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한 사직'은 잊어라. 2023년은 '기후 사직'(Climate Quitting)의 해가 될 것이다."
2021년 구글 엔지니어로 일하던 유진 키르피초프는 구글을 떠나며 동료들에게 "기후위기의 규모, 위급성, 비극은 너무 중대해서 내가 하고 있는 일을 정당화할 수 없게 되었다"고 퇴직 이유를 담은 메일을 보냈다. 키르피초프는 이후 녹색 일자리 플랫폼을 만들며 기후위기 대응과 관련된 업무를 새롭게 시작했다.
소셜네트워크 서비스 에 해당 메일을 공개한 키르피초프는 자신의 퇴사 이유가 대중으로부터 "폭발적인 반응"을 받았다며 특히 "나와 같은 배에 탄 사람들이 너무 많았다"라고 미 방송 CNBC와의 인터뷰에서 밝혔다.
이처럼 기후위기 상황이 심각하며, 당장 대응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인식을 가진 사람들이 원래 직업을 그만두고, 기후와 관련된 일을 찾아 나서는 움직임이 새로운 변화를 만들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고 있다.
지난 6일(현지 시각) <블룸버그> 통신은 이 같이 '기후위기와 싸우기 위해' 회사를 그만둔 이들을 라고 부르며 이들이 향후 노동시장을 바꾸는 새로운 흐름이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통신은 전 세계적으로 '기후 사직자'가 늘고 있다며 화석연료 기업 소속 변호사, 식당 평론가, 여행사 직원 등이 각각 환경단체, 기후 스타트업 등에서 새롭게 자리잡게 된 이야기를 소개했다.
이들은 공통적으로 기후위기 현실을 알게 된 후 하던 일을 그만두고 기후위기에 대응할 수 있는 일을 찾아 나섰다. 호주에서 22년간 석유 기업 변호사로 일하다가 국제에너지기구 보고서를 읽은 후 태양광 기업으로 이직하는 등 기후와 관련된 새로운 직업을 찾아 나서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 지난 24일(현지 시각) 새롭게 발표된 설문조사에서는 영국의 젊은 노동자 30%가 기후위기에 악영향을 끼치는 기업에 입사하지 않겠다고 밝히는 등 기후위기와 개인의 일 사이의 관계성이 강화되고 있다는 분석이 제시됐다.
"더는 타협할 수 없다"…고액 연봉 때려치고 나오는 기후 사직자들
화석연료 산업에 종사하는 노동자들이 자발적으로 일자리를 그만두고 새로운 '녹색' 일자리를 찾아 나서는 기후 사직은 과거부터 있었던 사례다. 공식적인 통계는 없으나 산업계와 학계는 기후위기가 심화하면서 노동자가 화석연료 산업을 나와 새로운 일자리를 찾아나서는 현상이 점점 늘어날 것이라고 전망해 왔다.
대중에 공개된 유명한 '기후 사직' 사례도 있다. 2022년 글로벌 석유기업 쉘과 안전 컨설팅 계약을 11년간 맺어온 카를로니 데넷은 링크드인에 을 올리며 쉘과의 계약 파기를 공개적으로 선언했다.
데넷은 "쉘은 기후변화 위험을 무시하고 있다"며 "화석 연료 생산을 줄이지 않는 기업의 모습을 더는 참을 수 없다"고 비판했다. 데넷은 이후 <가디언>과의 인터뷰에서 쉘과의 계약 파기로 인해 입은 피해가 크다면서도 "전 세계적으로 내 행동에 대한 지지 의사가 많이 전해져 왔다"라고 밝혔다.
<파이낸셜타임스>는 2021년 한 금융회사 고위직의 환경단체행을 보도하며 "기후를 위해 싸우려고 퇴사하는 업계 고위직이 늘고 있다"는 산업계의 동향을 전했다. 세계 최대 자산운용사인 블랙록 글로벌 최고투자책임자로 근무하다 비영리단체로 옮겨간 타리크 팬시는 <파이낸셜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기후위기에 대응하고 싶어 일자리를 그만두는 사람의 수는 우리가 보고 있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을 것"이라고 전했다.
주목할 점은 '기후 사직'이 더는 일부 개인의 일이 아닌, 향후 노동시장 자체에 변화를 줄 잠재력을 지녔다는 점이다. 미국 젊은 세대에 큰 반향을 가져온 '조용한 사직'(Quiet quitting)처럼 '기후위기에 대응하는 기업의 태도'에 따라 노동자와 구직자의 태도가 달라질 것이라는 예측이다.
이미 일부 나라에서는 '기후위기'가 구직 과정에서 중요한 요소로 작동하고 있다. 영국에서는 대학생들을 주축으로 캠페인이 2022년부터 진행 중이다. 옥스퍼드대 등 4개 대학 학생들이 주도하는 이 캠페인은 영국 대학들이 석유, 가스, 광산 등 산업의 일자리를 학생들에게 소개해주고 있다며 화석연료 기업과 대학간의 연결고리를 끊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안토니우 구테흐스 유엔 사무총장 또한 2022년 미 시튼 홀 대학 졸업식 연설에서 "기후파괴자를 위해 일하지 말라"며 "젊은 세대의 재능을 활용해 지구를 재생 가능한 미래로 나아가게끔 해야 한다"라고 촉구했다.
젊은 구직자 30% "기후위기 악영향 기업에서 일하지 않겠다"
'기후위기와 일'간의 관계는 최근 발표된 설문조사를 통해서도 다시 확인됐다. 특히 젊은층일수록 기후위기와 일의 관계에 더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으로 확인됐다.
국제 회계·경영컨설팅 회사인 KPMG 영국지부가 지난 24일(현지 시각) 최근 6개월 사이 고등교육을 이수한 6000명의 노동자 및 학생을 대상으로 실시한 에 따르면 응답자 절반가량(46%)은 본인이 근무하는 회사가 ESG경영에 대한 방침을 밝히기를 원했다.
특히 기업에 지원할 때 해당 기업이 밝힌 'ESG 비전'을 찾아본 이들은 30%에 달했다. 또한 응답자의 20%는 불충분한 ESG 전망을 제시한 기업의 입사 제안은 거부하거나, 이미 거부한 경험이 있다고 밝혔다.
젊은 세대만 놓고 보았을 때 이 같은 흐름은 도드라지게 나타났다. 25~34세의 젊은 노동자 중 55%는 고용주를 평가할 때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부분이 'ESG 기여도'라고 응답했다. 18~24세 사회초년생의 경우 기업 ESG 방침이 본인들의 가치관과 맞지 않다면 입사하지 않겠다고 응답한 비율이 30%를 넘겼다.
해당 연구를 진행한 존 맥켈라 레시 KPMG 영국지부 ESG 담당자는 "파리협정 목표를 달성하지 못하면 가장 큰 피해를 입는 세대는 젊은 세대이므로, 일을 선택할 때 ESG를 최우선적으로 고려하는 건 놀라운 일이 아니"라고 평가했다. 레시 담당자는 또한 "2025년까지 노동 인구의 75%는 밀레니엄 세대가 될 것"이라며 "능력 있고 젊은 인재를 원한다면 기업들도 명확한 ESG 방향을 밝혀야 한다"고 촉구했다.
과거 발표된 설문조사에서도 젊은 세대의 일과 기후위기 민감도 간의 상관관계는 관측된 바 있다.
2022년 미 예일대가 2000명의 학생을 대상으로 진행한 에서 응답자 51%는 더 좋은 기후위기 대응을 하는 회사에서 일하기 위해서 낮은 급여를 받을 수 있다고 응답했다. 기후위기를 가속화하는 회사에서 일하지 않겠다고 응답한 학생은 26%로 2015년 진행한 같은 설문조사(19%)에 비해 증가했다.
'녹색' 일자리 늘어나면 기후 사직 더 늘어날까…소수 '특권' 지적도
이러한 '기후 사직'의 움직임은 녹색 일자리가 그만큼 늘어나는 상황과 연관되어 있다는 분석도 제기된다. 국제에너지기구(IEA)의 분석에 따르면 2022년 에너지 분야 종사자 중 친환경 에너지 분야에 속한 이들이 화석연료 기업 종사자 수를 넘어섰다. 국제노동기구(ILO) 또한 신재생에너지 등 기후위기 대응 산업분야에서 2030년까지 전 세계적으로 2400만 개의 일자리가 창출될 것이라고 전망한 바 있다.
영국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기업문화 싱크탱크 헤이블은 "기후 사직은 새로운 흐름이 될 것"이라며 "더 많은 이들이 환경 가치를 공유하는 회사에서 일하기를 원하게 될 것"으로 전망했다. 헤이블은 이에 따라 기업 문화 변화 필요성이 커졌다고 강조했다.
다만 기후위기에 대응하는 일이 꼭 사직 뿐만은 아니라는 지적도 제기된다. 원래 하던 일을 그만둔 후 기후위기 대응에 나서는 일 또한 소수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라는 지적이다. 글로벌 녹색일자리 플랫폼 '워크포클라이밋' 이사 루시 파이퍼는 <블룸버그>에 "일을 그만두는 대신 각자의 자리에서 기후위기에 대응할 수 있는 역할을 찾아볼 수도 있다"라며 "회사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역할은 기업의 향후 행보에 상당히 큰 영향을 행사할 수 있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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