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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표류하게 만든 ‘근대의 가을’, 한국은 더 혹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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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일본 표류하게 만든 ‘근대의 가을’, 한국은 더 혹독하다 [장석준 칼럼] 고도성장 이후의 대안 모색에 대해 일본에서 얻을 수 있는 교훈
최근 극장가에 '슬램덩크' 바람이 불었다던데, 나는 '슬램덩크'가 인기를 끌던 무렵의 일본 사회를 돌아본 책 한 권에 빠져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요나하 준의 <헤이세이사 1989-2019: 어제의 세계, 모든 것>(이충원 옮김, 마르코폴로, 2022)이 그 책이다. 요나하 준은 1979년생인 역사학자인데, 이미 <중국화하는 일본: 동아시아 '문명의 충돌' 1천년사>(최종길 옮김, 페이퍼로드, 2013)라는 저작이 우리말로 소개된 바 있다. 교수로 있다 사직하고 프리랜서 작가로 활동하는 이력도 이채롭지만, 전작 <중국화하는 일본>을 읽으면서도 재기 넘치는 저자라는 인상을 받았던 기억이 있다. 제목의 '헤이세이'는 우리에게 좀 더 익숙한 '쇼와' 이후 그리고 현 '레이와' 이전의 연호다. 아직도 천황이 있어서 연호를 쓰는 일본인들의 시대 감각은 우리에게는 영 낯설게 느껴진다. 어쨌든 '헤이세이'는 우리에게는 제6공화국 시기와 거의 겹치는 1990년대부터 2020년경에 이르는 세월을 뜻한다. <헤이세이사>는 일단 독서를 시작한 뒤에는 좀처럼 눈길을 뗄 수가 없었는데, 그럴 수밖에 없었다. 우리가 살아온 지난 몇 십 년과 같은 시기에 바로 옆 나라가 겪은 이야기들이니 관심과 감흥이 없을 수가 없었고, 더구나 정치, 경제부터 사상계와 대중문화까지 종횡무진하며 일본 사회의 가까운 과거를 돌아보는 저자의 폭넓은 시야와 이를 뒷받침하는 필력에 끌려들어 가지 않을 재간이 없었기 때문이다. 거리감을 느낀 대목도 적지는 않았다. 실은 일본 저자들의 책에서 흔히 느끼는 점인데, 역사서나 사회과학 서적에서조차 마치 일본 문학 특유의 사소설(私小說)을 연상시키는 지나치게 사적인 감상이 돌출한다. 요나하 준은 이런 성향이 특히 심했다. 어떤 사상가들에 대한 평가는 설득력이 있다기보다는 마치 저자의 성벽을 위악적으로 드러내려는 수단처럼 다가왔다. 게다가 마루야마 마사오로부터 AKB48(일본의 여성 아이돌 그룹)에 이르는 다양한 주인공들에 대한 만화경 같은 서술이 어지럽고 산만하게 느껴지는 경우도 많았다. 그럼에도 <헤이세이사>의 독서 경험은 감점보다 득점이 더 많았다. '슬램덩크'의 경기 장면들에 등장하는 놀라운 슛처럼 나의 뇌리에 꽂힌 한 문장 때문이었다. 후반부인 472쪽에서 저자는 신음처럼 한 문구를 토해낸다.

"'근대의 가을'이구나."

이 한 문장을 통해 일본의 지난 한 세대 동안의 시간과, 한국이 살아내야 할 앞으로의 시간이 한꺼번에 육박해왔다. 뜻밖의 두려운 깨침이었다.

헤이세이 시대 동안 '근대의 가을'을 살아온 일본 사회

공교롭게도 내가 <프레시안>의 이 지면에 지난 몇 년간 올렸던 칼럼들 중 일부를 모아 몇 달 전에 낸 책 제목이 '근대의 가을'이다(장석준, <근대의 가을: 제6공화국의 황혼을 삽니다>, 산현재, 2022). 혹시 표절 아니냐는 의심을 받겠다 싶을 만큼 똑같은 문구다. <근대의 가을>이 <헤이세이사> 국역본보다 먼저 나온 게 그나마 다행이랄까. 그러나 이것은 표절이 아닐 뿐더러 단순한 우연의 일치도 아니다. 나는 칼럼집 제목을 '근대의 가을'이라 정하면서, 자본주의의 유례없는 압축 성장 이후 복합 위기(한국만이 아니라 전 세계적인)의 절벽 앞에 마주한 한국 사회의 현재 시간이 마치 가을과 같다는 생각을 했다. 가을은 봄과 여름에 했던 일들을 마냥 계속할 때가 아니다. 자신을 깊이 돌아보고 새로운 방향을 고민해야 할 때다. 성큼성큼 다가오는 겨울에 하루라도 더 빨리 대비해야 할 때다. 나는 이렇게 한국 사회가 앞으로 살아가야 할 시간을 '가을'이라 비유했던 것인데, <헤이세이사>의 저자 요나하 준은 일본 사회가 이미 살아온 시간에서 '가을'을 떠올렸다. 일본인들은 헤이세이 연간에 지금 한국인들이 마주한 시험들에 벌써 맞닥뜨렸던 것이다. 한국이 몇 십 년 차이로 일본을 그대로 따라가는 것 같다는 이야기는 아주 오래 된 가설인데도 나는 '근대의 가을'이라는 비유 또한 이 가설과 무관할 수 없음을 미처 생각하지 못한 셈이다. 따져 보니, 영락없이 그렇다. 1980년대 말에 일본은 고도성장의 정점에 있었다. 21세기에 중국의 성장에 쏟아진 전 세계의 주목과 흥분은 실은 20세기 말에 일본을 대상으로 예행연습을 거친 것이었다. 이때 일본 사회 분위기는 각종 경제 지표를 놓고 일본을 제쳤다고 자화자찬하며 삼성 반도체와 첨단 무기 수출, K-팝 열풍 등을 열거하는 지금 우리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러다 1990년대 초에 버블 붕괴가 시작됐다. 이제 와서 돌아보니 마치 커다란 경제 위기가 닥쳤던 것처럼 느껴지지만, 막상 당시에는 일본 경제가 이전과는 전혀 다른 국면으로 넘어가고 있다고 절감한 이들이 그리 많지 않았다. 버블 붕괴는 한국의 1997년 외환 위기나 2008년 세계 금융 위기처럼 극적인 모습을 띠지는 않았다. 이게 오히려 문제였다. 헤이세이 초기에 일본은 '근대의 가을'에 접어들었지만, 많은 일본인들은 이를 명확히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렇다고 역사의 계절 변화에 무감하기만 하지는 않았다. 나름대로 치열한 노력들이 있었다. 이 시기를 장식한 수많은 사상가들, 논객들이 600쪽이 훨씬 넘는 <헤이세이사> 지면 곳곳에서 명멸한다. 그 중에서도 여러 차례 언급되는 주요 인물들은 대표작이 우리말로 대부분 번역돼 우리에게도 낯설지 않다. 에토 준, 가라타니 고진, 아사다 아키라, 아즈마 히로키, 우치다 타츠루, 오구마 에이지 등등. 요나하 준은 이 중 많은 이들이 포스트모더니즘 등의 흐름에 편승해 당대 일본 사회를 제대로 진단하는 데 실패했다고 냉정하게 평가하지만, 어쨌든 최근 몇 십 년 동안 일본은 그래도 사색하는 이가 부족한 사회는 아니었다. 가령 같은 시기 한국 사회와 비교하면, 어떠한가? <헤이세이사> 속 숱한 이름들에 대응할 만큼의 사상가들이 이 시기 한국에도 있었던가? 정확히 말하자면, 이 비교는 잘못됐다. 우리는 가을에 접어든 한국 사회에 앞으로 일본의 가을에 필적할 만큼의 사상가들이 있을지 물어야 한다. 그러나 지난 궤적을 돌아보면, 이 물음의 답은 썩 긍정적일 수 없다. 가을을 가을답게 살기에 우리의 지적 준비는 그리 풍성하지 못하다. 초점을 정치에 맞추면, 일본과 한국의 이러한 대비는 더 극명해진다. 지금에 와서는 많은 한국인들이 일본 정치를 얕잡아 본다. 실제로 아베 신조의 제2차 집권 이후에는 퇴행적인 면모가 두드러진다. 여기에다 지난 세기에 자유민주당이 장기 집권했다는 사실을 단순하게 짜 맞추면, 일본이 1당 독재 국가나 되는 듯한 착시나 오판에 빠지기 쉽다. 그러나 이런 '결과' 이전에 이러한 결과와는 그 색깔이 전혀 달랐던 기나긴 '과정'이 있었다. 1990년대 초 냉전 붕괴 직후에 일본 정치는 다른 어느 자본주의 중심부 국가보다 더 생명력 있게 꿈틀거렸으며 역동적으로 전환을 모색했다. 한국에 김영삼, 김대중 정부가 차례로 들어서며 제6공화국식 민주화가 진행되던 그 동안에 일본에서는 사뭇 파괴적이기까지 한 정치 개혁 노력이 계속됐다. 수십 년간 지속된 중선거구제를 의회가 스스로 소선거구-비례대표 병립제로 바꿨고(아이러니하게도 현재 한국 사회의 고민과는 정반대 방향이다), 기존 정치의 양대 축이었던 자유민주당과 사회당이 표류하거나 결국은 내파되는 사태까지 겪었다. 그러고는 마침내 비-자유민주당 세력들의 연합인 민주당이 2009년에 정권 교체를 성사시키기까지 했다.

(<헤이세이사>는 워낙 관심의 폭이 넓다 보니 이런 정치 역정을 상세히 설명하지는 않는다. 이 주제와 관련해서는 나카노 고이치, <우경화하는 일본 정치>[김수희 옮김, AK, 2016], 요시미 슌야, <헤이세이, 일본의 잃어버린 30년>[서의동 옮김, AK, 2020] 등이 더 도움이 된다)

그러나 이 모든 노력에 찬물을 끼얹기라도 하듯 2011년 돌연 도호쿠 대지진과 후쿠시마 핵발전소 사태가 덮쳤다. 일본에 '근대의 가을'은 너무도 빨리 혹한의 겨울로 돌변했다. 진실은 이러했다. 일본인들은 노력하지 않은 게 아니었다. 다만 그런 노력으로도 충분하지 않을 정도로 가을은 험난한 시험의 시간이었다.

이제 막 가을에 접어든 한국 사회는?

이런 일본의 전례를 직시할수록 마음이 무거워진다. 앞에서 살펴본 대로 '근대의 가을'에 이제 막 접어든 한국 사회의 상황은 헤이세이 초기 일본보다 준비 상태가 더 낫다고 할 수 없다. 당시 일본에 모자라거나 비어 있던 것은 지금 우리에게도 고스란히 공백과 결핍으로 나타난다. 예컨대 일본에는 기업별 노동조합 체제에 안주한 노동을 비롯해 시민사회 내에 특별히 지적-도덕적 지도력을 펼칠 구심점이 없었다. 그런데 이것은 현재 한국도 마찬가지다. 다만 결정적인 차이가 하나 있다. 일본이 가을을 보낸 헤이세이 연간은 전 세계 차원에서는 신자유주의적 금융자본주의 시대였다. 특히 헤이세이기의 2/3에 해당하는 1990년대와 2000년대, 20년간은 그 전성기였다. 이런 전 지구적 분위기가 일본의 가을을 크게 규정했다. 물론 일본은 자본주의 중심부 국가들 가운데에서 신자유주의의 표준형으로부터 가장 많이 벗어난 나라다. 외환위기라는 격변을 통해 급격히 이 대열에 합류한 한국과는 다르다. 그러나 이러한 일본이라 하더라도 세계적 대세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었다. 이 대세 바깥에서 고도성장 이후의 대안을 찾기는 어려웠다. 우파뿐만 아니라 좌파의 잔존 세력 역시 마찬가지였다. 반면에 한국은 신자유주의의 전성기가 지나고 그 반작용으로 복합 위기의 시대가 시작된 시점에 가을에 접어들고 있다. 신자유주의 시기에 일본이 방황하던 동안에 한국은 오히려 상승세를 탔으며 이 마지막 장기호황마저 끝난 지금에 와서는 가을의 시간을 무엇보다 신자유주의기에 대한 반성과 비판, 대안 모색으로 보내야 하는 처지다. 과연 이 차이가 지나간 일본의 가을과 다가온 한국의 가을이 상당히 달라지게 만드는 요인이 될 것인가? 한데 이 차이는 오히려 한국이 겪어야 할 시간이 일본의 헤이세이기보다 훨씬 더 위험천만한 세월이 되도록 만들 수도 있다. 복합 위기는 21세기 인류에게 전에 없던 시련을 예고하고 있고, 이제 막 성장의 호시절을 끝낸 한국인들은 그 고통을 더욱 가중된 형태로 느껴야 할지 모른다. 더구나 복합 위기 중에서도 가장 두려운 것은 기후 위기다. 한국인들이 지금 손 놓고 바라보기만 하는 기후 급변은 마치 일본인들에게 도호쿠 대지진이 그랬던 것과 같은, 인간이 어찌 할 길이 없는 재앙, 역사적 출구의 완전한 봉쇄로 엄습할 가능성이 높다. 그럼 도대체 어디부터 손을 대야 하는가? 우리가 헤이세이 시기 일본의 전례에서 교훈을 얻고자 한다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한국이 이제 일본을 앞서기 시작한다는 단꿈에서 깨어나는 것이다. 그 다음에는, 일본인들은 그나마 진지하게 노력했지만 우리는 아직 시도조차 않고 있는 일에 조금이라도 더 빨리 착수해야 한다. 내가 보기에 그 일이란, 다름 아닌 정치 개혁이다.
▲<헤이세이사 1989-2019: 어제의 세계, 모든 것>(요나하 준 지음, 이충원 옮김) ⓒ마르코폴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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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석준 전환사회연구소 기획의원은 오랫동안 진보 정당 운동의 정책 및 교육 활동에 참여해왔으며, 자본주의 위기에 맞선 진보적 사회과학을 재구성하고자 글로벌정치경제연구소에서 연구 및 출간 사업을 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 <레프트 사이드 스토리 : 세계의 좌파는 세상을 어떻게 바꾸고 있나>, <사회주의>, <장석준의 적록 서재>, <신자유주의의 탄생 : 왜 우리는 신자유주의를 막을 수 없었나> 등이 있고, 옮긴 책으로 <국가 대 시장 : 지구 경제의 출현>, <안토니오 그람시 : 옥중수고 이전>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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