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9월 189개국 지도자들이 모인 유엔 새천년정상회의에서 빈곤종식을 위한 발전목표가 담긴 새천년 정상선언이 발표됐다. 새천년 정상선언의 구체적인 목표와 지표를 제시한 것이 새천년개발목표(Millenium Development Goals: MDGs)다. 여기에는 1) 절대빈곤 및 기아퇴치, 2) 보편적 초등교육 달성, 3) 양성평등과 여성능력의 고양, 4) 유아사망률 감소, 5) 산모건강의 증진, 6) 에이즈, 말라리아 및 기타 질병퇴치, 7) 지속가능한 환경보장, 8) 개발을 위한 국제 파트너십 구축 등 총 8개 목표로 구성됐다. 2015년까지 진행된 새천년개발목표의 이행성과는 빈곤과 기아의 감소를 중심으로 성공적인 것으로 평가됐다. 새천년개발목표에 이어서 새롭게 세워진 지속가능발전목표(Sustainable Development Goals: SDGs)는 2016년부터 2030년까지 이행을 목표하고 있다. 지속가능발전목표는 새천년개발목표가 주력한 기아 및 빈곤퇴치와 함께 환경적 측면이 보다 강조되어 지속가능한 발전 개념이 적극 수용된 점이 차별화된다. 이는 기후변화, 환경문제의 심각성이 반영된 것이기도 하지만, 단순히 환경 관련 목표의 상대적 중요성이 높아진 것뿐만 아니라, 지속가능성 개념을 중심으로 사회적, 경제적, 환경적 측면을 포괄한 총체적 시각으로 모든 목표들을 접근한다는 점에서 여러 목표 중의 하나로 환경 부문을 위치시킨 새천년개발목표와는 차이가 있다. 새천년개발목표와 지속가능발전목표의 이행을 유엔이 주도하는 사실에서 보듯이, 이들 목표는 국가, 민족, 지역, 계급, 젠더를 초월한 보편적인 글로벌 규범의 성격을 띠고 있다. 그런데 세계에서 가장 고립된 국가로 간주되어 온 북한은 새천년개발목표부터 지속가능발전목표까지 꾸준히 참여하는 이례적 행보를 보이고 있다. 특히, 코로나 위기의 와중에도 2021년 7월 북한은 자국의 지속가능발전목표 이행 동향이 담긴 자발적국가보고서(Voluntary National Review: VNR)를 유엔에 제출했고, 이 소식은 북한이 곧 국제사회에서 적극적 행보를 할 것이라는 기대감을 고조시켰다. 북한의 지속가능발전목표와 관련한 국내 논의는 원조를 추진하기에 앞서 북한의 실태를 파악하기 위한 사전작업에 해당하는 지표구축 방안에 초점을 두고 있다. 북한이 제출한 자발적국가보고서는 북한의 실태를 보여주는 의미 있는 지표(영양결핍유병률, 곡물생산량 등)도 있지만, 상당수의 지표 항목들은 북한의 빈약한 통계행정역량으로 인하여 부실하게 작성되거나 누락된 경우도 많아 실태를 파악하는데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가령, 지속가능발전목표의 열한 번째 목표인 지속가능한 도시와 주거지 형성 이행을 파악하는데 필요한 지표인 불량거주지에 거주하는 도시인구비율 자료가 북한의 자발적국가보고서에는 없다. 이처럼 지표 구축의 중요성을 간과해서는 안 되지만, 자발적국가보고서는 주로 국가 단위에서의 통계구축에 초점을 두면서 국가 내부의 지역별 차이는 상대적으로 간과되어 있다. 궁극적으로 원조의 목표는 지표로 드러난 추상적인 수치의 양적 변화가 아니라 주민들의 삶이 질적으로 나아지는데 있음을 상기한다면 지표 구축의 기술적, 방법론적 향상에 집중하는 것만으로는 지속가능발전목표를 이행하는데 부족하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한계를 보완하고자 지속가능발전목표를 보다 지역 차원으로 끌어내릴 필요가 있는데, 자발적국가보고서에 비해 주목받지 못한 자발적지역보고서(Voluntary Local Reviews: VLR)를 주목할 수 있다.
자발적지역보고서는 자발적국가보고서에서 확인된 국가 아래의 지역 수준에서의 상황을 파악하기 어렵다는 맹점을 보완하고자 지역 수준에서의 데이터 구축과 이행경과를 모니터링하는 데 초점을 두고 있다. 2021년 12월 기준, 약 20개국, 50개 도시 및 지방정부가 자발적지역보고서를 제출했다(<표> 참조). 흥미롭게도 미국 연방정부는 자발적국가보고서를 제출하지 않았지만, 미국의 도시정부들은 자발적지역보고서를 다수 제출했으며(뉴욕, 로스앤젤레스, 피츠버그, 올랜도). 우리나라에서는 2018년 수원시가 제출했다. 아직 북한이 자발적지역보고서를 준비하는지는 확인되지 않고 있다. 자발적국가보고서가 북한 전 지역을 대상으로 조사한다면, 자발적지역보고서는 특정 도시나 지역을 대상으로 추진한다는 점에서 다음과 같은 전략적 이점이 있다. 첫째, 북한의 입장에서 상대적으로 정치적 부담이 덜하다. 둘째, 국제사회의 입장에서 북한을 대화의 장으로 유도할 수 있다. 셋째, 지역이라는 구체적인 공간에 지표 구축 활동을 집중적으로 전개함으로써 실질적인 사업효과를 확인하기 용이하다. 여기서 자발적지역보고서를 시행할 북한의 대상지 선정을 두고서 북한은 두 가지 선택을 고려할 수 있다. 하나는 수도 평양처럼 발전된 지역을 대상지로 제안하는 것이다. 이는 북한이 지속가능발전목표의 효과적 이행을 위한 목적보다는 대내, 대외적으로 체제선전의 기회로 삼고, 또한 북한의 열악한 내부 상황을 외부에 공개하는 것에 대한 부담이 작용한 결정일 것이다. 다른 하나는 저발전 도시나 지역을 선택한 경우로 국제사회로부터 지원을 받으려는 목적이 주요하게 작용할 것이다. 우리 정부는 두 가지 선택 중에서 반드시 후자를 선호할 필요는 없으며, 국내적으로 대상지 선정을 둘러싼 과도한 논쟁도 지양할 필요가 있다. 어느 지역이 선정되든 간에 북한의 지역 수준에서 데이터를 확보, 구축하려는 시도는 데이터 자체가 부재한 현실에서 의의가 있다. 설사 체제선전의 의도가 보이는 평양이 선정되더라도 평양에는 유엔을 비롯한 여러 국제기구가 주재했다는 점에서 국제기구의 입장에서는 자발적지역보고서의 출발점으로 북한의 다른 지역보다 평양이 수월할 것이다. 또한 평양이 지방에 비해 발전되었다고는 하지만, 평양 내부에는 사회공간적 계층화(가령, '평양의 강남'으로 불리는 중구역도 있지만, 낙후된 지역도 존재)가 형성되어 있다는 점에서 북측의 체제선전만을 이유로 자발적지역보고서의 대상지에서 평양을 배제할 필요는 없다. 올 초부터 잇따른 북한의 미사일 발사로 인해 독자들은 현 국면에서 남북협력 방안을 논하는 것에 회의적일 수 있다. 필자조차도 그러한 회의감이 없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비핵화, 군사 부문 중심의 협상이 남북관계를 개선하는데 큰 성과를 얻지 못했음을 부인하기 어렵다는 점에서 앞으로 남북협상의 '도로'를 비핵화/군사 부문의 1차선에서 교류협력과 같은 비군사 부문의 2차선, 3차선으로 늘리는 것이 역설적으로 정체된 1차선 도로를 변화시킬 돌파구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남북관계와 무관해 보이는 유엔의 지속가능발전목표를 활용하려는 이 글처럼 다양한 상상력이 필요한 국면이다.
* 이 글은 필자가 연구책임을 맡은 <북한의 효과적인 SDGs 이행을 위한 공간전략 탐색: 접경지역 산림특구안을 중심으로>(통일연구원, 2021)에서 일부를 칼럼의 취지에 맞게 재구성했다.
황진태 박사는 북한도시, 북한일상생활, 인간 너머의 지리학 등을 연구하며, 최근 <한반도 에너지 전환>(생각비행, 2021)을 편저, <Living with Pandemics>(Edward Elgar, 2021)를 공저했다. Antipode, Journal of Cleaner Production, Journal of Contemporary Asia 등의 국제저명학술지에 다수의 논문을 게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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