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레시안>이 김학선 대중음악평론가의 연재 <음악의 쓸모>를 시작합니다. 김학선 평론가는 여러 음악 평론가와 글쟁이들이 첫 손에 꼽는 한국 대중음악 비평가입니다. <한겨레>에 장기간 대중음악 전문 객원기자로서 글을 썼으며 한국대중음악상 선정위원으로도 오랜 기간 활동했습니다. 앞으로 김학선 평론가는 한국 대중음악을 비판적으로 짚고 사유하는 글을 매월 1회 연재할 예정입니다. 큰 관심 바랍니다. 편집자. 스무 살의 이상은은 여의도를 떠났다. 한국방송공사(KBS)와 문화방송(MBC)이 있던 여의도를 떠났다. 그리고 미술 공부를 한다며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당시 KBS와 MBC는 대중음악 산업의 가장 중요한 공간이었다. 이 곳에서 최고의 스타로 자리했던 이상은은 스스로 그 자리에서 내려왔다. 1988년 8월 <제9회 강변가요제> 무대에서 '담다디'를 부른 뒤 일약 스타덤에 오른 이상은은 약 다섯 달가량의 연예계 생활을 경험하고 1988년 12월 <한겨레>와 인터뷰했다. 뒤늦게 읽은 이 인터뷰에서 이상은의 미래가 보였다. 아직 1집도 내기 전인 '새파란' 신인 이상은이 한 얘기를 나열하면 대략 다음과 같다. "이쪽 세계가 애당초 생각했던 것과는 엄청나게 달라요. 대학생으로서 '이건 나쁘다'라고 말하고 싶지만 힘이 없어서 암말 못하고 말지요. '여기 빠져들지 말고 무언가 지켜야겠다'는 마음으로 <어린 왕자>도 다시 읽고 헌책방에서 동화책을 잔뜩 사서 읽곤 해요. 이쪽 세계의 나쁜 모습들을 물에 비한다면 '물에 빠지지 않고 물위를 걸어야겠다'고 거듭거듭 맹세하고 있어요. 인기와 돈 속에서 생활한 지난 몇 달 동안 정서가 메마르고 마음이 차가워지는 것 같아 마치 다른 사람이 된 느낌이에요." 아, 대체 1988년의 방송사와 연예계는 어떤 곳이었을까. 생각해보면 늘 '접대'란 말이 아무렇지 않게 들려오던 곳이 연예계였고, 잊을 만하면 PD 뇌물 수수 사건이 터지던 곳이 방송국이었다. 만 18세의 이상은에게 그곳은 너무 충격적이었다. 그는 훗날 음악월간지 <서브>와 가진 인터뷰에서 "비즈니스라니 그것은 너무 미화한 말이다. 한국 연예계의 아저씨들이 너무 싫었다. 촌지에 술 먹고, 18살 순정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말도 안 되고 심하다고 생각했다. 그렇지 않은 사람들을 찾으려 했다." 그렇게 그는 미국으로 떠났다. 미술 공부를 하기 위해서였지만 그에게 음악은 여전히 중요했다. 현지 음악가들과 뉴욕의 스튜디오에서 작업했다. 겨울의 뉴욕이었다. 앞서 언급한 <서브>와의 인터뷰에서 이상은은 세 번째 앨범 [더딘 하루](1991)를 두고 이렇게 말했다. "겨울에 만들었기 때문에 추운 바람하고 뉴욕 거리하고 눈 오던 기억밖에 없다." 추운 건 단순히 날씨 때문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한국을 떠난 그는 외로웠고, 홀로서기를 해야 했다. 그래서 가장 마음이 가는 이상은의 앨범은 3집 [더딘 하루]다. 그 추운 풍경과 그 풍경만큼 추운 마음을 갖고 있던 젊은 이상은의 모습이 그대로 담겨 있기 때문이다. 6집 [공무도하가](1995)가 얼마나 뛰어난지 잘 알고 있고, 9집 [Asian Prescription](1999)을 가장 자주 듣지만 그럼에도 계속 마음이 가는 건 [더딘 하루]다. 분명 정서적인 요인이 크다. 겨울 뉴욕의 이미지가 주는 낭만도 있을 것이고, 그곳에서 이방인으로 혼자 곡을 쓰고 앨범을 만드는 이상은의 모습에 대한 상상도 작용했을 것이다. 무엇보다 상처 입었을 그의 마음을 생각한다. 앞서 언급한 <한겨레>와 인터뷰한 뒤 이상은은 두 장의 앨범을 발표하고 거의 2년을 "그 더러운 것들의 한가운데"에서 견뎌야 했다. 더는 견딜 수 없어졌을 때 그는 훌쩍 떠났다. 자신의 지위도, 인기도, 이미지 그대로 툭툭 털어버렸다. 그리고는 자신의 노래를 만들었다. 이상은은 1, 2집의 노래들을 두고 '수집'이나 '채집'이란 표현을 썼다. 연예인이 되고 난 뒤 그가 부르고 싶지 않은 노래들을 회사에서 '채집'해왔다. 목이 쉬었는데 노래를 부르게 하고 그걸 팔아먹는 모습도 보기 싫었다. 하지만 스물이 채 되지 않은 어린 청년이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그 노래들을 부르기 싫어서라도 이상은은 떠나야 했다. 자신의 생각을 글로 적고 멜로디를 만들었다. 우리가 위대한 예술가라 칭하는 이상은의 모습이 [더딘 하루]에서부터 시작되었다. 비슷한 사례가 또 있다. 열다섯의 나이에 데뷔한 박지윤. 우연한 기회에 가수가 됐고 연예인이 됐다. 내성적인 성격 탓에 방송 출연 등 연예 활동이 힘들었지만 거부하기는 어려웠다. '성인식'의 파격적인 변신도 그의 의지가 아니었다. 어린 나이부터 활동을 해온 터라 자신의 주장을 내세운다는 건 생각조차 할 수 없을 때였다. 그저 그는 시키는 대로 춤을 추고 노래를 불렀을 뿐이다. 8년을 쉼 없이 활동했지만 정작 자신의 것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뒤로 6년을 쉬었다. 그 시간 동안 기타를 배우고 작곡을 공부했다. 사진을 찍고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봤다. 그 과정을 거쳐 [더딘 하루]만큼 인상적인 앨범 [꽃, 다시 첫 번째]가 나왔다. 둘의 행보가 비슷하다는 이야기에 박지윤은 가끔 그런 얘기를 들었다며 "이상은 선배님처럼 자기 색깔을 확실히 지닌 아티스트가 된다면 무척 행복할 것 같다"고 말했다. 이상은과 박지윤의 여정, 그리고 그들의 모습이 투영된 [더딘 하루]와 [꽃, 다시 첫 번째]를 떠올린 건, 전혀 관련 없어 보이는 RM의 인터뷰를 보고 나서였다. 얼마 전 스페인 매체와 진행한 인터뷰에서 RM의 발언이 화제가 됐다. RM의 인터뷰 내용에 대한 판단은 뒤로 하고 가장 먼저 든 생각은 '그래도 RM이니까 이런 말이라도 할 수 있구나'였다. 이는 지금 '아이돌' 타이틀을 달고 있는 음악인 가운데 자신의 생각을 인터뷰를 통해 이야기할 수 있는 이가 몇이나 있을까 하는 생각으로 자연스레 연결된다.
말하자면 음악인, 혹은 예술가로서의 주체성 같은 것이다. 케이팝과 아이돌에 호의적인 이들은 그들도 충분히 주체성을 갖고 있다 말한다. 물론 난 동의하지 않는다. 음악 글을 쓰고 음악가와 인터뷰하는 직업인의 입장에서 생각해본다. 내가 아이돌 멤버 누군가와 한 시간가량 인터뷰한다면 어떤 이야기를 주고받을 수 있을까. 한 시간 동안 좋은 말, 예쁜 말만을 듣는 것도 고역이다. 그마저도 통제되고 제한된다. 당연히 그들도 스스로 생각하고 가치판단을 할 것이다. 사유하고 고민하기도 할 것이다. 하지만 그걸 밖으로 드러낼 수는 없다. 가령 '순간이동'이나 '결빙' 능력을 부여하는 유치한 설정놀이를 유치하다고 말할 수 없는 것이다.
이상은도 시대의 아이돌이었다. 라디오 DJ를 했고, 영화도 찍고, 캐럴 앨범도 녹음했다. 박지윤 역시 다르지 않았다. 지금 아이돌 그룹들보다 훨씬 전에 박진영과 방시혁 곡을 불렀다. 이상은은 <한겨레>와의 인터뷰에서 하고 싶은 말을 다 했지만 정작 1집을 발표하고부턴 아저씨들이 채집해온 노래를 열심히 부르며 아이돌 역할에 충실했다. 박지윤이 '회사'에 속해있던 동안엔 그는 그저 숫기 없이 어색하게 웃는 예쁜 가수였다. 음악에 대한 고민과 활동에 대한 불만을 이야기할 수 있는 건 그때나 지금이나 여의치 않다. 한국 주류 가요계라는 곳은 늘 강압적이고 폐쇄적이었고, 갈수록 그 경향은 더 짙어간다. 남의 노래를 부르던 이상은과 박지윤에게서 누구도 지금의 성취를 예견하지 못했다. 늘 웃어야 하고 밝은 모습만 보여야 하고 예쁜 말만 해야 하는 아이돌을 생각한다. 매일같이 반복되고 강요되는 감정노동 속에서도 계속해서 마음을 들여다보고 자신의 것에 대한 고민을 멈추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 고민이 언젠가 또 다른 [더딘 하루]와 [꽃, 다시 첫 번째]로 나타나는 희열의 순간을 기다린다. 왜 음악을 듣는지를 설명하는 기쁨의 순간이기도 할 것이다.
얼마 전 홍대 인근에서 열린 '라이브 클럽데이' 무대에서 정말 오랜만에 이상은이 노래했다. 공연을 보기 위해 오랜 팬부터 그의 음악을 새롭게 알게 된 젊은 팬들이 공연 시작 전부터 줄을 서고 객석을 가득 채웠다. 매진 공연에 발길을 돌린 이도 많았다. 이상은은 이제 정규 앨범만 열다섯 장을 가진 대가가 되었다. [공무도하가] 시절만큼의 뜨거운 관심은 아니지만 그는 계속해서 좋은 노래를 불렀다. '비밀의 화원'과 'Supersonic', '둥글게', '삶은 여행', 'Stardust' 같은 여전히 신선하고 아름다운 노래들이 그의 후기작 속에 자리하고 있다. 만약 그가 고민을 멈추고 여의도라는 닫힌 시스템에 적응했다면 높은 확률로 우리는 이 아름다운 노래를 만나지 못했을 것이다. 그곳을 떠나 여전히 노래하는 그가 있다. 더 많은 '이상은'들을 기대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2000년 인터넷음악방송국 <쌈넷> 기자로 음악 글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네이버 <온스테이지> 기획위원, 한겨레신문 대중음악 전문 객원기자로 일했고, EBS <스페이스 공감> 기획위원과 멜론 <트랙제로> 전문위원, <한국대중음악상> 선정위원으로 참여하고 있습니다. 그밖에 여러 온라인·오프라인 매체에서 정기·비정기적으로 글 쓰고 말하고 있습니다. <케이팝 세계를 홀리다>를 썼고, <한국 팝의 고고학 1990>, <멜로우 시티 멜로우 팝>을 함께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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