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은 우리에게 너무나 익숙하다. 많은 사람들이 삼국지와 논어를 논한다. 일견 한국 사람들은 중국을 잘 아는 듯하다. 그러나 현대 중국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20세기 중국은 정부가 수립되고 거의 40년 동안 사회주의 혁명을 경험했다. 중국인민들 역시 사회주의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우리가 아는 개혁개방 이후의 중국이 아니라 그 이전의 중국을 이해해야만 비로소 진짜 중국인들이 보이게 된다. 중국인민의 심리적 상태를 해부한 책을 하나 꺼내 들었다. 중국을 대표하는 지식인인 중국 사회과학원 문학연구소의 연구원 허자오톈의 <현대중국의 사상적 곤경>(임우경 옮김, 창비 펴냄)이다. 허자오톈은 대만 친구의 말을 책에서 소개하며 논의를 시작한다. "세계 곳곳을 다녀본 한 대만 친구는 자기가 본 다양한 지역들 중 일상적 언어로 보나 삶의 분위기로 보나 중국만큼 돈을 중시하는 곳은 없을 거라며 개탄했다. 그의 관찰은 내게 꽤나 의미 있게 다가왔다." 허자오톈은 바로 이렇게 질문한다. "중국은 아주 오랜 시간 동안 일상적 윤리를 매우 강조해온 사회인데, 왜 이런 곳에서 도리어 시장논리가 그처럼 쉽게 관철되고 소비주의가 그처럼 쉽게 모든 것을 지배하게 된 것일까?" 아니, 소비주의적 욕망만이 아니다. 80년대 이후 중국의 종교인구는 정부가 억제하기 힘든 수준으로 증가했다. 태평천국의 난에서 보듯 중국 역사에서 종교의 번창은 좋은 일이 아니었다. 절대다수가 물질적 이익만을 추구하고 적지 않은 이가 종교에 빠져든다는 사실은 사회통합 기제에 문제가 생겼음을 보여주는 징후다. 현재 중국의 현실을 통탄해마지않는 저자의 토로다. "수천년간 의(義)와 이(利)의 논쟁을 벌여온 전통에도 불구하고, 또한 지난(마오쩌둥 시대) 수십년간 더없이 높은 이상과 신앙을 가진 사회였음에도 불구하고, 왜 중국사회는 불과 십수년만에 이처럼 실리가 일체의 기준이 되는 사회가 되어버렸을까." 허자오톈은 이런 중국인민들의 심리적 공허감이 시작된 역사적 계기를 찾아나선다. 1980년 5월 구독자 수 400만부의 잡지 <중국청년>의 독자투고란에 황샤오쥐라는 여공과 판이라는 대학생 두 사람의 편지가 짜깁기 되어 판샤오란 이름으로 독자투고란에 게재되었다. 독자들의 열띤 반응이 이어지자 인생관 특집이 만들어져 전국에서 모여든 60여통의 편지가 추가 게재되었다. 처음 판샤오토론의 시작이 된 편지 내용은 여공 황샤오쥐의 것이었다. 황샤오쥐는 문혁이 시작되고 같이 살던 외조부가 세상을 뜬 뒤 돈이 없어 학업을 중단하고 공장에 배치되어 일하고 있었다. 편지는 이렇게 시작한다. "저는 금년에 스물셋이니 이제 막 인생의 길을 걷기 시작한 셈입니다. 하지만 저에게 인생은 더 이상 신비롭지도 매력적이지도 않습니다. 저는 벌써 인생의 끝까지 다 걸어버린 듯합니다. 돌아보건대 그간 제가 걸어온 길은 붉은색에서 회색으로, 희망에서 실망과 절망으로 바뀌는 과정이었고, 애초 무사(無私)에서 시작된 사상의 장강(長河)이 결국은 자기에게 귀착되는 과정이었습니다." 얼핏 평범한 개인적 토로로 보이는 판샤오의 글에 중국 청년들은 열광했다. 20대 중반 여공의 글에 왜 이토록 열광한 것일까? 당시 중국 청년들은 어린 나이부터 문화혁명(이하 문혁)에 동원되었던 경험을 공유하고 있었다. 도시 청년 약 천사백만명이 농촌으로 하방되었다가 다시 원래의 자리로 돌아갔다. 자신들을 혁명으로 몰아댄 기성세대들이 어느 순간 문혁을 후회하고, 없었던 사건으로 치부했던데 반해 청춘의 가장 중요한 시기를 문혁과 함께 보낸 청년들은 쉽사리 문혁시대를 내면에서 정리하지 못했다. 혁명적 열정을 내면에서 말끔히 정리하기 어려웠다. 자신들의 청춘이었기 때문이다. 현실은 녹록하지 않았다. 공산주의는 이타주의를 강요했지만 개인들에게는 개인의 삶이 있었다. 회의감이 그들을 엄습했다. 그들은 이타주의를 강요하는 사회주의적 이상주의와 개인적 삶이라는 두 원심력으로 인해 흔들리고 때로 좌절했다. 열정을 가지고 사회주의중국 건설에 참가한 인민들은 쓸데 없는 일에 자신을 바쳤던 것일까? 그렇지는 않다. 철학자 지젝은 마오쩌둥의 시대가 미리 존재했기에 현재의 경제강국 중국이 존재할 수 있었다고 말한다. 공산당정부는 거의 모든 측면에서 봉건적 관습을 뿌리째 뽑아버렸다. 전국 방방곡곡이 효율적인 중앙정부 아래 통합되었다. 중앙정부의 정책이 일사분란하게 지역까지 전달되고 수행되는 행정체계가 비로소 만들어진 것이다. 게다가 이런 과업을 달성하는데 있어서 기층민중들의 힘을 활용했다. 리민치 유타대학교 경제학과 교수는 자신의 책 <중국의 부상과 자본주의 세계경제의 종말>(류현 옮김, 돌베개 펴냄)에서 마오시대 중국을 이렇게 평가하고 있다. "혁명 중국은 인민의 육체적 및 정신적 잠재력을 놀라울 정도로 크게 향상시켰다. 이는 노동 인민의 관점에서뿐만이 아니라 주변부 및 반주변부 국가들의 맥락에서 자본주의에 대한 사회주의의 우수성을 보여준 단적인 사례이다." 개혁개방 이후의 중국의 경제성장에 모두들 놀라지만 개혁 이전에도 중국은 교육, 건강, 경제에 있어서 괄목할만한 업적을 이루어냈다. 이런 성취를 토대로 해서 개혁개방 이후의 비약적인 발전이 가능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국가적 수준의 성취였고 문혁에 내몰렸던 개인들은 많은 고통을 겪었다. 특히 정신적 외상은 오랜 기간 그들을 괴롭혔다. 문혁에 참여했던 이들에게 문혁을 부인하는 사회적 분위기는 이들을 정체성의 혼란으로 몰아갔고 이것은 깊은 트라우마로 남았다. 다시 판샤오편지의 내용이다. "예전에 저는 사람이 사는 것은 타인의 삶이 더 아름다워지도록 만들기 위해서다. 인민을 위해서라면 생명을 바치는 것도 아깝지 않다고 광적으로 믿었지요. 지금 생각해보면 얼마나 가소로운지요!" 이 말에는 이타주의적 열정에 대한 회한의 감정이 진하게 배어있다. 그녀는 강요받은 이타주의에 심리적으로 저항하기 시작한다. "생존이 됐든 창작이 됐든, 저는 누구에게나 모두 주관은 자아를 위하고 객관은 타인을 위한다 (主觀爲自我价值观 客觀爲別人)라는 도리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마치 태양이 빛을 발하는 것은 무엇보다 자기가 생존하기 위한 운동의 필연적 현상이며, 만물을 비추는 것은 그로부터 파생된 일종의 객관적 의미에 지나지 않는 것처럼 말입니다." 오롯이 자신을 위해 살지 못했던 문혁 청년은 이제 자기를 돌보는 것이 결국 타인을 위한다는 말을 되뇌이며 이타(利他)가 아닌 이기(利己)를 시작해 볼 것을 스스로 다짐한다. 이기는 이들에게 쉽게 꺼내기 힘든 생각이었다. 그만큼 문혁의 광풍은 거셌다. 집단을 강조하는 혁명적 이상주의 때문에 문혁 청년들 개개인이 마음 한구석에 묻어두었던 '개체로서의 자아'에 대한 생각이 불현듯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김미란 성공회대 교수는 논문 '판샤오토론에 나타난 문화대혁명의 극복서사'에서 이렇게 판샤오토론의 정신사적 의의를 평가한다. "문제가 된 것은 주체로서의 '개인 私'와 '집체 公'와의 관계였다. 집체의 가치를 우선시하면서 그것을 따를 것인가, 아니면 그 가치 자체를 개인이 의심해보아야 하는 것은 아닌가가 그것이었다. 이러한 의구심은 본격적인 시장화가 진행되기 전인 1980년대에 중국사회의 맑스주의 가치관에 대한 신념의 붕괴를 알리는, 혹은 붕괴를 감지하게 하는 신호였다." 판샤오와 동시대 청년들이 경험한 공허감에 대해 허자오톈의 평가는 이렇다. "문혁의 경험이 초래한 엄청난 혼란스러움은 그녀가 직접 겪은 일련의 사건에서 비롯된 것이었지만 동시에 마오시대가 젊은이들에게 제시한 이상주의 자체에 구조적 결함이 존재하기 때문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마오시대는 사람들로 하여금 거대한 문제에 관심을 갖도록 호소했고 사람들의 숭고감과 사명감을 호명하고자 했을 뿐, 사람들이 실제로 늘 부딪히는 일상과 심신의 문제에 대해서는 그다지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즉 구체적으로 대면하게 되는 일상과 심신의 문제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그렇게 사소하고 그다지 숭고해 보이지 않는 문제들을 어떻게 그 크고 숭고한 문제들과 유기적으로 연결시킬 것인가 하는 중요한 문제에 대해서는 등한히 했던 것이다." 이런 청년들의 고뇌에 부응이라도 하듯 신계몽사조가 등장했다. 80년대 중반 이후 중국의 주류사상이 된 '신계몽'은 문화혁명의 과오를 중국인민들의 봉건적 낙후성에서 찾았다. 이 흐름을 주도한 인사가 철학자 러쩌후이(李澤厚)였다. 그는 '계몽과 구국의 변증법'이라는 글을 발표해 이 흐름을 추동했다. 그는 중국혁명에 대해 '사회주의' 대신 '구국'에 방점을 찍었다. 리쩌후이의 주장에 대한 허자오톈의 설명이다. "중국 공산혁명이 장기간의 지난한 군사투쟁으로 점철되었다는 사실은 근대적 가치들이 혁명 속에 뿌리내리고 성장하는데 퍽이나 불리한 점이었다. 또한 그 군사투쟁이 어쩔수 없이 농민에 의지해야 했고 부득불 낙후한 농촌을 무대 삼아 이루어져야 했기 때문에 혁명은 더욱더 근대와 거리가 멀어졌으며 시간이 흐를수록 농민의 영향을 더 많이 받을 수밖에 없었다. 그로 인해 원래는 근대의 선봉에 선 지식인들이 발동했던 혁명이건만 결국에는 농민들의 봉건성과 소자산계급성에 심각하게 오염되어 변질된 혁명이 되고 말았던 것이다. 마오 쩌둥 시대 다수의 폐단, 특히 문혁은 바로 그와 같은 혁명의 과정에서 근대성이 봉건성과 소자산계급성에 침식된 결과물이라는 것이다." 리쩌후이의 주장은 문혁은 누구의 잘못도 아니고 중국인민이 계몽적 근대를 충분히 경험하고 성취하지 못했기 때문에 문혁이라는 실수를 했다는 함의를 지닌다. 그의 문혁 해설은 모두에게 면죄부를 주었다. 그러므로 이제 새롭게 계몽의 시대로 들어가야 한다. 서구에서 근대 계몽사상이 상품생산을 포함한 자본주의의 확대와 맞물려 있듯 이들은 새로운 시장주의적 개혁에 모두가 과거를 잊고 매진할 것을 독려한다. 80년대 이후 중국 인민들은 자신들의 상처를 보듬어볼 시간도 가지지 못한 채 정신없이 자본주의 경제로 빠져들었다. 그러나 80년대의 신계몽사조가 계몽을 최우선 가치로 둔다고 자임했지만 사람들이 갖고 있던 정체성과 의미의 곤혹을 해결하는 것에는 실패했다. 당시 중국대륙에서 유행한 대부분의 사상적 흐름은 인간을 물질적 이익을 최우선으로 추구하는 소생산자로 보았다. 이런 전제가 무반성적으로 설정되면 경제활동만이 가장 의미있다는 결론이 도출된다. 허무감에 몸부림치던 중국인민들은 이렇게 '돈'을 향해 맹목적으로 달려갔다. 돈만 아는 중국인민은 이렇게 탄생한 것이다. 공산당은 봉건적 전통윤리가 새로운 공산주의적 도덕으로 대체되기를 기대했다. 그러나 이 기획은 실패로 끝났다. 왜일까? 허자오톈에 따르면 전통윤리는 특정 현실을 반영하더라도 당대 널리 퍼져있던 천지자연의 구조, 개인의 양지(信念-본래적으로 선한 마음 필자주), 일상생활의 원리 위에 서 있었다. 반면에 공산당이 지도하는 신중국의 공산주의적 도덕의 토대와 정당성은 오로지 공산당 지도부의 항일전쟁과 반파쇼투쟁이라는 역사적 정당성뿐이었다. 물론 이 두가지를 성공한 것만으로도 중국 공산당의 성취를 폄하하기는 어렵지만 다른 관점에서 본다면 개개인의 내면을 윤리적으로 주조해내는 힘이 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허자오텐의 이어지는 설명이다. "새로운 공산주의 윤리와 정서는 비록 그것을 일상의 일과 삶, 개인 심신의 상태 속에 실천하도록 요구되기는 했지만, 그것을 지탱하는 실질적 기반은 그것이 의지했던 이데올로기의 올바름과 국가지도자 및 공산당 영도의 올바름에 있었다." 그렇지만 국가가 문혁의 과오를 말하면서 문혁참여자들은 일대혼란에 빠지게 된다. 공산주의가 도덕적 근거로 제시되었던 이유가 공산당지도의 무오류성 덕분이었는데 그 신화가 깨진 것이다. 허자오톈이 명시적으로 말하진 않지만 필자의 생각으로는 문혁 이후 중국인민들이 받은 충격은 철학자 지젝이 말하는 개인들이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하는 거대한 무의식적 체계 즉 ‘대타자’의 붕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들은 집단 대신 개인을 새롭게 발견했지만 집단적 이상주의를 완전히 떨쳐낼 수는 없었다. 갑자기 엄습한 공허감의 이면에서도 열정은 잔불처럼 남아있었다. 그래서 청년들은 더욱 괴로워했다. 이런 청년들의 이상주의를 문혁과 함께 도매금으로 정리해버린 것을 신계몽사조의 결정적 실수라고 허자오톈은 비판한다. 저자의 말이다. "어떻게 해야 그 이상주의가 계속해서 역사와 국가, 민족, 사회를 위한 책임을 방기하지 않고 사람들이 그로부터 의미감과 정신적 동력을 얻게할 수 있을지, 또한 거대한 역사의 정치적 과제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을 어떻게 일상적 심신의 충실감을 얻을 수 있는 구체적 형식과 결합시킬 것인지 고민했어야 한다." 문혁은 완벽히 실패했고 문혁을 극복하려던 신계몽사조도 실패했다. 개인을 사상시킨 이상주의도 개인만을 부각하는 현실주의도 지속가능하지 않다. 결국 거대한 이념도 일상의 수준에서 준행 가능한 형식과 내용을 담지해야 한다. 이 지점에서 문혁도 신계몽도 모두 걸려넘어진 것이다. 사회주의 이상 대신 부와 돈을 이야기하면서 중국 인민들은 더 행복해졌을까? 다시 저자의 말이다. "개인주의에 빠진 개인들은 참으로 풍부한 개인주의 스펙트럼 속에서 자아를 충실하게 하고 지탱하는데 도움이 될만한 자원을 얻기는커녕 오히려 개인주의의 추동으로 일상의 윤리나 책임감으로부터 일탈하기 일수였다." 중국사회는 극에서 다른 극으로 이동해버린 것이다. 문혁청년들에게 남아 있던 이상주의를 보듬지 못하고 폐기처분한 결과 오늘의 중국은 개인과 소비만 남은 사회가 되어버렸다. 혁명의 중심에서 발견한 개인이었지만 이 개인은 이내 시장주의의 급물살에 휩쓸려갔다. 쓸려 간 개인은 온전한 개인이 되기 어려웠다. 사회주의가 실현된 혁명적 사회에서조차 사회통합은 어려웠다. 공동체의 통합은 매우 어려운 과제다. 그래서 루소는 국가를 통합시킬 수 있는 '시민종교'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사상이나 철학을 넘어서는 종교로서만 사회가 제대로 통합될 수 있다는 판단에서였다. 중국 문화혁명은 미증유의 시도였다. 이 시도는 허무감에 괴로워하는 개인들을 만들어냈다. 이런 허무감은 시장경제와 함께 진행된 인간의 원자화로 더욱 악화된다. 공허하고 외로운 대중이 늘어나면 사회는 큰 혼란에 휩싸이게 된다. 고독한 군중은 결국 전체주의의 토양이 된다. 한나 아렌트는 자신의 책 <전체주의의 기원>에서 이렇게 적고 있다. "고독은 전체주의 정부의 본질인 테러의 공통된 토대이며, 전체주의의 집행인과 희생자를 준비하는 이데올로기나 논리적 타당성의 공통된 토대이다." 지독하게 공허했던 중국인민들은 공허감을 경제성장에 따른 물질적 이익으로 해소하려 했다. 그러나 전세계적 블록화는 중국의 성장률을 갈수록 낮출 것이다. 경제성장의 시대가 가버려도 중국사회의 통합이 지금처럼 유지될 수 있을까? 중국은 이미 두 번의 실패를 겪었다. 또다시 사회통합에 실패한다면 중국에게도 이웃인 우리에게도 어두운 미래가 찾아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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