리>는 베트남 전쟁과 중국 사회주의를 심도 있게 분석해 우회적으로 한국의 극단적 반공주의에 문제를 제기했으며, 당시 사회과학 서적으로는 드물게 순식간에 베스트셀러의 자리를 차지했다(권우용 기자, 「전환시대의 논리, 우상화된 정치에 돌을 던진 '가설'」, 대학신문, 2016.3.13.).
<전환시대의 논리>의 베트남 전쟁에는 두 명의 인물이 등장하는데, 공산주의를 기반으로 민족해방과 독립운동을 이끌었던 호치민과, 자유주의자로서 프랑스와 미국의 총애를 받은 고 딘 디엠이 그들이다. 노회찬 등 당시의 젊은이들에게 큰 충격을 준 베트남 전쟁의 실상에 대해 '반공성전' 대 '더러운 전쟁'과 '애국' 대 '매국' 등 두 가지 측면에서 접근해보자.

베트남 전쟁의 실상① : '반공성전' 대 '더러운 전쟁'

: "베트남 인민의 이 고통을 누가 보상할 수 있는가?"

"한국 국민이 '반공성전'이라는 현대판 미국 십자군 전쟁을 돕기 위해서 연 50만명의 군대를 베트남에 보냈던 1965년서부터 휴전이 된 1973년까지 (…)  이 기간 동안에 미국은 베트남 전쟁(라오스와 캄보디아 전선 포함)에서 약 800만t의 폭탄을 투하하고 약 700만t의 각종 포탄과 로켓탄을 발사했다. 1500만t의 이 폭·포탄은 일본을 굴복시키기 위해서 히로시마에 투하한 원자폭탄의 700발분에 해당한다. 

이해를 돕기 위해서 비교를 하자면, 태평양전쟁에서 미국이 일본 본토에 투하한 폭탄(원폭 제외)은 16만1425t이다. 베트남의 피해는 그 100배가 된다. 6·25전쟁 3년2개월간의 49만5000t의 30배가 넘는다." 리영희 (「리영희 선생이 회고하는 '광기의 베트남 전쟁'」, <한겨레 데이터베이스>, 1995.5.4.)

그런 '반공성전'에 당시 유엔은 베트남전을 '더러운 전쟁'(Dirty War)이라고 규정, 참전하지 않았다.
"그 당시 우리나라의 정부와 군부는 물론, '반공성전' 국군파병을 부추겼던 언론은 '6·25전쟁의 미국참전에 대한 보답'을 강조했다. 동양적 윤리가 물씬 났다. 그 주장은 수긍할 만했다.  그런데 미국의 덕택으로 나치 히틀러의 침공·점령·국가파멸의 위기에서 살아난 가장 큰 수혜자인 영국은 미국의 끈질긴 압력에도 불구하고 전투병력을 단 1명도 보내지 않았다. 영국 국민과 정부는 미국의 파병요구를 끝까지 거부했다.  베트남 전쟁은 '반공성전'도 아니고 '정의의 전쟁'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영국은, 영국도 베트남전쟁에 참여하고 있다는 겉치레라도 해달라는 미국의 딱한 요구에 못 이겨서, 외국의 국가원수가 올 때에 사이공의 탄손누트 공항에서 영접하는 참전국 합동의장단의 일원으로 6명의 의장대를 보내는 것으로써 영국의 생명의 은인인 미국에 보답했다.

나는 이런 사실들을 기사화하는 것으로 베트남 전쟁의 본질과 성격을 간접적으로 그리고 우회적으로 계몽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고되고 외로운 싸움이었다." 리영희 (「리영희 선생이 회고하는 '광기의 베트남 전쟁'」, <한겨레>, 1995.5.5.)

"베트남이 공산화되면 전체 아시아 국가가 도미노 패가 쓰러지듯이 차례차례로 쓰러지고 공산화된다." 이것이 미국이 작은 베트남 사태를 '인도지나 전쟁'으로 확대해 나간 전쟁 논리였다.  그 당시 한국 국민은 미국의 현대판 종교 십자군과 같은 광신적 반공주의의 허구논리의 본질을 간파할 지적, 사상적 능력이 없었다. 사회와 국민을 계몽해야 할 이 나라의 소위 '언론기관'과 '언론인'들이 앞다투어 '도미노 이론'의 나팔수가 되었다. 당시 조선일보 외신부장 리영희는 특히 미국 국무부 공식 문서를 근거자료로 사용해 반박하기 어려운 논리로 베트남 전쟁의 허와 실을 드러냈다. 베트남 전쟁이 미국의 공작이며 미국이 승리할 수 없는 전쟁이라는 것을 미 국무부 스스로 인정한 것을 증명한 것이다. 미국의 전 국방장관 로버트 맥나마라는 베트남 전쟁 중 '걸어다니는 전자계산기'(Walking Computer)니 '면도날 두뇌'니, '천재 전략가'니, 그야말로 전지전능하다는 찬사와 아부를 한몸에 받았던 인물이다. 그런 그는 회고록을 통해 베트남 전쟁을 '북베트남의 남베트남 침략전쟁'이라고 했던 자신의 견해를 부정하고 '남베트남 민중의 반란에 의한 내전이며 북베트남 군과 남베트남의 민족해방전선에 의한 인민전쟁이었다'고 기술했다. 그의 회고록  <베트남으로부터의 교훈>과 베트남어 번역본 <과거를 돌아보며>에는 이런 구절이 나온다.
"'우리는 잘못을 저질렀다. 아주 끔찍한 잘못을. 우리는 미래 세대에게 왜 이런 잘못을 저질렀는지 설명해야 하는 빚을 지고 있다. 바로 그 잘못이 베트남과 그 인민에게 심각한 후유증을 불러일으켰다.' 미국 국방장관으로서 베트남 전쟁 때 매파였던 맥나마라가 베트남 개입을 참회한 대목이다. 그는 미국이 호치민이 주도한 베트남 공산주의 운동의 민족주의적인 측면을 완전히 과소평가했다고 인정했다. 또 미국의 행동은 용서받을 수 있는 것이 못 된다고 부끄러워하며 뉘우쳤다. 그것은 사실이다. 베트남 전쟁은 미국의 전쟁이고 통일을 가로막는 제국주의적 개입 전쟁이므로, 명분 없는 전쟁이며 더러운 전쟁이라고 했다. 

돌이켜 보면 한국의 베트남 참전은 삼중성이 있다. 반공의 십자군이냐, 미국의 용병이냐, 압축 성장의 자금줄(달러 수입)이냐, 지금도 끈질긴 질문을 받는다. 옛 한국군 주둔지 곳곳에 서 있는 '한국군 증오비'는 고통스러운 표석(表石)이다." 안병찬 (「상처의 땅 적시는 '양심'의 눈물/베트남 현지 취재」, <시사저널>, 2001.7.12.)

▲"하늘에 가 닿을 죄악 만대를 기억하리라. 한국군들은 이 작은 땅에 첫 발을 내딛자마자 참혹하고 고통스런 일들을 저질렀다." 베트남 곳곳에 세워져 있는 한국군 증오비 내용 중 일부다. <미디어몽구> 유튜브 화면(2015.12.18.) 갈무리 ⓒ미디어몽구
"1975년 4월 30일, 베트남 전쟁은 종전이 됐다. 지독한 부패로 베트남 국민에게 외면받은 남베트남 정권이 끝내 무너진 것이다. 

그렇게 전쟁이 끝난 후 민간인 학살에서 살아남은 이들이 가장 먼저 한 일은 쌀을 한 주먹씩 모으는 일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모은 쌀로 그들은 한국군에 의한 학살 행위가 벌어진 마을에 '한국군 증오비'를 세우기 시작한다. 적어도 60여 군데 이상 이러한 증오비가 세워졌다." 고상만 (「"한국군에 당하느니 차라리..." 학살 증언 듣기 정말 괴로웠다」, <오마이뉴스>, 2015.9.28.)

"베트남전쟁으로 인한 사망자는 미국 추산으로는 민간인을 포함 약 120만 명, 베트남 정부 추산으로 약 300만 명에 이른다. 1994년 6월 22일 베트남 정부는 베트남 전쟁에서 100만 명의 옛 월맹(북 베트남) 군인이 전사하고 200만 명의 민간인이 죽었다고 처음으로 공식통계를 발표했다. 미국의 고엽제 등 화학무기로 200만 명의 불구자가 생겼다고도 밝혔다. 베트남 인민의 이 고통을 누가 보상할 수 있는가?" 리영희 (「리영희 선생이 회고하는 '광기의 베트남 전쟁'」, <한겨레>, 1995.5.5.)

베트남 전쟁의 실상 ② : '애국' 대 '매국'

- "우리는 베트남의 반민족분자들(베트남판 '친일파')을 도운 것"

"이 사실을 전쟁의 천재 맥나마라 국방장관은 몰랐던 것 같다. 슬픈 일이다. 미국인과 한국인은 아마 지금도 이 사실을 모르는 것 같다. 이것이 '베트남 사태'이고 '베트남 전쟁'이다." 리영희

리영희 선생이 "슬픈 일"이라며 안타까워 한 것은 베트남 전쟁과 '애국과 매국'의 문제였다.
"베트남 전쟁의 세 당사자 중 하나인 북베트남 공산당의 지도부는 차치하고라도, 미국과 한국인이 '베트콩'이라고 멸시하고 1500만t의 폭탄세례를 퍼부은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의 최고지도부 중앙위원 39명은 한 사람의 예외없이 프랑스와 일본의 지배에 항거해서 총들고 싸웠거나, 제국주의·식민지 권력 하에서 형무소를 자기집처럼 드나든 경력을 가지는 베트남의 애국자들이었다. 반면, 우리가 '자유 베트남', '반공주의 사이공 정부', '민주주의의 방패'니 하면서 미국인 전사자 5만8002명, 한국군을 포함한 '반공 동맹군' 전사자 5221명의 목숨과 피로써 도와주려 했던 남베트남 정권의 100만 정부와 군대에는 반불·반일 항쟁의 경력자가 어떤 육군중령 단 1명뿐이었다. 대통령 구엔 반 티우는 프랑스 식민육군중위였고, 수상 구엔 가오 키는 프랑스 식민공군의 소위였다. 

말하자면 베트남 민족을 배반한 베트남판 '친일파'였다. 우리는 베트남의 반민족분자들을 도운 것이다." 리영희 (「리영희 선생이 회고하는 '광기의 베트남 전쟁'」, <한겨레>, 1995.5.5.)

"리영희 선생이 쓴 <전환시대의 논리> 등을 보고 나서야 월남전의 새로운 면모를 이해하게 됐다"는 노회찬. 노회찬은 "애국심이 중요하고, 우리 국민들이 애국심을 갖길 바라지만, 그렇다고 무조건 강요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먼저 자기 나라에 자부심을 가져야 한다"고 말한 뒤 '진정한 애국'에 대해 이렇게 강조한다.
"국민들이 자기 나라에 자부심을 갖는 순간 애국심은 저절로 나온다. 애국심은 강요하거나 교육해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좋은 나라로 만드는 것은 누구의 역할인가? 그건 정치인의 역할이다. 그러라고 존재하는 것이 정치다.  (…) 

솔직히 애국심을 묻는 사람에게 되묻고 싶다. 세계에서 가장 낮은 우리나라 출산율을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이 나라는 애를 가장 낳기 싫어하는 나라로 평가받고 있다. 그리고 노인들이 가장 많이 자살하는 나라다. 여기서 탈피하려는 노력이 박제된 애국심보다 중요하다. 그것이 진정한 애국이다." 노회찬 (<대한민국 진보, 어디로 가는가?>, 비아북,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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