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가 미쳐 돌아가고 있다. 아이돌그룹 <트레져>의 노래 '미쳐가네'는 즐거움을 선사하지만 미쳐가는 세계는 스트레스만을 줄 뿐이다. 이런 와중에 가장 참기 힘든 것은 상상도 못한 인물들이 국가지도자가 되는 일들이 수시로 발생한다는 것이다. 트럼프, 보우소나루, 존슨 등이 그런 인물이다. 천박하기 그지없는 언동이 어느새 소탈함으로 윤색되어 대중에게 전해진다. 이런 인물들이 연이어 지도자가 되는 이 이상한 흐름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1930년대 무솔리니, 히틀러가 연이어 등장한 것이 돌발적 이벤트가 아니고 경제적 하부구조에 조응하는 상부구조의 변화이듯 이들의 등장도 비슷한 게 아닐까? 이런 일이 역사에서 또 있었을까? 비슷한 사례가 있었다. 나폴레옹 3세가 된 루이 보나파르트다. 답답한 마음에 책을 집어 들었다. 마르크스가 쓴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이하 <브뤼메르 18일>)이다. <자본론>이 마르크스의 경제학을 대표한다면 <브뤼메르 18일>은 정치학을 대표한다.(브뤼메르18일은 프랑스 혁명력에 따른 날짜로 1799년 18일 나폴레옹이 정변을 일으킨 날을 가리킨다.) 바로 읽어서는 이해하기가 어렵기에 책에 나오지 않는 (당대인 독자는 이미 알고 있던) 전후 사건을 간단히 정리할 필요가 있다. 나폴레옹 1세가 마침내 대(對)프랑스 동맹군에 의해 몰락한다. 주변국가들은 부르봉왕가의 복귀를 지지했다. 루이 16세의 아들의 행방이 알려지지 않아서 루이 16세의 동생인 루이 18세가 왕위에 오른다. 루이 18세는 어느 정도 온정적인 정치를 추구했다. 1824년 루이 18세가 사망하고 남동생 샤를 10세가 국왕에 즉위한다. 형과 달리 보수적이고 반동적이었다. 그는 망명귀족들의 토지를 회복시켜 주는 등 부유층 귀족만을 위한 정치를 한다. 이의 여파로 의회에서 입헌군주제를 지지하는 의원들이 세를 불린다. 샤를 10세는 의회를 무력화하기 위해 재선거를 시도하고 대중들은 7월 혁명을 일으킨다. 샤를 10세는 퇴위하면서 앙리 5세를 지명해 부르봉가를 잇게 하려 하지만 국민들은 부르봉가가 아닌 오를레앙공의 아들 루이 필리프를 추대한다. 루이 필리프 1세는 입헌군주정의 국왕으로 1830부터 1848까지 통치한다. 자본주의의 발전에 따라 몸집이 비대해진 프랑스 부르주아는 입헌군주정을 넘어서는 공화정을 꿈꾸기 시작한다. 경제불황의 와중에 개혁파는 개혁연회(变革宴會)를 조직하기 시작했으나 정부가 금지시킨다. 이 금지령을 도화선으로 대중의 폭동이 발생해 루이 필리프 1세는 퇴위하고 임시정부가 들어서며 2월 혁명은 성공한다. 1848년 6월, 가난한 이들에게 일자리를 제공하던 국립작업장이 폐쇄되자 노동자들이 시위를 벌였고 정부는 시위를 진압했다. 급진파와 노동자들의 6월 봉기는 실패로 끝난다. 6월 봉기로 프롤레타리아는 결정적 타격을 받고 정치권에서 거의 힘을 못쓰게 된다. 제헌의회에서 만든 보통선거제에 의해 나폴레옹의 조카 볼품없고 '기괴한'(마르크스의 표현) 인물 루이 보나파르트가 대통령이 된다. 그러나 4년이 채 되지 않아 그는 쿠데타를 통해 황제에 즉위한다. 책이 주목하는 것은 2월 혁명 이후 임시정부, 제헌의회가 만들어지고 보나파르트의 대통령 당선과 연이은 황제즉위의 과정을 연대기적으로 이야기하고 분석한다.
<브뤼메르 18일>의 앞머리에는 유명한 문장이 나온다. "헤겔은 어디선가 세계사에서 막대한 중요성을 지닌 모든 사건과 인물들은 반복된다고 언급한 적이 있다. 그러나 그는 다음과 같은 말을 덧붙이는 것을 잊었다. 한번은 비극으로 다음은 소극(笑劇 어릿광대극)으로 끝난다는 사실 말이다." 나폴레옹은 비극을 보나파르트는 소극을 상징하는 인물일 것이다. 민중들의 투쟁을 통해 도입된 보통선거제가 어째서 보나파르트같이 이상한 인물이 당선되는 것으로 귀결되었을까가 책의 핵심 주제다. 책은 2월 혁명부터 시작한다. 2월혁명의 원래 의도는 선거개혁과 금융귀족의 배타적 지배를 타도하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노동자들의 6월 봉기가 실패하면서 2월혁명은 보수화된다. 급진파의 좌회전에 두려움을 느낀 왕당파와 대토지, 대산업부르주아들은 질서당을 만든다. 질서당은 특히 토지귀족인 부르봉가와 금융귀족인 오를레앙가의 연합이었다. 부르주아정파들은 이전에는 자유주의라 찬양하던 것을 이후에는 '사회주의적'이라며 비난하고 급진적 정파들의 활동을 규제하려 들었다. 1850년 3월 18일 보궐선거에서 산악당과 소수의 사회주의자가 결합한 사회민주당이 급부상하자 질서당이 주도하는 의회는 5월 31일 새 선거법을 시행한다. 새 법은 보통선거제 폐지에 다름 아니었다. 선거구에 3년 이상 거주한 자로 투표권자가 제한되면 떠돌면서 일을 하던 노동자, 대중들의 선거참여가 원천봉쇄되는 것이었다. 이후 질서당은 언론출판법을 통해 모든 영역에서 급진파의 영향력을 차단하고자 했다. 이렇게 급진파에 대한 봉쇄가 이루어진 후 대통령 보나파르트와 질서당의 갈등이 본격화된다. 헌법 상 대통령은 단임제였다. 보나파르트는 헌법을 개정하려 했다. 질서당은 이에 저항했지만 보나파르트는 쿠데타를 일으켜 황제에 취임하게 된다. 이때 부르주아는 자신들의 대변자인 질서당을 외면하고 보나파르트 지지로 돌아섰다. 갑작스레 온 불황의 원인을 이해하지 못하던 부르주아는 불황을 국내 정치의 불안정에서 찾았기 때문이다. 결국 왕을 끌어내린 프랑스가 황제를 불러내었던 셈이다. 마르크스는 이 소극의 배경을 분석해 나간다. 그는 이 일이 발생한 주요원인을 '분할지농민'이 처한 경제적 조건의 변화에서 찾았다. 보나파르트가 분할지농민을 대변한다고 보았던 것이다. 프랑스혁명 이후 봉건적 소유관계에 있던 토지들이 농민들에게 분배되었다. 봉건적 예속에서 벗어나 자신들의 토지를 소유하고 경작하게 된 새로운 계급의 출현이었다. 이들은 계급구성 상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마르크스는 분할지 농민에 대해 이렇게 적고 있다. "분할지 농민은 거대한 대중을 형성한다. 그 성원들은 상호 간에 많은 관계를 맺지 않으면서도 유사한 조건 속에서 살아간다. 그들의 생산양식은 상호교류를 가져오지 못하고 서로를 고립시킨다." 마르크스의 이어지는 설명이다. "분할지 농민들 사이에 단순히 지방적 연계만이 있는 한 그리고 그들 간의 이해의 동질성이 그들 간에 어떠한 공통성이나 전국적 결합, 정치조직 등을 산출하지 못하는 한, 그들은 계급을 형성하지 못한다. 그렇기에 그들은 의회를 통해서건 국민공회를 통해서건 간에 자기의 이름으로 자기 계급의 이해를 관철시켜 나갈 수 없다. 그들은 스스로를 대표할 수 없고, 누군가에 의해 대표되어야 한다." 거대하지만 독립적인 정치세력이 없었던 분할지농민은 보나파르트에게서 자신들의 희망을 찾고자 했던 것이다. 마르크스는 농민들의 보나파르트에 대한 지지를 두 가지 요인에서 찾고 있다. 첫 번째는 전국적으로 분포해 있어서 분할지 농민이라는 동일한 정체성에도 불구하고 전국 단위의 계급의식이나 정치조직 등을 만들어 내지 못했다. 대혁명 이후 나폴레옹의 법령을 통해 소유권을 확립한 분할지농민들은 민중의 다수였지만 자신들만의 대표자를 만들지 못했다. 게다가 농민을 해방시켰던 분할지토지가 보나파르트 치세 즈음엔 농민들을 옭아매는 족쇄가 되어버렸다. 마르크스의 설명이다.
"농업의 계속된 황폐화와 경작자의 부채증가라는 경제적, 물적조건의 불가피한 결과가 생겨나는 데는 단지 두 세대만으로 충분했다. 나폴레옹이 확립한 소유형태가 19세기 초반에는 프랑스 농민대중의 해방과 그들을 부유하게 하는 조건이었으나 19세기를 경과하면서 농촌주민의 노예화와 궁핍화를 초래하는 법으로 발전했다."
농촌의 빈곤화는 농촌에 침투한 자본주의적 금융 때문이었다. 농촌은 귀족영주에서 고리대금업자의 무대로 변했다. 당시 프랑스 전체 토지에 걸린 저당채무에 따른 이자지불액은 영국 국채 전체의 한해 이자에 맞먹었다. 소농이 이자에 허덕이며 몰락하고 사회극빈층은 급격히 증가했다. 책의 설명이다.
"부인과 아이들을 포함한 1,600만 프랑스 농민들은 가축우리 같은 오두막에서 살고 있으며 대부분의 집은 겨우 한 개 혹은 두 개, 가장 나은 것이 기껏해야 세 개의 창문을 가지고 있을 뿐이다. (중략) 프랑스 정부가 공식적으로 인정한 수치에 따르면, 아이 포함 400만 명의 빈민들, 부랑자, 범죄자, 창녀의 숫자에는 생존의 한계를 떠돌며 농촌에서 유령처럼 출몰하거나 헤어진 넝마옷을 입고 아이들과 함께 도시에서 농촌으로, 혹은 농촌에서 도시로 떠도는 500만 명이 더해져야 한다."
나폴레옹 치하에는 토지에 기반한 봉건귀족을 몰아내려던 부르주아와 농민의 이해관계가 일치할 수 있었다. 하지만 농촌을 황폐화시키는 금융 부르주아와 분할지 농민의 이해는 상충할 수 밖에 없었다. 엥겔스는 <브뤼메르 18일>을 사회경제적 조건의 악화가 초래하는 계급간의 정치과정을 묘사한 책으로 이해한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이해하는 <브뤼메르 18일>이다. 엥겔스와는 달리 일본을 대표하는 사상가 가라타니 고진은 <브뤼메르 18일>을 색다르게 독해한다. 그에게 책은 실제의 역사가 아니라 국가원리에 대한 고찰이다. 어떤 특이한 고찰일까? 근대 민주주의의 최대 성과인 보통선거에 근거한 대의제가 본래적인 구멍(결함)을 갖고 있다는 통찰이다. 고진의 말이다. "즉 거기서 (의회-필자주) '대표하는 것'과 '대표되는 것'에 필연적인 관계가 있을 수 없다“ ”'대표하는 자'와 '대표된 자'의 관계가 본래적으로 자의적이기 때문에 산업부르주아지도 그 외의 계급도 '대표하는 자'를 내버리고 보나파르트를 선택하는 일이 가능했던 것이다."( <역사와 반복>에서 인용 가라타니 고진 도서출판 b) 엥겔스의 관점과는 사뭇 다르다. 고진은 민중이 자신을 대변하지 않는 자를 선택하는 이런 양자의 자의적 관계를 마르크스가 직관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에 따르면 이런 '자의적' 관계성이 보통선거, 대의제민주주주의와 만나 '기괴한' 자들이 왕이 되는 것이다. 이것이 고진이 말하는 대의제의 '구멍'이다. 구멍은 또 다른 역사에서도 찾을 수 있다. 고진은 이렇게 주장한다. "히틀러정권은 바이마르 체제의 이상적 대표제 속에서 출현했으며, 더욱이 종종 무시되는 것이지만, 일본 천황제 파시즘도 1925년에 성립된 보통선거법 이후에 대두되기 시작한 것이다." 모든 민중에게 1인 1표를 보장하는 진짜 민주주의가 파시즘으로 연결되기 쉽다는 것은 대의제민주주의의 커다란 구멍이자 결함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플라톤의 민주주의에 대한 혐오에는 이런 생각이 바탕에 짙게 깔려 있다. 자본이 위태로울 때 국가의 폭력성이 본격적으로 모습을 드러낸다. 보나파르트의 쿠데타는 당시의 불황과 연결된다. 미국 시스템이 백인 하층노동자의 삶을 충족시키지 못할 때 트럼프가 나타난 것과 동일한 이유다. 세계체제론자 월러스틴은 21세기 중반이면 자본주의가 종말에 도달할 것으로 예측한다. 그때까지 세계경제는 지속적인 불황국면에 진입할 것이다. 우리가 앞으로 목도하게 될 현실은 대의제민주주의, 자유민주주의, 자본주의라는 삼위일체 패키지가 서서히 좌초하는 것이다. 기괴한 자들의 출현은 사회적 불건강함의 징표다. 사회가 기층민중이 아닌 '자본'에 방점을 찍는 한 '기괴한 자'들은 앞으로도 끊임없이 등장할 것이다. <브뤼메르 18일>은 이런 미래에 대한 통찰을 한 '기괴한' 인물을 통해 그려낸 예언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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