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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기동물구조사 생활 1년, 참담하기 짝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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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기동물구조사 생활 1년, 참담하기 짝이 없었다 [창비주간논평] '입양'으로는 '유기' 못 막는다
농림축산검역본부 동물보호관리시스템의 자료에 따르면 2020년 한해 유기된 동물은 약 13만 마리다. 내가 살고 있는 울진군의 인구는 4만7000명인데 그보다 2.5배가 넘는 동물이 매해 버려지는 셈이다. 그러나 이는 동물보호관리시스템에서 파악한 수치로, 실상 얼마나 많은 동물이 유기되는지는 알 수 없다. 유기동물의 대다수는 유기견이다. 수천년 인간 곁을 지키며 함께 살아온 생명이 어쩌다 버림당하는 존재가 되었을까. 물리학자나 생물학자들의 견해를 빌리자면, 우주의 대부분은 생명이 없는 무생물로 이루어져 있다. 그러므로 생명이란 아주 예외적인 특별함이라고 한다. 그러나 인간이 생명으로 여기고 권리나 의무를 부여하는 것은 오직 인간이다. 마치 지상의 모든 권리가 인간에게만 있는 듯이 말이다. 하지만 인권이라는 것도 개별적 삶을 들여다보면 천차만별이다. 누릴 수 있는 권리는 각자 속한 계급적 지위를 벗어나지 못한다. 현대문명의 기폭이 되었던 산업혁명과 시민혁명 이후로도 인간은 인간에게조차 폭력을 멈추지 않았다. 인류의 고향인 아프리카인들을 사고팔았으며, 자를 대고 그려놓은 그곳의 국경선은 유럽의 두 혁명이 또다른 수탈과 폭력이라는 증거다. 두번의 세계대전과 한국전쟁, 베트남전쟁으로 죽어간 사람들은 말해 무엇하겠나. 우리나라 인권이 제도 안으로 흡수된 것은 2001년 국가인권위원회가 설치되고부터다. 인간이 인간에게도 이러할진대 그밖의 생명에게는 어땠을까. 정부가 국민의 인권을 살피기 시작한 지 고작 20년 된 나라에서, 버려지는 또다른 생명을 살피자는 말은 사치일지도 모르겠다. 나는 읍내에서 꽤 멀리 떨어진 산골마을에 산다. 사람이 사는 제일 끝 마을이다. 지금까지 유기견 일곱 마리와 유기묘 두 마리를 집에 들여 함께 살았다. 유기견 일곱 중 여섯과 고양이 둘은 내 집에서 숨을 거두었다. 나는 그 주검을 집 주변 벚나무 감나무 느티나무 배롱나무 밑에 묻었다. 이제 '봄'이라고 이름 지은 유기견 한 마리만 남았다. 그것들은 모두 내가 사는 마을에 버려진 목숨이었다. 함께 살던 이로부터 먼 산골마을까지, 영문도 모른 채 실려와 버려졌다. 버림받은 것들이 어찌어찌 내 집에 찾아들면 쫓아내지 못하고 함께 살았다. 버림받았으니 생시와 이력을 알 길이 없었다. 그것들은 그렇게 5~6년을 살다가 마당가 나무 밑에 묻혔다. 그나마 사람이 사는 마을에 버리고 간 이들은 양심적이라고 말해야겠다. 버리고 간 이들이 양심적이라는 말이 이해되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그렇지 못한 사례를 사람들은 알지 못한다.
ⓒgettyimagesbank
나는 2021년 울진군 유기동물보호소에서 1년 정도 유기동물구조사로 일했다. 특별한 교육을 받거나 자격이 필요한 일이 아니었다. 지자체의 일자리사업인 공공근로 중 하나였다. 유기견을 키운 이력이 내가 뽑힌 이유라 짐작할 뿐이다. 버려진 목숨들과 함께 살면서도 '동물권'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했던 적은 없었다. 그러나 내가 1년 동안 겪은 일은 참담하기 짝이 없었다.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은 강아지들이 거머리가 잔뜩 붙은 채 산속에 버려졌고, 버려진 채 산속을 떠돌다 멧돼지 포획 덫에 다리가 잘린 개도 있었다. 온몸이 학대 흔적으로 만신창이가 된 채 자루 속에 묶여 바닷가에 버려졌으며, 악성종양을 갖고 임신한 상태로 보호소에 와 죽을힘 다해 강아지를 낳은 뒤 죽어버렸다. 이런 일은 열거하지 못할 만큼 흔했다. 유기동물에 대해 관심 있는 나조차 알지 못하는 다른 세상이었다. 1년간 내 손으로 구조한 유기동물이 300마리가 넘는다. 하지만 구조활동이 모든 것을 해결할 수는 없다. 유기동물이 구조되면 동물보호관리시스템에 등록되고 주인을 찾지 못한 동물은 입양자를 기다려야 한다. 그마저도 비교적 어리거나 튼튼하고 큰 병변이 없어야 기대해볼 수 있는 일이다. 그 기회조차 얻지 못하면 ‘안락사’가 기다리고 있다. '인도주의적 안락사' 나는 여전히 이 말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고민 중이다. 버려진 것들은 자기 목숨에 대한 권리를 인간에게 양도한 적이 없다. 물론 보호소나 동물권 활동가, 자원봉사자들이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어떻게든 더 많은 입양을 위해 노고를 아끼지 않는 사람들이다. 문제는 입양이 유기를 따라가지 못한다는 것이다. 특히 대형견과 노견 입양은 불가능에 가깝다. 거기에 더해 지자체의 예산이라는 칼날은 버려진 목숨에 관대하지 않다. 한국전쟁 이후 수많은 전쟁고아들이 해외입양을 갔듯, 우리나라는 유기견 해외입양률도 높은 편이다. 간간이 안락사 순번을 기다리던 대형견이 기적처럼 먼 나라 입양자에게 보내진다. 그렇게 한 생명이라도 더 살리기 위해 안간힘 쓰는 이들에게 안락사라는 말은 너무나 절망적이다. 하지만 입양이 유기를 따라가지 못하는 현실 앞에서는 아무런 대책이 없다. 자본주의는 인간과 가장 가까운 생명마저도 어느 순간 상품으로 둔갑시켰다. 더 작고 더 예쁜 품종을 만들기 위해 온갖 수단을 동원했다. 진열장 안에서 팔려나간 예쁘고 작은 목숨은 15년 정도의 수명을 가졌으니 인간에 비해 노화 속도가 급격히 빠르다. 그리고 병든 목숨의 치료비는 인간의 웬만한 치료비보다 훨씬 비싸다. 그걸 감당하지 못하면 결국 버리는 것이다. 그게 아니면 유행이 지난 물건에 싫증을 내듯 버리거나. 여름 휴가철 해수욕장엔 버려진 목숨들이 종일 자기를 버리고 간 인간을 기다리기도 한다. 제국주의가 아프리카인들을 소비했던 것과 반려라는 이름으로 포장한 채 목숨을 사고팔고 버리는 일은 다르지 않다. 전쟁 중 인간에게 자행된 비인도적 행위와 힘없는 생명을 향해 자신의 분노를 쏟아내는 학대는 무엇이 다른가. 거창하게 인류애나 박애주의를 말하기 전에 주변을 돌아보라. 우리가 거대한 담론을 이야기하는 시간에도 어디선가 태어났다는 이유로 학대당하고 버려지고 죽어가는 목숨들이 있다. 이 행성에는 사람과 다름없는 생명이 많다. 그것들은 어떻게든 사람과 함께 살아야 한다. '사지 말고 입양하세요'라는 캐치프레이즈가 많은 사람들의 지지를 받고 있지만 입양도 신중해야 한다. 입양견의 파양률 역시 높은 편이다. 버려진 목숨을 구하고 치료하고 입양하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살려놓은 개가 다시 안락사를 기다리는 구조적인 악순환의 고리는 도무지 해결할 길이 없다. 내가 유기동물구조사를 그만둔 이유이기도 하다. 아무리 생각해도 내 머릿속에는 이것 이상으로 분명하고 확실한 방법이 떠오르지 않는다. 버리지 마세요. 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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