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월 9일은 20대 대선 1주년이 되는 날이었다. 그러나 한국 정치는 여전히 1년 전의 그날에 멈춰 있는 듯하다. 국회를 지배하고 있는 더불어민주당·국민의힘 양당은 각각 윤석열 대통령과 이재명 대표에게 의존하는 정치를 하고 있다. '순서가 잘못된 것 아니냐'고 의아해할 수 있다. 아니다. 민주당이 윤 대통령에게, 국민의힘이 이 대표에게 의존하고 있다는 얘기가 맞다. 윤석열 정부가 지난 1년간 걸어온 길은 다수 유권자에게 긍정적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다. 대선 1주년 다음날인 지난 10일자 한국갤럽 조사를 보면, 윤 대통령에 대한 긍정적 평가는 반년 넘게 줄곧 40%를 믿돌고 있다. 부정 평가는 대체로 50% 중반을 넘는다. 윤석열 정부는 일본 강제동원 해법 일방적 밀어붙이기, 주 69시간 노동제 발표에 이은 '재검토' 논란 등 중도층을 흡수하기는커녕 오히려 구축하는 악수를 빈번히 뒀다. 그러나 윤 대통령과 여당에게는 이른바 '이재명 사법 리스크'가 전가의 보도가 되고 있다. 물론 문재인 정부와 노동조합을 겨냥한 공격으로 인해 보수 지지층이 결집한 면도 있지만, 이런 전술은 확장성 면에서 한계가 있다. 반면 '이재명 리스크'는 민주당 지지층의 결집을 방해하고 중도층에게 끊임없는 화제와 가십을 제공한다. "야당은 정부의 실패를 먹고 산다"(김종인 전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라는 정치권 격언이 있음에도 정부의 실점이 야당의 득점으로 바로 이어지지 않는 원인에도 '사법 리스크'가 있다. 실제로 민주당이 정부의 대일 외교를 비판해도, '김건희 특검법'을 발의해도, 이태원 참사 특별법을 준비해도, 노란봉투법 등 민생 법안을 처리해도 여당은 한결같이 '이재명 방탄용 아니냐'고 반격하고 있고 이 반격은 어느 정도 성과를 얻고 있다. 민주당 내에서조차 "뭘 해도 방탄이라고 하니 할 수 있는 게 없다"며 답답함을 호소하는 목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린다. 민주당 내부에서 나오는 '이대로 총선을 어떻게 치르느냐'는 우려는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커지고 있고, 앞으로 더 커질 것으로 보인다. 반면 이런 우려를 강하게 억누르는 야당 지지층 결집에 끝없이 동력을 공급하는 것은 윤 대통령과 이른바 '윤핵관'들의 정치 행태다. 지난 3.8 전당대회에 대해 여권에서조차 '각본·감독 : 대통령실', '전당대회 승자는 김기현 대표가 아니라 윤 대통령'이란 비아냥 섞인 말이 나오는 가운데, 새 지도부와 윤 대통령의 상견례 만찬에서는 "전당대회가 '당원 100%'로 국민적 흥행으로 잘 치러졌다"는 자화자찬까지 나왔다고 한다. '당원 100%' 룰은 원래 있던 여론조사 반영 비율을 아예 없앤 것으로, 유승민·안철수 등 비윤(非윤석열)계 주자를 겨냥한 조치라는 해석이 일반적이었다. 공교롭게도 용산 만찬 당일 안철수 의원은 김 대표를 만나 "내년 총선은 '민심 100%'로 뽑힌다"며 "전대를 당심 100%로 하다 보니 민심과는 동떨어졌을 가능성이 있다"고 쓴소리를 했다. 전당대회 룰 개정으로 인한 민심 반영 미비를 우려하는 목소리를 "국민적 흥행"이란 평가로 덮어버린 셈이다. 전당대회 이후 들어선 김기현 지도부는 총선 공천을 담당할 사무총장·조직부총장·전략부총장·여의도연구원장에 친윤 일색 인선을 하며 '당정일체' 기조 전면화에 나섰다. 공천 기초자료가 될 당협 평가, 여론조사 등을 모두 친윤계 핵심이 장악한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이런 국민의힘 상황을 본 민주당 인사들의 평가다.
"우리 민주당과 완전한 데칼코마니다, 똑같다. 그래서 참 환장하겠다. 우리는 친명 일색, 저기는 친윤 일색. 우리는 단일대오, 저기는 당정일체. 똑같다." (조응천 의원, 14일 SBS 라디오)
"양당은 내부 화합의 경쟁이 치열하게 벌어질 것이다. 우리 당보다 국민의힘은 김기현 대표가 52점 몇 퍼센트로 당선됐기 때문에 오히려 갈등·분열 양상은 국민의힘이 더 많이 걱정하셔야 될 위치에 있다. (…그런데) 민주당 혹은 우리 지도부도 마찬가지다." (고민정 민주당 최고위원, 13일 SBS 라디오)
"왕정 정치로 회귀하는 어떤 당과 반대의 모습을 보일 때 국민들은 민주당에게 마음을 열 것이다. 김기현 대표의 당선은 어떻게 보면 민주당한테는 굉장한 기회다. 민주당이 정말 민주당한테 온 기회를 살려야 한다." (박영선 전 중소벤처기업부 장관, 13일 KBS 라디오)
국민의힘이 '용산'을 정점으로 한 수직적 친정체게 구축에 나섰다면, 민주당은 이른바 '개딸'로 불리는 친명(親이재명) 강성 지지층의 입김에 휘둘리고 있다. 이들은 문재인 전 대통령을 포함해 '수박 7적'이라며 살생부 명단을 만들어 돌리고, 이 대표 체포동의안 본회의 표결 때 이탈표를 던진 의원들을 색출해내 차기 총선 공천 때 불이익을 줘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 대표는 짐짓 이들을 말리는 제스처를 취하고는 있지만, 민주당은 최근 '총선 공천제도 TF'를 출범시켰고 민주당 혁신위에서는 공천심사시 '당무 기여도' 반영 비율을 늘려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기도 했다. 비명계 일각의 당직 쇄신 요구에 대해 이재명 지도부는 '논의하지 않고 있다'는 입장만 되풀이하고 있다. 비명계의 주장은 최종적으로는 이 대표의 사퇴 혹은 2선 후퇴를 겨냥하고 있다. 이 대표는 그러나 지난 12일 의원들 단체 대화방에 올린 글에서 "(체포동의안) 표결 결과에 대해 의원들이 당과 국가를 위한 충정으로 당 운영에 대한 우려와 경계를 표현한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며 자신의 거취는 논의 대상이 아니라고 선을 그었다. 정부·여당의 친정체제 구축과 정책적 과오, 야당 대표와 전 정부 인사들의 '사법 리스크'가 각각 반대 당에 '혁신하지 않아도 되는 이유'를 제공하는 모양새다. 상대의 실책으로 지지층을 결집시켜 지지율 하락을 막는 '적대적 의존'의 정치, 결집된 지지층의 힘으로 내부 비판세력을 억압하는 '단일성 희구'의 정치가 1년째 이어진 결과 유권자들의 정치혐오 정서도 나날이 커지고 있다. 앞으로 1년여 남은 총선 때는 또 무슨 면목으로 유권자들에게 표를 달라고 호소할지 벌써부터 의문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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