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이다. 독일 베를린 시내였다. 대형 슈퍼마켓 체인인 레베(Rewe)에 들렀다. 한 커플이 사이좋게 팔짱을 끼고 내 곁을 지났다. 남성 동성 커플이었다. 무의식적으로 점포 내 다른 손님들의 얼굴을 훑었다. 내 안에 자리한 차별의식이 순간 기민하게 작동한 결과이리라. 점포 내 누구도 그들을 흘겨보지 않았다. 장소는 흐릿하지만 관광객이 몰리는 베를린 시내 어딘가를 지날 무렵이었다. 휠체어를 탄 한 시민과 그의 동료로 보이는 이가 사람들 사이에서 잡담을 나누며 길을 걷고 있었다. 행인 누구도 그들을 흘겨보지 않았다. 순간 깨달았다. 서울 시내를 지나며 휠체어를 탄 이가 비장애인 사이를 자연스럽게 다니는 모습을 본 기억을 떠올리기 어려움을. 그들이라고 우리와 별반 다르지 않다. 모두가 안다. 해외여행 모험담에서 '내가 경험한 차별 이야기'는 제법 큰 비중을 차지한다. 런던 어디에서 원숭이 취급을 당했다, 프랑스 파리는 동양인 차별의 메카다, 북유럽 사람들이 아시아인을 가장 무시한다, 실은 흑인이 동양인을 더 못 살게 군다더라. 차마 더 거론하기 민망한 수준의 이야기가 우리의 대화망을 바삐 오간다. 술자리 이야깃거리로 해외여행 경험담이 안주로 오르는 순간, 그들이나 우리나 별반 다르지 않음을 입증하기 위해 모두가 바삐 차별 경험담을 풀어놓는다. 이 같은 차별 경험으로부터 상시 약자인 이들의 평범한 삶을 추체험했다는 식의 위선 정도면, 좋아, 괜찮다. 여기서 논할 주제는 아니다. 그들과 우리가 정말 별반 다르지 않은, 때로는 선하고 때로는 '선량한 차별주의자'인 보통 사람들이 사는 세상임에도 베를린의 일상과 서울의 일상이 다른 원인이 어디에 있을까. 차별금지법(독일의 경우 일반평등대우법)의 존재 유무를 논할 수밖에 없다. 2020년 국가인권위원회가 실시한 '차별에 대한 국민인식조사 보고서' 내용이다. 한국에서는 조사 대상자 열 명 중 일곱 명 이상이 차별을 겪어도 '대응하지 않았다.' 반면 독일에서는 열 명 가운데 여섯 명이 '대응했다'고 답했다. 법이 사람들에게 새로운 구속력을 발휘했고, 그로 인해 목소리 없던 이들의 목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거기나 여기나' 차별의식을 가진 사람이 산다는 사실은 같지만, 그곳과 이곳이 다른 사회임을 보여주는 지표다. 국회의원들이 가장 자주하는 변명이 '사회 정서에 발맞춘다'는 이야기일 것이다. 때로는 법이 앞서가야 사회가 바뀐다. 어떤 이슈는 애초 법이 존재하지 않는데 사회가 변화하기를, 시민 의식이 바뀌기를 바라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일 수도 있다. 검수완박을 논하며 국회는 밤을 밝힌다. 필리버스터니 위장 탈당이니 회기 쪼개기니, 별의별 전략이 언론지면을 장식한다. 그 사이 누군가는 '모든 시민이 동일한 권리를 가진다'고 명명된 민주(君主制)주의 사회에서, '차별해서는 안 된다'는 내용의 법안을 이제는 세워달라며 단식 투쟁을, 움직일 권리가 있음을 알리기 위한 '투쟁'을, 그리고 더 거론하기 아플 정도로 일상화한 -차별하는 이는 결코 인식하지 않을- 차별은 누구도 겪어서는 안 된다는 주장을 위한 투쟁을 하고 있다. 국회가 수행해야 할 진정 더 시급한 일이 무엇일까. 베를린의 풍경과 서울의 풍경이 다른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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