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적연금 전체를 놓고 개혁논의를 해야 하는 구체적 이유
우리나라 공적연금은 개별연금의 성격과 기능의 문제들 뿐 아니라, 공적연금 상호간의 부조화와 역기능 문제도 안고 있다. 이에 공적연금 체계 전반에 대한 점검과 재정립이 절실히 필요한 실정이다. 기본적으로, 공적연금은 노후빈곤 예방과 노후소득보장에 부응하지 못하는 근본적인 문제를 안고 있다. 이와 함께 민·관 연금 차별 논란, 소득 분배의 역기능과 불공정, 세대 간 형평성 평가에 대한 이견과 갈등, 기초연금이 부조제도인지 보편적 노인수당인지에 대한 성격 규명 논란, 국민연금과 연계된 기초연금 감액제도의 부작용 등 수많은 난제들이 복합적으로 얽혀있다. 그러다보니 문제의 진단과 처방이 전문가에 따라 천차만별이다.공적연금개혁 이슈는 대통령 선거 때마다 단골 메뉴였다. 하지만 여태 공적연금제도가 사적연금제도와 제도의 목적과 설계원리 측면에서 어떻게 다른지 제대로 이해하는 후보를 보지 못했다. 그러다보니, 공적연금의 재정 불안정 문제를 제기하면서도 아무런 해명도 없이 기초연금액 인상을 공약한다. 그리고 대통령에 당선된 후 이런 저런 이유를 들어 공약을 파기하기도 한다. 다른 한 편으로는, 심각한 노후빈곤과 노인자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지, 이 문제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는 공적연금제도를 어떻게 개선할지에 대해 진지하게 문제제기를 하는 후보를 찾아보기 힘들다. 제대로 된 공적연금제도에 대한 이해가 사회전체에 부족하다.또한 공적연금개혁 이슈와 관련하여 민·관 공적연금의 차별 논란에 대한 원인규명과 해결책을 찾아야 한다. 우리 정부는 공직자들을 위한 특수직역 연금제도를 조기에 도입하였다. 제도 도입 이후에는 급여 수준을 점진적으로 높여 공무원들의 노후생활 보장을 위해 노력하였다. 보험료는 제한된 범위 내에서 서서히 인상하였다. 이에 대해 국민들은 귀족연금을 위해 서민연금 가입자들이 낸 세금을 퍼붓는다고 비판하고 있다. 그 비판들은 상당한 일리가 있다. 하지만, 공무원도 국민의 일원이기에 국가는 그들에 대한 사회보장 책임을 소홀이 해서는 안 되며, 국가는 공무원들을 고용한 고용주로서의 책임까지 져야하는 이중 책임이 있다. 그런 의미에서 공직자들에 대한 국가의 우호적 조치를 무조건 비난할 수만은 없다.하지만 문제는, 민간 국민들에게는 국가가 그렇게 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다. 대다수의 국민들을 위한 노후소득보장제도인 국민연금제도 도입은 계속 지연됐다. 그러면서도 제도도입 당시 노인도 국민연금 수혜 대상에서 배제됐다. 지금도 65세 이상 노인들 중 무연금자가 50%에 육박하는 이유는 그 때문이다. 나아가, 정부는 제도 도입 이후 연금에 대한 인식이 채 자리 잡기도 전에 개혁이라는 이름으로 연금급여 수준을 43%나 삭감하였다. 어떻게 한 나라에서 민·관에 대한 연금정책을 이렇게 정 반대로 펼쳐올 수 있는지 의문이다.이렇게 불공정하고 불합리한 정책이 시정되지 않고 장기간 지속될 수 있었던 이유를 신제도주의 이론으로 설명해 볼 수 있을 것 같다. 어떤 계기로 인해 한 번 설정된 정책은 그 정책으로부터 수혜를 받는 수많은 이해관계자들의 반발 때문에 획기적으로 바꾸기가 어렵다고 한다. 그렇다면 많은 문제가 복합된 우리나라 공적연금제도의 개혁을 가로막는 그 이해관계자들은 누구인가? 국민연금제도를 차라리 폐지해 달라고 호소하는 국민연금가입자들인가? 아니면 이미 좋은 공적연금제도의 수혜를 입고도 빈곤한 국민연금제도의 실상에 눈감고 있는 고위 정치인, 관료, 교수들인가? 국민연금을 한 푼도 받지 못하거나, 50만 원 안팎의 연금을 받을 처지인데도 '자식세대로부터 연금 도적질하는 자들'로 매도되는 국민연금 가입자들인가? 아니면 국민연금이 부실해져야 자신들의 금융사업 영역이 더 확장된다고 여기거나, 연금기금이 거대해야 기금 관할 권한이 커진다고 여기는 보이지 않는 손의 주인공들인가? 공적연금개혁을 좌지우지하는 우리 사회에 깊이 내재된 힘 있는 이해관계자가 누구인지 밝히고 그들의 의도를 막아내는 것이 제대로 된 개혁의 출발점이고 성공의 실마리가 될 것이다.기득권 카르텔의 집요한 공격을 막아내고 노후빈곤, 노인자살 문제 해결해야
1990년대 급격한 세계화와 외환위기 극복과정에서 우리 사회 전체에 자유시장주의 신봉자들의 세력이 팽배해졌다. 그들은 이해의 기득권 카르텔을 형성하여 공공의 영역인 사회보장의 확대를 어떻게든 막으려 한다. 때로는 기금고갈과 재정안정화의 이름으로, 때로는 과장된 세대 갈등을 조장하며 노후빈곤 해소와 적정 소득보장 지지 세력을 집요하게 공격한다. 그들은 사회보장정책의 확대를 자신들의 먹거리 터전인 시장 영역 침해로 간주한다. 따라서 자신들이 가진 기득의 역량들을 총 동원하여 공공성 확대 개혁논의를 무산시킨다. 최근 기사에, 기획재정부가 국민의 눈을 속이고 강남의 노른자 땅을 민간에 팔아넘기려 했다는 보도가 있었다. 이는 힘 있는 기득권 소수들의 영역은 넓혀주면서 국민 전체의 이익을 위한 공공의 영역을 축소하려는 조치라는 비판이 있다. 공적연금개혁에서도 이런 행태가 벌어지지는 않을지 우려된다.그렇다면 공공의 이익에 역행하는 힘 있는 이해관계자들의 행태가 한없이 계속될 것인가? 역설적이게도 신제도주의 이론을 뒤집는 것은 또 다른 신제도주의 이론이다. 그 대표적인 이론 증 하나가 '내부모순 이론(internal contradiction theory)'이다. 어떤 정책이 문제가 많음에도 제대로 된 개혁이 이뤄지지 못한다면, 그 정책은 내부 모순이 깊어져 붕괴의 잠재력이 쌓이게 되고 급기야는 정책 존립의 정당성을 잃게 된다고 한다. 지속적인 기득권 지키기는 장기적으로 보아 제 무덤 파기(self-grave digging)라는 것이다. 이 때, 유력한 대안 정책이 제시되고 그 정책이 시민들의 폭넓은 지지를 받는다면, 이를 이용하려는 정치적 쇄신가가 등장해 그 정책을 근본적, 구조적으로 개혁하게 된다.어려운 길 국민들과 함께 가는 여정이어야
그렇다면 어떻게 국민들의 폭넓은 지지를 받는 바람직한 개혁 대안을 도출할 수 있을까? 지금 공적연금 개혁을 앞둔 우리사회에는 여성의 사회진출 확대, 비정규직과 불안정 노동자의 증가, 세계화의 확산과 인구구조의 급격한 변화 등 위험요소들이 복잡하게 혼재되어 있다. 과거와 같은 관 주도의 비민주적 개혁안 마련 방식은 추진할 수 없다. 또한 급격히 변화하는 4차 산업사회이며 다원화된 사회에서는 노·사·정 대화만으로도 대표성을 인정받기 어렵다. 더욱이 국민을 소외시키고 정당 간 정치적 타협만으로 쉽게 공적연금개혁안을 도출하려 한다면 이는 제대로 된 개혁이 되지 못할 뿐 아니라, 밀실야합의 의혹을 받아 정치적 위험을 초래할 수 있다. 따라서 공적연금개혁은, 어렵더라도 국민들과 함께 걸어가는 인내의 여정이어야 한다.마지막으로, 제도개혁을 발목 잡는 '보이지 않는 손'에 대해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공적연금 재정재계산 시기가 돌아오면 세대갈등을 조장하는 조어들이 어김없이 등장한다. '기금고갈로 인한 연금제도 파산', '후세 세대에 대한 도적질', '보험료 폭탄 돌리기' 등의 살벌한 용어들이다. 이런 기사들로 인해 공적연금제도에 대한 신뢰는 뿌리 채 흔들리고 있다. 이런 보도 행태는 공적연금이 망가지기를 바라는 세력들의 편에 서는 행위나 다를 바가 없다. 그 폐해가 어떠한지 살펴보자.국민연금이 도입된 지 30년 이상이 지난 지금도 수많은 국민들은 "기금이 고갈된다는데 나중에 연금을 받을 수 없는 것 아니냐?"는 질문을 하고 있다. 그리고 그들은 실제로 국민연금 가입을 늦추고, 소득을 축소 신고하고, 가입 의무는 없지만 임의로 가입하여 소득재분배 혜택을 받을 수 있는 권리를 포기하기도 한다. 이렇게 개인들을 노후빈곤으로 떨어질 위험에 쳐하게 만들 뿐 아니라 제도 자체에도 심각한 부작용을 초래한다.연금가입을 회피하거나 소득신고를 기피하면 그로 인해 국민연금의 사각지대는 더욱 넓어지고, 국민연금 가입자와 비가입자간의 노후소득 불평등은 더욱 심화한다. 또한 소득 축소 신고는 전체 가입자의 평균 소득을 낮추어 결국 가입자들의 연금액을 낮추는 부작용을 초래한다. 나아가 계층 간 소득 재분배를 왜곡하고 가입자들 간 불신을 가중한다. 이는 신뢰에 기초한 사회연대제도인 공적연금제도의 유지가능성을 현저히 훼손시키는 일이다.모든 세대들의 행복한 노후를 보장하는 신연금제도 탄생을 기대한다
역사적으로 사회적 대화와 열린 개혁을 추구하여 성공한 공적연금 개혁사례 하나를 제시하면서 필자의 주장을 대하고자 한다. 영국의 신 노동당 정부는 2002년부터 2012년까지 10년에 걸친 사회적 대화 노력 끝에 공적연금개혁을 성공리에 마무리 했다. 당시 영국정부는 손쉬운 개혁 대신에 오랜 인내의 과정을 거쳐 국민들을 설득하는 길을 선택했고, 결국 역사적으로 의미 있는 개혁을 이루어 냈다. 이를 통해 공적보장이 강화되는 제도로의 전환과 재정건전성을 모두 확보하는 성과를 거둘 수 있었다.개혁에 착수하면서 신 노동당 정부는 가장 먼저 사실자료를 광범위하게 조사하여 국민에게 제공한 후, 이를 숙지한 국민들이 참여하는 숙의토론(熟議討論, deliberative discussion)을 진행하였다. 이를 통해 국민들은 노후소득보장과 재정안정화에 대한 균형 있는 시각을 가질 수 있었다. 아울러 그 과정에서 참여집단 상호간 이해의 폭을 넓힐 수 있었다. 국민들의 제도에 대한 이해가 높아지고 개혁논의가 투명하게 진행되자 특정 집단이나 정파의 정략이 먹힐 수 없게 되었다. 어렵지만 국민과 함께하는 열린 개혁의 길을 선택한 결과 의미 있고 아름다운 성과 낸 것이다.복잡하게 얽힌 우리 공적연금제도의 문제들과, 국민들의 공적연금에 대한 이해 부족과, 저하된 신뢰들을 생각할 때, 우리 공적연금개혁이 추구해야 할 개혁은 이렇게 국민과 함께하는 개혁이 되어야 할 것이다. 이번 공적연금개혁과정을 통해 사회적 분열과 갈등이 치유되고 연대의 정신이 구현될 수 있기를 기대한다. 국민과 함께 하는 열린 개혁과정을 통해, 빈곤 노인들의 사각지대가 해소되고, 중산층을 포함한 전 국민의 노후소득이 보장되며, 공정하고 평등하며 효율적으로 작동하는 새로운 공적연금 체계가 구축되기를 기대한다. 사회적 부양 역량을 잘 조합하여 현 세대는 물론 미래세대의 행복한 노후까지 보장할 수 있는 신 연금제도를 다 같이 만들어 가자.*이재섭 교수는 영국 University of Kent에서 '공적연금개혁의 제도·정치' 주제 논문으로 사회정책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공무원연금공단 공무원연금연구소장을 역임했고, 사단법인 복지국가소사이어티 연구위원장, 공동대표 겸 공적연금개혁특별대책위원장을 맡고 있다. 2019년에 공적연금수급자유니온을 창립하였고, '노인이 존중받고 노후가 행복한 사회건설'을 위한 공적연금개혁 정책 활동에 전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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