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계급 정당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진보정당
제6공화국 대선에서 진보정당은 늘 고전을 면치 못했다. 그러나 이번 대선에서 정의당을 비롯한 진보정당들이 거둔 성적은 역대 다른 대선들과 비교해도 특히 저조했다. 만약 정의당 등이 뭔가를 좀 달리 했다면, 결과가 달랐을까? 제20대 대선에서는 이런 식의 평가는 별 의미가 없다고 본다. 전략이나 구호가 약간 더 나았다고 결과가 달라지기에는 기본 구도 자체가 너무 힘겨웠다. 2012년 대선만큼이나, 아니 어떤 점에서는 그때보다 더 강력하게 양대 정당 후보의 구심력이 작동했기에 진보정당 후보들의 지지를 크게 확대하기는 어차피 불가능했을 것이다. 후보로 누가 나왔든, 핵심 정책이나 구호로 뭘 내세웠든 말이다. 하지만 득표에는 크게 변화가 없었을지라도 뭔가를 더 남기는 선거는 가능했고, 또한 절실히 필요했다. 물론 진보정당들은 이번 대선에서 양대 진영에 흡수되지 않고 완주했다는 사실만으로도 상당히 중요한 것을 남기기는 했다. 2012년 대선처럼 이마저도 못했다면, 진보정당운동은 더 큰 위기에 빠졌을 것이다. 정의당 심상정, 진보당 김재연, 노동당 이백윤, 세 후보는 이 점에서 최소한의 역사적 역할을 했다. 그러나 진보정당운동의 반등을 위해 미래의 자원으로 더 남길 수 있고 더 남겨야 했는데 그러지 못한 게 분명히 있다. 정의당이 내세웠던 구호로 표현한다면, "불평등, 기후위기, 차별"을 극복할 정당은 진보정당뿐이라는 점을 확실히 각인시켜야 했다. 완주를 통해 다당 정치의 진심을 증명할 뿐만 아니라, 유권자들의 뇌리에 이런 인상을 뚜렷이 새김으로써 양대 정당 말고 다른 정당이 더 존재하고 성장해야 할 필요성을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되는 상황을 만들어야 했다. 한데 아무리 봐도 이 점에서 진보정당들은 실패했다. 기후위기 쟁점과 관련해서는 한국 사회 여론 지형 전체에 문제가 있다고 할 수 있겠고, 주로 여성 문제가 부각된 차별 쟁점 관련해서는 더불어민주당이 선거전 막판에 진보정당의 성취를 재빨리 흡수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불평등 쟁점과 관련해서는 이런 상황 논리가 통하지 않는다.원내정당 체질에서 벗어나 새 정당 모델을 만들어야 한다
왜 이런 한계와 실패가 나타났는가? 나는 특히 정의당과 관련해 지난 십수 년 동안 쌓여온 원내정당 체질을 지적하고 싶다. 국회 내에서 몇몇 국회의원이 벌이는 활동이 당 일상활동의 거의 전부가 되어버린 것이 근본 문제라는 이야기다. 앞에 지적한 이번 대선의 두 문제, 즉 "주4일제" 구호와 진보진영 단일후보 무산도 이와 직결된다. 다른 훌륭한 노동 공약들이 있었음에도 "주4일제"만 부각된 것은 사회관계망서비스 여론 때문이었다. 정의당 내 대선 후보 경선 때부터 일부 사회관계망서비스를 중심으로 심상정 후보의 "주4일제" 공약에 유독 호응하는 여론이 일었다. 이런 서비스에 상대적으로 더 빈번히 접속하는 젊은 화이트칼라의 성향이 반영된 결과였다. 다른 정책에는 별다른 반응이 없는데 "주4일제"만은 일정한 반향이 있으니 정책 결정자 입장에서는 이를 무시할 수 없었을 것이다. 결국 "주4일제 복지국가"가 대선에서 정의당을 대표하는 비전이 되었다. 여기에서 문제는 사회관계망서비스 말고 정의당이 노동 정책에 관해 소통할 수 있는 다른 창구가 없었다는 점이다. 평소에 플랫폼 노동자들이나 비정규직 노동자들과 함께 실천하고 토론하는 통로가 마련되어 있었다면, 이런 곳에서 확인하는 반응은 또 달랐을 것이다. 그랬다면 비록 일부 사회관계망서비스에서 특정 정책이 별난 호응을 받았다 하더라도 다른 곳의 반응까지 포함해 보다 종합적인 결론을 내릴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럴 통로가 없었다. 일상시기에 노동 현장과 접촉해 이런 교류의 장을 만들어놓지 못했던 것이다. 진보진영 단일후보 무산 역시 근본 원인은 일상활동에서 찾아야 한다. 대선을 코앞에 두고 정의당과 진보당이 벌인 신경전만 따져서는 답이 나오지 않는다. 누가 더 잘못했는지, 누가 더 오만하고 어리석었는지 따지는 것도 우스운 일이다. 결국은 일상시기에 서로 교류하고 연대하며 신뢰를 쌓지 못했기에 비상시기에 아무것도 함께 이뤄낼 수 없었던 것이다. 평소에 진보정당연합이라는 틀을 만들어 공동실천의 경험을 축적하지 못한 데서 원인을 찾아야 한다. 그래야 앞으로 똑같은 잘못을 반복하지 않을 수 있다. 다른 진보정당은 몰라도 정의당은 이 경우에도 원내정당에 매몰된 탓이 컸다. 진보당, 녹색당, 노동당 등이 원내 정당이었다면, 정의당이 그토록 교류와 연대에 무심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나머지 정당들이 다 원외에 있고 정의당의 시야는 원내에 갇혀 있었기에 진보정당연합이 필요하다는 생각 자체가 별로 없었다. 그리고 이런 한계가 대선 같은 결정적인 국면에 발목을 잡았다. 이런 점에서 정의당은 원내정당 체질에서 벗어나 새로운 정당 모델을 다시 구축하지 않는 한 앞으로 미래를 열 수 없을 것이다. "불평등, 기후위기, 차별을 극복"하는 정당이라고 자임하는데도 그렇게 인정받지 못하는 이유가 이 문제와 직결됨을 확인해야 한다. 이 사실을 직시하고 이와 정면대결하지 않는다면, 모처럼 내놓은 "다당제 민주주의 정치교체를 위한 제3정치 연대"도 일회적인 선언이나 제안에 그치고 말 것이다. 현실정치 논리로 봐도 그렇다. 더불어민주당은 원내에 170석 이상을 지닌 야당이 됐다. 100석도 안 되는 의석으로 원내에서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었던 제18대 국회(2008-2012, 이명박 정부 시기)의 민주당이 아니다. 유권자 입장에서도 원내 거대 야당이 있는데 굳이 조금 더 센 이야기를 하는 6석짜리 야당에까지 눈길을 보내며 ‘다당 정치'에 손을 들어줄 이유가 없다. 정의당이 존재 의의를 지니려면, 같은 무대에서 노는 약소 세력이 아니라, 전혀 다른 무대에서 다른 역할을 하는 세력이 되어야만 한다. 앞으로 정의당을 비롯한 진보정당운동 전반의 최대 약점이 될 리더십 문제와 관련해서도 이 점은 중요하다. 민주노동당이 만들어낸, 가장 유망했던 두 지도자 중에서 이제는 노회찬도 없고, 심상정도 예전 같지 않을 것이다. 새로운 지도자군이 대두해야 하는데, 이들이 성장할 무대는 결코 여의도 국회는 아닐 것이다. 노동운동을 비롯한 사회운동들과 함께 새로운 현실을 만들어내고, 불가능할 것만 같은 진보정당들의 교류와 연대를 성사시키며 신뢰를 일궈가는 과정에서만 그런 지도자군이 부상할 것이다. 당장 지방선거를 앞둔 지금부터 정의당은 이런 시대적 요청에 답해야 한다. 정의당은 "다당제 민주주의 정치교체를 위한 제3정치 연대"라는 자신의 제안이 실은 자당의 일대 변신을 요구한다는 점부터 뼈저리게 확인해야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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