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가족부를 폐지함으로써 여성가족부를 강화하겠다.'
지난 11일 열린 김현숙 여성가족부 장관 후보자 인사청문회의 결론이다. 청문회의 핵심 쟁점은 모두의 예상대로 '여가부 폐지'로 수렴됐고, 이 과정에서 김 후보자와 여당 측 여성가족위원회 위원들은 여가부 폐지야말로 "여가부의 기능과 역할을 극대화하는 방향"이라는 역설적인 논리를 구축했다. 김 후보자는 청문회에서 여가부 폐지에 대한 입장, 폐지의 명분과 이후의 대안 등을 묻는 더불어민주당 측 여가위원들의 질문에 "여가부 폐지 원칙은 변하지 않는다"고 반복해 대답했다. 폐지의 명분으론 "젠더갈등을 해결하지 못한 점", "권력형 성범죄에 대응하지 못한 점" 등을 제시했다. 다만 김 후보자는 경력단절 여성 지원이나 디지털성범죄 지원체계 구축 등을 예시로 들며 "여가부가 수행하던 실제적인 역할과 기능"이 존재함을 인정하며 이러한 기능들을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강화 및 보완하는 방안이 바로 여가부 폐지라고 주장했다. 김 후보자의 논리는 "여성가족부 자체가 반헌법적 기관"(하태경)이라거나 "여성가족부는 역사적 소임을 다했다"(윤석열)고 주장했던 정부여당 측 기존 논리와는 차이를 보인다. 대선 공약 당시의 여가부 폐지론이 "구조적 성차별은 없다"는 인식에 기반한 무용론 또는 역차별론이었다면, 청문회 당시의 여가부 폐지론은 '여가부가 없더라도 타 부서에서 여성차별 문제를 해결할 수 있으며, 오히려 여가부의 기능을 다른 부처와 통폐합하는 것이 차별시정에 더욱 효과적'이라는 수정론에 가까웠다. 다만 민주당 측 여가위원 등 여가부 폐지에 반대하는 이들은 이를 공약 폐기 리스크를 관리하기 위한 정부여당의 전략적 접근일 뿐이라고 봤다. 김 후보자를 비롯한 정부여당 관계자들이 6.1지방선거를 앞두고 2030남성 지지층의 이탈을 막기 위해 "구체적인 대안이나 보완 방안도 없이"(권인숙) 여가부 폐지론에 살을 붙이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다보니 "장관 후보가 부처 폐지 임무를 부여 받은 헌정 사상 처음 있는 일"(유정주)이 벌어지고, '여가부를 폐지함으로써 여가부 기능을 강화하겠다'는 역설적인 논리가 탄생했다. 김 후보자의 "여가부가 기능을 다 하지 못했다"는 주장에 권인숙 여가위 민주당 간사는 "그렇다면 폐지해야만 하는 근거가 무엇인가, 기능이 불충분하다면 기능과 역할, 권한을 강화함으로써 문제를 보완할 수 있지 않느냐"고 반발했고, 김 후보자는 이에 별다른 대답을 남기지 않았다. 부처 폐지 이후 여성정책 운영에 대한 구체적 비전을 묻는 질문엔 "여러 의견을 수렴하겠다"는 대답으로 일관했다. 유리천장 문제 등을 '부처 폐지를 통해 더 효과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차별지점으로 거론하면서도 "구조적 성차별은 없는가"라는 질의에 대해서는 명확히 답변하지 못했다.전담부처 없는 성평등 추진 가능할까 … 국제사회는 "부처 하나로 역부족"
청문회 당시 김 후보자가 주장한 여가부 폐지론에 따르면, 청문회 이후 이어질 여가부 폐지 논쟁은 결국 '전담부처 없이 성차별 시정이 가능한가'라는 질문으로 수렴할 수밖에 없다. 여성가족부와 같은 전담부처 없이 성평등을 추진하는 일이 아예 불가능하지는 않다. 가령 벨기에의 경우 유럽성평등연구소(EIGE)가 집계하는 유럽 내 성평등지수에서 유럽평균(68점)보다 높은 72.7점을 기록하고 있지만 "여성문제를 전담하는 독립부처는 없다."(파트릭 앵글베르) 문제는 벨기에와 같은 '성평등 추진체계'가 한국에 세워져 있는가, 혹은 전담 부처도 없이 세워질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지난 3일 민주당 전국여성위원회의 주최로 열린 '성평등 추진 기구 강화를 위한 국제토론회'에서 벨기에, 독일, 캐나다 등 국제사회의 전문가들은 성평등 실현을 위한 정책적 시스템인 '성주류화'를 구축하는 데 있어 오히려 "전담부처 하나의 노력만으론 역부족"이라는 의견을 개진한 바 있다. 토론회에 참가한 파트릭 앵글베르 주한벨기에대사관 공관차석은 여성 전담부처가 따로 없는 벨기에의 경우에도 '성평등, 기회균등, 다양성부'나 국무부 내 양성평등연구원 등 "관련 업무 담당 기관들"이 존재하며 "젠더 관점을 모든 연방정책에 접목하고자 하는 법률"이 2007년부터 시행되고 있음을 강조했다. 해당 법률을 통해 벨기에의 모든 정치, 행정 영역에선 정책에 대한 젠더관점 접목을 감시하고 젠더 데이터를 수집하는 일이 추진되고 있으며, 부처간조정그룹(IGC)이 이 법률의 적용을 독립적으로 담당한다. 캐나다의 경우에도 2018년부터 연방 예산을 들여 '젠더 성과 체계(GRF)'를 시작, 캐나다의 경제, 사회, 정치적 삶에 있어서의 성평등을 평가하고 모니터링한다. 루슬란 카츠 주한캐나다대사관 참사관은 캐나다 정부가 "'젠더 기반 분석 플러스(GBA+)' 평가 프로세스를 주도해서 공공정책을 검토"하고, 2018년 출범한 전담부처 '여성과 성평등부'를 통해 "각계 부처 전반에 걸쳐서 활발한 GBA+가 실현될 수 있도록" 시스템을 구축했으며 "여기에 상당한 예산이 할당되고 있다"고 강조했다. 이처럼 전담 부처 혹은 기관의 "강한 권한"을 바탕으로 "전 부서가 성평등을 함께 집행"(하나 베커 주한독일대사관 1등 서기관)하는 것이 성 주류화 사업의 관건이지만, 한국의 경우 여성가족부가 존치하는 현재에도 그것이 여의치 않다. 성평등 추진을 담당하는 부처 및 기관들이 "그에 맞는 권한과 조직을 갖추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박선영 한국여성정책연구원) 전윤정 국회입법조사처 조사관은 해당 토론회에서 국내에도 양성평등위원회, 양성평등정책 담당관 제도 등이 마련되어 있지만 "양평위가 심의 기구로서의 역할 이상을 넘지 않고 있는" 등 성 주류화 관련 기존 제도는 "국가 성평등 관련 정책의 총괄·조정 기능을 수행하고 있다고 보기 어렵다"고 지적하기도 했다.국민의힘 정부조직법 개정안은 '여성정책 조정·기획' 기능 삭제
지난 6일 권선동 국민의힘 원내대표는 여가부 폐지를 골자로 하는 정부조직법 개정안을 발의했다. 11일 청문회에서 김 후보자는 해당 개정안에 대해 "여성정책이 폐지된 것은 아니다"라고 입장을 밝혔다. 그러나 정치·행정 영역 전반의 성 주류화 시스템이 미흡한 상황에서 '여가부 폐지를 통한 여가부 기능(성평등 추진)의 강화'를 주장하기 위해선 "구체적인 대안이나 보완 내용이 있어야 한다"는 게 11일 청문회에서 나온 민주당 측 의원들의 지적이다. 양이원영 의원은 특히 "여성정책 기능이 폐지되진 않는다"는 김 후보자의 답변에 대해 "(정부조직법 개정안에 의하면) 여성정책 기획·조정 업무가 아예 증발했는데, 끝까지 남아있다고 이야기 하는 건가" 되물었다. 해당 개정안의 내용을 보면, 여가부 장관의 소관 업무 중 '여성 권익 증진 등 지위향상'은 법무부, 행정안전부, 고용노동부 등으로 승계되지만 여성정책 기획·조정 업무는 별다른 승계 없이 삭제돼 있다. 이에 양이 의원은 "성평등 관련 정책을 조정·기획하는 양성평등정책 기본계획 등의 업무가 다 사라지는 것"이라며 "(청문회에서) 국민의힘 측 의원들도 후보자도 말로는 여성의 구조적 차별 문제를 인정하고 여성의 권익증진 필요성에 동의하신다. 그런데 말이 아니라 이 문제를 구조적으로 어떻게 해결할 것인지를 보여줘야 한다"라고 주장했다. 여당 측 정부조직법 개정안이 여가부의 필요 기능을 적절히 강화하기 보단, 오히려 성 주류화 사업에 역행하고 있다고 지적한 것이다. 이후 진행된 청문회에서 김 후보자는 해당 지적에 "충분히 검토하겠다"는 답변으로 일관했다. 김미애 국민의힘 의원은 "여성정책 기획·조정 부분이 (개정안에서) 빠져있지만, 해당 법안이 현재 시행되고 있는 건 아니지 않나, 앞으로 제가 다른 법안을 발의할 수도 있고 민주당도 발의할 수 있다"며 폐지 이후 보완론을 강조했지만, 이날 청문회에서 여가부 기능 승계에 대한 구체적인 보완안은 끝내 나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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