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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을 마무리하는 과정, 비극적 사건으로 만들 필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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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을 마무리하는 과정, 비극적 사건으로 만들 필요 없다 [좋은나라이슈페이퍼] 좋은 죽음, 존엄한 죽음

조력존엄사법으로 수용할 수 없는 고통을 겪는 말기환자가 본인이 원하면 의료진의 도움을 받아 스스로 삶을 마감하는 것이 가능해진다. 대다수 국민은 조력존엄사 법안을 지지한다. 소수의 반대도 있다. 주된 반대이유는 생명경시다. 그러나 ‘생명은 절대 인위적으로 중단해서는 안된다’는 신념을 고수하기 위해 해결불가능한 지독한 고통을 감내하라 강요하는 것이 생명경시다. 조력존엄사를 금지하는 것이 생명경시에 해당한다. 인간에게 존엄이란 단지 생명이 유지되는 상태가 아니다. 인간의 3대 근본욕구(관계성, 유능성, 자율성)가 모두 박탈된 상황에서는 아무리 생체징후가 안정적이어도 인간의 존엄을 유지할 수 없다. 우리가 바라는 죽음과 현실의 죽음은 너무나 다르다. 대다수가 제명을 채우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야 했던 시절에 형성된 법, 제도, 문화 때문이다. 현실의 법, 제도, 문화에서 죽음은 피할 수 있으면 피해야 하는 "악"으로 여기고 있다. 죽음은 생명이면 누구나 수용해야 하는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인간을 다른 동물과 구분하는 특별한 동물이라고 한다면, 죽음에 대한 자기결정성을 행사할 수 있는 능력에서도 찾을 수 있다. 때가 되면 떠날 준비를 하고, 스스로 그 순간을 결정할 수 있도록 하는 법, 제도, 문화가 필요하다. 죽음은 삶을 마무리하는 과정이다. 이 과정을 굳이 비극적인 사건으로 만들어야 할 이유가 없다. (필자)

조력존엄사 찬성 여론

조력존엄사법으로 수용할 수 없는 고통을 겪는 말기환자가 본인이 원하면 의료진의 도움을 받아 스스로 삶을 마감하는 것이 가능해진다. 대다수 국민은 조력존엄사 법안을 지지한다. 법안은 6월 15일 국회에서 발의됐다. 2018년 시행된 연명의료결정법은 임종과정에 있는 환자가 사전에 밝히 뜻에 따라 무의미한 연명의료를 중단할 수 있도록 한다. 조력존엄사 법안은 연명의료 없이도 생존할 수 있는 말기환자가 능동적으로 본인의 생명을 중단할 수 있도록 한다. 도움을 받아 스스로 실행하는 죽음이기에 조력자살이라고도 한다. 고통없는 죽음이기에 안락사라고도 한다. 인간의 존엄을 유지하며 맞이하는 죽음이기에 존엄사이다. 조력존엄사 혹은 조력자살에 대한 여론조사는 법안 발의 전후 두차례 이뤄졌다. 두 조사 모두 질문 문항에 ‘조력자살’ 용어를 이용했다. 법안 발의 후에는 한국리서치가 2022년 7월1일부터 4일 사이 전국 18세이상 남녀 1000명을 대상으로 조력존엄사에 대한 여론을 확인했다. 조력존엄사에 대한 찬성의견이 82%였다. 60대 이상의 찬성비율은 86%로 가장 높았다. 60대미만은 74 ~ 81%가 찬성했다. 조사에 사용한 질문은 다음과 같다.
지난 6월 16일 더불어민주당 안규백 의원은 조력 존엄사에 대한 법안을 발의했습니다. 품위 있는 죽음에 대한 관삼이 증대되고 있어, 회복 가능성이 없고 수용하기 어려운 고통을 겪는 말기 환자의 경우 담당의사의 조력을 받아 자신이 스스로 삶을 종결할 수 있도록 하는 의사조력자살에 해당하는 조력 존엄사를 도입함으로써 삶에 대한 자기 결정권을 증진(보장)하자는 취지입니다. 이와 같은 조력 존엄사 입법화에 대해 귀하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법안 발의 전 조사에서도 대다수가 조력자살에 찬성했다.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윤영호 교수 연구팀은 2021년 3월과 4월 전국 19세 이상 남녀 1000명을 대상으로 조력자살 법제화에 대한 태도에 대해 조사했다. 76.4%가 법제화에 찬성했다. 질문 문항은 다음과 같다.
2018년 5월, 104세의 호주 생태학자 데이비드 구달(David Goodall) 박사가 스위스에서 의사 조력 자살로 사망했습니다. 이미 두 명의 한국인이 같은 방식으로 사망하도록 허용됐습니다. 107명의 한국인이 의사조력자살단체 회원입니다. 네덜란드, 룩셈부르크, 벨기에, 스위스, 캐나다, 호주 및 미국의 8개 주는 안락사 또는 의사 조력 자살을 허용하고 있습니다. 한국에서도 의사 조력 자살 또는 안락사에 대한 법제화 주장이 있습니다. 의사 조력 자살 혹은 안락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대다수의 사람들이 조력존엄사에 찬성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한국리서치의 조사에서는 자기결정권과 품위있는 죽음(웰다잉)에 대한 권리를 찬성이유로 꼽았다. ‘자기 결정권 보장’이 25%로 가장 높았다. ‘품위있는 죽음(웰다잉)에 대한 권리’(23%)와 ‘가족 고통과 부담(20%) 순이었다. 연령대별로 찬성하는 이유가 달랐다. 50대 이상은 품위있는 죽음에 대한 권리를 가장 많이 꼽았다(50대, 27%; 60대 29%). 윤영호 교수 연구팀의 조사에서는 “남은 삶의 의미가 없어서”(30.8%), ”좋은 죽음에 대한 권리“(26%), ”고통의 완화“(20.6%) 순이었다. 비록 대다수가 조력사에 찬성하지만 소수의 반대도 있다. 한국리서치의 조사에서는 18%가 반대했다. 반대이유는 생명존중(34%), 악용과 남용의 위험(27%), 자기결정권 침해(15%) 순이었다. 윤영호 교수 연구팀 등의 조사에서는 생명존중(44.3%), 자기결정권의 위반(15.6%), 남용 및 오용 위험(13.1%) 순이었다. 의사협회는 조력존엄사법안에 대한 반대의견이다. 이유는 조력존엄사에 대한 사회적 논의 및 합의 부족, 조력존엄사의 최종 이행을 결정하는 의사에 대한 보호방안 미흡 등이다. 자세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조력존엄사에 대한 사회적 논의 및 합의 부족 ▲생명경시 사회 풍조 만연 우려 ▲자살예방법과 상충 ▲호스피스완화의료를 확대할 수 있는 시스템 우선 마련 등 ▲조력존엄사심사위원회 구성 문제 및 객관적 평가 근거 미비 ▲조력존엄사의 최종 이행의 결정 주체인 의사의 보호방안 미흡 ▲단일법에 상이한 특성의 세 가지 제도를 포함하여 혼선 초래 ▲용어 정의 명확화 및 구체화 작업 필요

조력존엄사는 생명경시인가?

조력존엄사에 대한 사회적 논의 및 합의 부족은 온전한 사실이 아니다. 국민의 70% ~ 80%가 찬성한다. 목소리를 높이는 소수가 있다 하여 합의가 부족하다고 할 수 없다. 의협은 두 번째로 생명경시 풍조의 확산을 우려했다. 의협신문이 보도한 문장은 다음과 같다.
의협은 "기존 연명의료결정법에서 임종기에 국한한 연명의료중단에 대한 결정은 자기결정권과 환자에게 최선의 이익이 될 수 있는 방향에서 고민하도록 하고, 동시에 어떤 경우에도 임종에 이르는 과정을 앞당기도록 시간을 단축하는 행위는 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이어 "연명의료중단은 남은 삶에 인위적인 생명의 단축은 하지 않지만 의미 있는 삶을 사는데 기여하는 행위가 아니라면 무의미한 의료 활동을 중단하거나 유보하는 내용"이라면서 "호스피스완화의료는 이런 시기에 삶에 의미를 불어넣어주는 활동이자 의료"라고 짚었다.
그러나 "조력존엄사는 생명을 앞당기는 행위로 연명의료결정 중단이나 호스피스완화의료와는 성격이 매우 다르고, 이 또한 세계보건기구에서도 엄격히 구분하고 있는 만큼 조력존엄사를 허용하는 것은 우리 사회에 생명경시 풍조를 확산시키고 만연시킬 우려가 크다"고 지적했다.
조력존엄사 시행이 과연 생명경시에 해당하는지 판단하기 위해서는 우선 두가지 상황을 비교해 볼 필요가 있다.
상황1: 수개월 내 죽을 것으로 예상된다. 죽기 전까지 수용할 수 없는 고통을 겪게 된다. 언제 어디서 죽을 지는 모른다.
상황2: 수개월 내 죽을 것으로 예상된다. 죽기 전까지 수용할 수 없는 고통을 겪게 된다. 나 스스로 언제 어디서 죽을지 결정할 수 있다.
의사협회에 따르면 상황1은 생명경시가 아니고, 상황2는 생명경시에 해당한다. 이에 대한 판단을 위해서는 조금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먼저 용어부터 정리하자. 연명의료결정법에 따르면 말기환자는 “적극적인 치료에도 불구하고 근원적인 회복의 가능성이 없고 점차 증상이 악화되어 보건복지부령으로 정하는 절차와 기준에 따라 담당의사와 해당 분야의 전문의 1명으로부터 수개월 이내에 사망할 것으로 예상되는 진단을 받은 환자”다. 이러한 말기환자가 수용하기 어려운 고통을 겪을 때 조력존엄사를 허용한다. 고통은 누구나 겪기에 고통이 무엇인지 모를 수 없다. 그러나 고통은 겪어본 만큼만 안다. 사람마다 고통과의 거리가 다르기 때문이다. 나와 사회적 거리가 먼 사람의 고통인지, 나의 고통이어도 현재와 시간적으로 멀리 떨어진 미래의 고통인지에 따라 크게 다르다. 구체적인 표현을 이용해 고통과의 거리를 조금 줄여보자. “칼로 찔러 쑤시듯이 아프다”, “짓이기듯이 아프다”, “불로 지지듯이 아프다”, “지독하게 아프다”, “기진맥진할 정도로 아프다.” 이제 다시 상황1을 조금 더 구체적으로 서술해보자.
수개월 내 죽을 것으로 예상된다. 죽기 전까지 지독한 고통을 겪게 된다. 통증이 올 것 같으면 돌봄인에게 몰핀 주사를 부탁한다. 주사를 맞으면 잠에 든다. 잠이 깨면 다시 고통이 엄습한다. 다시 몰핀 투여를 부탁한다. 이 상황은 수개월내 끝나겠지만 그게 언제인지는 모른다.
상황2를 그려보자.
수개월 내 죽을 것으로 예상된다. 죽기 전까지 지독한 고통을 겪게 된다. 조력존엄사를 신청한다. 가족 등 소중한 사람들과 작별인사를 한다. 처방받은 진정제와 이완제를 복용하고 잠든다. 다시 깨어나지 않는다.
'최빈도 죽음' 이란 말이 있다. 우리가 현실에서 맞이할 가능성이 큰 죽음이다. ’최빈도 죽음’에 대한 서술을 그대로 옮기면 다음과 같다.
60대 후반부터 신체적, 정신적 기능이 감소되면서, 고혈압, 당뇨, 뇌졸중, 폐렴, 낙상으로 인한 골절로 병원 신세를 지기 시작한다. 자녀들은 육아나 생계 문제로 간병이 어렵다. 결국 요양병원이나 요양원에 입원한다. 열악한 임금·노동조건 아래서 적은 간병인력으로 운영되는 시설에서 한사람 한사람 세심한 인격적 돌봄을 받을 가능성은 낮다. 그렇다고 일당 10만~15만원인 사설 간병인을 몇년간 둘 수도 없다. 누워 있는 모든 노인 환자들의 꿈은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지만 이 꿈을 이루는 이는 거의 없다. 간혹 성공해도 곧 다시 요양원으로 돌아와야 한다. 폐렴, 요로감염, 뇌경색이 반복적으로 발생하고 코에는 인공급식관이 끼워진다. 몸에는 독한 항생제 내성균이 자라고 격리 차원에서 면회와 접촉이 제한된다. 몇차례 응급상황이 벌어지고, 처치실이나 중환자실에서 외롭게 죽음을 맞는다.
생명경시는 생명을 중단하는 것에만 해당하지 않는다. 견딜수 없는 고통을 강요하는 것도 생명경시다. ‘생명은 인위적으로 중단해서는 안된다’는 신념을 고수하기 위해 다른 사람에게 해결불가능한 지독한 고통을 감내하라 강요하는 것이 생명경시다.

반대논리의 오류

조력존엄사 반대논리 중 하나가 조력존엄사를 허용할 경우 노화, 장애, 질병에 대한 차별을 강화하여 강요된 죽음이 확산될 가능성이다. 아래 인용문에 그런 우려가 잘 나타나 있다.
하나 더 우려되는 점은 현재와 같은 의료체계와 돌봄의 구조에서는 조력존엄사 신청에 '내몰리는' 사람이 많이 생길 수 있다는 것이다. 의학적으로 조절할 수 없는 통증, 질병의 고통을 종료시키기 위해 시행되는 것이 원래 취지이나 현실에서 우리는 다양한 상황에서 인간으로서는 견디기 힘든 고통을 느낀다. 예를 들면 말기 암에 걸렸으나 치료비가 없을 때, 일상생활이 힘들지만 돌봐주는 사람이 없을 때, 자신의 질병으로 인해 가족들이 경제적 어려움을 겪고 가족내 갈등이 생길 때, 요양원에 보내져 하찮은 존재로 취급을 당할 때 등이다.
이 논리는 타당하지 않다. 조력존엄사 대상자 심의를 통과할 수 없는 사례를 동원해 법안의 부작용을 부각하기 때문이다. 조력존엄사법안에 따르면 근원적인 회복가능성이 없으면서 수용하기 어려운 고통을 겪는 경우에 조력존엄사를 신청할 수 있다. 단지 치료비가 없어 심리적·사회적 고통을 겪는다는 이유로 조력존엄사를 신청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견딜수 없는 신체적 고통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사회적 압력으로 고통을 호소하여 조력존엄사를 신청해 승인받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 극심한 신체적 고통을 흉내내어 속이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또 다른 반대논리는 선행조건 해결이다. 한국호스피스·완화의료학회는 “존엄한 죽음을 위해서는 존엄한 생애 말기 돌봄이 우선”이라며 “돌봄 유지에 필수적인 호스피스 시설과 인력 확충, 치매 등 만성질환 말기환자의 호스피스 완화의료 확대, 임종실 설치 의무화, 촘촘한 사회복지제도에 대한 실질적 대안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조력존엄사가 생애말기 돌봄을 없애는 게 아닐뿐더러 생애말기 돌봄이 조력존엄사의 대안이 될수도 없다. 아무리 훌륭한 호스피스 시설과 인력이 있고 촘촘한 사회복지제도가 갖춰져 있다 한들, 어느 누구도 말기환자의 수용하기 어려운 고통은 해결해줄수 없다. 고통을 진통제와 진정제로 줄일 수 있다고 그 고통이 견딜만한 수준으로 낮춰지는 것은 아니다. 머지않아 죽을 것으로 예상되고 매일 끔찍한 통증에 시달려야 하는 사람에게 현대 의료는 아직 "존엄한 돌봄"을 제공할 역량이 없다. 진통제와 진정제로 짓눌린 마음으로는 죽음의 길목에서 삶을 되돌아보거나 사랑했던 사람들과 작별인사도 나눌 수 없다.
유일하게 죽는 게 더 낫다고 할 수 있는 상황은 이것이다. 어떤 사람이 치료 불가능한 질병에 걸려서 그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치료의 가능성이 전혀 없으며, 질병으로 인하여 끔찍한 고통에 시달리는 경우다. 그런 사람에게 삶이란 무한한 고통의 연장이며, 비록 진통제 등으로 그 고통을 경감할 수 있다고 해도 치료 가능성이 없다는 것은 그의 상황이 호전될 가능성을 차단한다. 그때 끔찍한 고통을 해결하는 방법으로 주어지는 것이 삶보다 나은 죽음, 바로 안락사다.

좋은 죽음이 존엄한 죽음

존엄사(death with dignity)는 말 그대로 사람이 존엄하게 죽는다는 의미다. 비슷하지만 구분이 필요한 개념이 안락사(euthanasia)다. 좋은 죽음이란 뜻이다. 의료윤리학자 김준혁은 존엄사와 안락사는 개념적으로 구분이 필요하다고 지적한다. 존엄사는 능동적인 조치(예: 연명의료)를 중단하여 맞이하는 죽음이고, 안락사는 능동적인 조치(예: 치사량의 약물 복용)를 하여 맞는 죽음으로 구분해야 한다고 한다.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을 경우 전자는 사망에 이르지만, 후자는 사망에 이르지 않는다. 김준혁은 자연적으로 사망에 이르지 않는 상태에서 본인이 능동적으로 죽음에 이르도록 하므로 존엄한 죽음이라 할 수 없다고 지적한다. 자연적인 생명을 개인이 단축하기 때문이다. 김준혁은 "치료될 수 없는 환자의 고통을 없애는 방법의 하나로 윤리적 의미에서 조력자살이나 안락사를 검토하는 것이 꼭 필요하다고 생각한다"면서도 조력존엄사법안은 "자살과 안락사의 구분을 회피하고 사람들의 노화에 대한 부정적 인식에 기대고 있다"고 주장한다. 안락사를 "노화, 장애, 질병에 대항한 안전한 자살법으로 인식"하는 현실을 더욱 강화하는 문제가 있다고 지적한다. 용어법부터 짚자. 의료윤리학자가 존엄사와 안락사의 개념을 구분하여 사용한다고 일반 사회가 학계의 특수한 용어법을 그대로 따라야 하는 것은 아니다. 개념은 실체개념과 명목개념으로 구분가능하다. 실체개념은 개념이 실체를 온전하게 반영하는 개념이다. 명목개념은 용어를 ‘이렇게 사용하자’며 소통 당사자들끼리 명목적으로 약속한 개념이다. 실체개념은 현실적으로 구성 불가능하므로 거의 모든 개념은 명목개념이다. 학계에서 특수하게 사용하는 용어법 역시 실체개념이 아니라 명목개념이다. 우리가 사용하는 개념은 거의 대부분 명목개념이므로 학계의 특수한 용어법과 일반사회의 용어법이 불일치하는 사례는 흔하다. 예를 들어, 심리학계는 감정(affect), 정서(emotion), 기분(mood)를 개념적으로 구분한다. 정서는 순간적이며 특정 대상이 있는 감정이고, 기분은 지속시간이 길고 특정 대상이 없는 감정이다. 감정은 정서와 기분을 포괄하는 상위개념이다. 일반 사회에서 감정, 정서, 기분을 이런 식으로 구분하여 사용하지 않는다. 그렇게 사용해야 한다고 요구하지도 않는다. 존엄사와 안락사의 구분 역시 마찬가지다. 의료윤리학자가 설정한 명목개념을 일반사회에서 그대로 사용하라 요구해서는 안된다. 존엄사의 개념을 오직 ‘연명의료를 중단하여 맞이하는 죽음’으로만 한정하기에는 ‘존엄’의 일반적인 용법과 괴리가 너무 크다. 존엄(dignity)을 말그대로 풀이하면 ‘높고 엄숙함’이다. 존엄과 연관되는 단어는 명예, 존중, 지위 등이다. 반대편에는 불명예, 저열함, 가치없음 등이 있다. 존엄은 인간이 충족해야 하는 욕구 중 최상위의 욕구에 해당한다. 단지 생명이 유지되는 것만으로는 존엄을 충족할 수 없다. 인간의 존엄성이 유지되기 위해서는 인간의 근본욕구가 충족돼야 한다. 근본욕구가 무엇이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학계의 합의가 충분하지 않지만, 널리 통용되는 이론은 자기결정성이론(Self Determination Theory)이다. 인간이면 누구나 충족해야 하는 근본적인 3대 욕구가 관계성(relatedness), 유능성(competence), 자기결정성(autonomy)에 대한 욕구다. 관계성은 사회관계를 형성하고 유지하는 역량이다. 유능성은 문제해결 역량이다. 자기결정성은 스스로 환경을 제어할 수 있는 역량이다. 이론가에 따라 관계성을 더 근본적인 욕구로 보기도 하고, 자기결정성을 더 근본적인 욕구로 보기도 한다. 근본욕구가 충족되는 죽음은 2018년 호주의 생태학자 데이비드 구달을 통해 살펴볼 수 있다. 구달은 104세의 나이에 죽음의 방식을 스스로 선택했다. 당시 구글 뉴스로 검색된 관련 뉴스가 30건 정도 된다. 대부분 그의 현명하고도 용감한 결정에 공감하는 내용이다.
- 조력자살 스위스행 호주 최고령 구달 박사 베토벤교향곡 들으며 영면 (서울신문)
- 안락사 택한 104세 호주 과학자, 베토벤 9번 들으며 잠들다.(중앙일보)
- 품위있게 죽고 싶다던 호주 104세 과학자 오늘 낮 편안히 영면 (서울신문)
30여건의 기사 중 "논란"의 틀로 전한 뉴스는 2건이었다.
- 104살 생태학자의 안락사…'죽음' 결정 논란 (KBS뉴스)
- 안락사 주장 104세 濠 과학자 '셀프 안락사' 논란 (국민일보)
이중 구달의 선택을 잘 서술한 기사 제목은 다음과 같다.
- 이 104세 과학자의 '자발적 죽음'에는 슬픔도, 고통도 없었다 (허핑턴포스트)
존엄의 일반적인 용법과 심리학의 욕구이론에 따르면 구달의 죽음은 충분히 존엄한 죽음이라고 할 수 있다. 만일, 구달이 의료윤리학자의 특수용어인 ‘존엄사’에 해당하는 죽음을 선택했다면, 최빈도죽음을 겪었을 가능성이 크다. 병원에 입원하고 몇차례 응급상황을 겪은 다음 처치실이나 중환자실에서 외롭게 맞는 죽음 말이다. 사람들이 원하는 좋은 죽음은 있다. 조력사를 선택한 어느 영국 노인에 대한 기사를 함께 읽어보자.
그의 마지막 길에는 음악과 샴페인, 사람이 동행했다. 즐겨듣던 음악을 배경으로 샴페인 잔을 기울이고 아끼는 사람과 마지막 포옹을 나눈 노인은 침대에 누워 편안히 눈을 감았다. 바르비투르산염 진정제 투여 후 눈물을 글썽이는 친구와 의료진에게 ‘고맙다’는 말을 남기고 영면에 들었다.
눈을 감고 스스로 위의 상황과 아래 상황에 본인을 넣어보라.
더 이상 긍정적인 사회관계를 형성하고 유지할수 없다. 유능성을 회복하리란 가능성은 조금도 없다. 24시간 모니터링 당하며 자율적으로 할수 있는게 아무것도 없다. 이 상황이 바뀔 가능성도 없다. 잠만 깨면 견딜 수 없는 고통이 엄습한다. 머지않아 이 고통이 끝날 것 같은데 그게 언제인지는 모른다.
어느 죽음이 존엄한 죽음일까!

인간에게 존엄이란

인간에게 존엄이란 단지 생명이 유지되는 상태가 아니다. 인간의 3대 근본욕구(관계성, 유능성, 자율성)가 모두 박탈된 상황에서는 아무리 생체징후가 안정적이어도 인간의 존엄을 유지할 수 없다. 우리가 바라는 죽음과 현실의 죽음이 다른 이유는 대다수가 제명을 채우지 못하고 시절에 형성된 법, 제도, 문화 때문이다. 현실의 법, 제도, 문화에서 죽음은 피할 수 있으면 피해야 하는 "악"으로 여기고 있다. 죽음은 생명이면 누구나 수용해야 하는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인간을 다른 동물과 구분하는 특별한 동물이라고 한다면, 죽음에 대한 자기결정성을 행사할 수 있는 능력에서도 찾을 수 있다. 때가 되면 떠날 준비를 하고, 스스로 그 순간을 결정할 수 있도록 하는 법, 제도, 문화가 필요하다. 죽음은 삶을 마무리하는 과정이다. 이 과정을 굳이 비극적인 사건으로 만들 이유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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