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수자에게 더욱 엄격하게 요구되는 책임과 의무
보통 학생인권이 '과하게 보장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말하는 청소년의 책임과 의무란 이런 것들이다. 부모나 교사 등 '어른' 말을 잘 듣는 것, 공부를 생활의 중심에 두고 공부를 최우선으로 할 것, 사회에서 '비행'으로 규정하는 행동을 하지 않고 지낼 것, 단정하고 학생다운 복장을 할 것 등등… 사실 정말 신박한 책임들을 끝도 없이 주문해 대기 때문에 다 열거하기도 힘들다. 비청소년들이 당연하게 보장받는 신체의 자유, 행복추구의 권리, 폭력으로부터 자유로울 권리, 사생활 보장이나 양심의 자유 등의 기본적 인권은 나이, 인종, 성별, 직업 등에 상관없이 살아 숨쉬기만 하면 지금 당장 보장되어야 하는 권리이다. 그것이 가장 기본적 약속이다. 그 위에 그 권리들이 실생활에 적용될 때의 한계들을 법이나 규칙으로 정하는 것이다. 법은 권리를 먼저 보장하고, 그 다음 그것이 실생활에서 어떻게 보장될지, 그 권리의 실질적 한계 등을 설정한다. 이 한계는 어디까지나 사회에서 함께 살아가며 보장받을 수 있는 현실적 범위에 관한 것이지, 이 권리를 보장받기 위해 지불해야 할 대가가 있다는 이야기가 전혀 아니다. 학생인권조례에 '학생의 책임과 의무'를 권리와 동등한 수준으로 넣겠다는 발상은, 권리를 등가교환제로 생각하는 권리에 대한 무지이기도 하지만, 법 체계에 대한 무지이기도 하다. 많은 법이 여러 관계에서 상대적으로 약한 위치에 있는 이들의 인권을 보장하기 위해 강한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 지켜야 할 책임과 규칙을 명시하는 방식으로 구성되어 왔다. 예를 들어, 노동자의 인권 보장을 위해 최저 임금과 노동시간, 처우 등을 규정한 '근로기준법'에 피고용자, 근로자의 '책임과 의무'를 상세히 명시하자고 주장한다면, 법리적으로 동의를 얻기 어려울 것이다. 그런데 유독 청소년들은 자신의 머리 모양 및 복장을 자유롭게 하기 위해, 휴대폰을 소지하기 위해, 불시에 타인에게 사생활을 침해당하지 않기 위해 특별히 져야 할 책무가 있는 것처럼 취급되곤 한다. 학생생활규정을 다소 완화한 다음, "선생님들이 많이 봐 주고 있으니까 알아서 잘 해라."라며 생색을 내는 학교들이 적지 않은 것도 이런 이유에서일 것이다. 이런 장면들은 마치 흑인 투표권이 막 생겨나기 시작한 시기의 미국 남부 주(州)들에서 벌어지던 '문맹 검사'를 떠올리게 한다. 백인들은 아무런 제약 없이 투표를 할 수 있는데 반해, 흑인들은 일정 시험을 통과해야만 투표권을 주도록 했던 이 제도는, 소수자들이 같은 권리를 얻기 위해 추가적인 노력을 기울여야 하는 부당한 제도의 대표적 예시이다.어린이·청소년을 이등 시민으로 보는 것
만약 비청소년에게 청소년들에게 요구되는 것과 비슷하게 상사의 말을 무조건 잘 들을 것, 자신의 직업생활을 무조건 삶의 중심으로 두고 최우선시 할 것, 몰려다니지 말 것(사실 술·담배 같은 것 말고도, 청소년들은 '몰려다니는' 것만으로도 법률적으로 비행으로 분류되고 있다.), 정해진 복장을 다른 사람들 보기 좋게 입을 것 등을 기본권의 대가로 요구한다면, 모두가 분노할 것이다. 일각에서는 '성인'인 자신들은 일을 해서 자신이 자신의 생계를 책임지고, 자신의 소득에 따른 세금을 내며, 청소년보다 무겁게 형사적 책임을 지므로 청소년과 같은 취급을 받을 수 없다고 할 것이다. 청소년들은 다른 부모의 돈으로 생활하고, 세금도 내지 않으며, 비청소년보다 가벼운 형사책임을 지기 때문에 똑같은 권리를 주장할 수 없다고. 하지만 전후관계를 생각해 보면, 비청소년들이 이런 의무를 다하는지 국가가 일일이 검토한 뒤 해당자에게 기본권을 주는 것이 아니며, 그 권리의 보장은 의무와 책임에 대한 법률과는 전혀 별개의 것이다. 애초에, 청소년들 또한 생계를 위해 노동을 하기도 하고, 청소년도 세금을 낸다. '소년법'을 제대로 읽어본 사람이라면 알겠지만, 청소년들 또한 사법적 책임에서 무한히 자유롭지 않으며 어떤 경우에는 사법 처리 과정에서조차 비청소년은 당연히 보장받는 권리들을 보장받을 수 없는 일도 종종 있다. 사회에서 이렇게 '책임을 다하는' 청소년들을 따로 골라 내어 비청소년과 동등한 권리를 줬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다. 청소년은 비청소년과 동등한 권리 주체가 될 수 없다는 주장은, 나이 어린 사람을 이등 시민, 아랫사람으로 보고, 권리를 박탈하는 것으로 손쉽게 통제하기 위한 것이다. 책임과 의무에 관한 많은 논의들은 이를 정당화하기 위해 나중에 붙인 이유에 불과한 것이다.진짜 책임과 의무를 져야 하는 이들은
물론, 어린이·청소년은 비청소년과 다른 방식과 강도로 책무를 분담하도록 되어 있는 경우가 전혀 없다고는 할 수 없다. 이는 어린이·청소년이 이 사회에서 함께한 시간이 상대적으로 적기 때문이다. 사회 평균보다 대개 몸집이 작거나 힘이 약하거나 해서 성인 남성을 기준으로 설계된 사회에서 살아가기 힘들다거나, 사회가 돌아가는 모양에 익숙해질 시간이 필요할 수도 있다. 사회는 이런 과정들을 잘 겪을 수 있도록, 그리고 직접 참여할 수 있도록 안내하고 돕는 과정에서 실질적으로 지기 힘든 책임과 의무를 돌봄의 형태로 나눠 지는 것일 테다. 사회가 그렇게 하기로 합의한 것은 딱히 나이 어린 사람들에게 시혜를 베푸는 것이 아니다. 그것이 이 사회를 유지하고 지속하는 데에 필요하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어린이·청소년에게는 인간의 기본적 권리를 덜 줘도 된다거나 책임과 의무를 덜 지니까 참여할 권리가 없다고 하는 것은 매우 위험한 발상이다. 그것을 긍정하는 순간 빈곤한 사람은, 소수자는, 이방인은, 능력이 없는 사람은 사회에 기여도가 적으므로 인권을 보장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사회가 '기준 미달'인 자들을 밀쳐내는 방식으로 굴러간다면, 그리고 언제 그 기준이 자신의 삶을 위협할지 모른다면, 사람들은 과연 안심하고 그 사회에 살 수 있을까? 책임과 의무는 소수자 개개인에게 자신을 검열하고 규제하는 방식으로 지워져서는 안 된다. 공공기관을 운영하는 사람, 지방자치단체, 선출직 공무원, 국가 등이 모든 사람의 인권을 더욱 잘 보장할 수 있도록 구조와 시스템을 만들고 운영해 나가야 할 책임과 의무를 지는 것이다.임태희 경기도 교육감을 비롯해, 법 체계를 뒤틀어서까지 '책임과 의무'라는 구실로 학생들 개개인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려는 이들에게 묻고 싶다. 학생인권 보장의 의무를 가지는 교육감, 교육청, 학교장 등은 그들의 의무와 책임을 다하고 있는지. 학교에서 청소년들이 한 인간으로 존중받을 수 있도록 학교를 운영하고 있는지(단순히 머리카락 길이 규제를 하지 않는다거나, 소지품을 압수하지 않는다거나, 학생을 때리지 않는다는 것은 당연한 것이지 자랑할 일이 아니다). '헌법', '유엔아동권리협약', '초·중등교육법', 각 지역 학생인권조례 등에서 보장하고자 하는 인권들이 실제로 학교 현장에서 제대로 보장되고 있는지를 잘 관리 감독하고 지원하고 있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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