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화의 와중에서도 경제적 독립성이 시민의식의 필수적 전제조건이라는 데에는 많은 이가 동의하고 있었다. 이때의 '경제적 독립성'은 우리가 생각하는 독립성과는 다른 개념이다. 19세기 내내 임금노동은 임금노예제라 불릴만큼 인간의 독립성을 저해하는 시스템으로 부정당하곤 했다. 존 콜드웰 칼훈같은 논객들은 북부의 자본주의적 임금시스템을 노예제보다 더 나쁜 제도라며 경멸했다. 그들은 노예에게 제공되는 평생 고용과 기본적 복지가 북부 임금노동자에게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비난했다. 남부노예제 이론가였던 조지 피츠휴는 이렇게 말했다.
"당신들은(북부기업가-필자주) 노예소유주이다. 그런데 노예주이면서 노예주로서의 의무를 다하지 않는 노예주에 불과하다."
이런 자아상, 자유관, 자유주의 덕분에 미국인은 행복하게 되었을까? 샌델은 단호하게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샌델의 말이다.
"지난 수십년간 개인의 권리와 혜택이 확대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삶을 지배하는 요소들을 스스로 통제하는 미국인의 통제력은 오히려 줄어들었다."
"역설적이게도 자발주의적 자유관의 승리는 개인의 통제력이 또는 영향력이 점점 줄어드는 가운데서 나타났다."
심지어 샌델은 이런 주장까지 하고 있다."오늘날 미국에서 자유 민주주의가 겪는 어려움은 특정한 좌절감에서 비롯됐다기보다 자유민주주의를 뒷받침하는 자발주의적 자아상이 부족해서 나타났을지도 모른다."
자발주의적 자아상은 공동체와 유리된 무연고적 자아를 상정한다. 자유주의는 이런 인간의 개체적 속성에만 주목함으로써 인간의 또 다른 속성인 공동체적 속성을 외면한다고 샌델은 보고 있다. 샌델은 권력을 절차주의에 제한한 자유주의자들을 비판한다. 정치권력이 자본권력을 제어하지 못할 때 사회는 망가진다. 샌델의 말이다."이민자를 배척하는 우파적 파퓰리즘이 득세하는 현상은 일반적으로 진보정치가 실패했음을 예고하는 징후다. 자유주의자들이 경제권력을 민주적으로 묶어둠으로써 권력을 가진 집단으로부터 사람들을 보호하지 못할 때, 사람들은 다른 곳을 바라보게 마련이다."
샌델은 자발주의적 자아상에 기초한 자유주의가 결국 미국 사회를 실패로 이끌었다고 생각한다. 정치권력이 절차적 정당성에만 매몰될 때 공화국은 무너진다. 샌델을 비롯한 공동체주의자들의 비전은 타운에서의 삶에 대한 동경을 기본적으로 깔고 있다. 공화주의, 공동체주의에 대한 그의 천착은 공화주의적 감성이 흥성거렸던 건국 초기 타운 생활을 배경으로 한다. 공동체라는 유대감은 기본적으로 타운이라는 공간을 빼놓고서는 이해할 수가 없는 것이다. 토크빌에 따르면 미국 자치의 핵심인 타운은 규모가 이삼천명에 불과했다. 토크빌은 타운의 규모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한편으로는 너무 크지 않기 때문에 그 주민들의 이해관계가 상충하지 않을 것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지나치게 작지 않기 때문에 업무를 관장할 수 있는 사람들을 언제라도 그 시민들 가운데서 구할 수 있을 것이다."(<미국의 민주주의>(알렉시스 드 토크빌 지음, 한길사 펴냄))
다른 공동체주의 철학자 매킨타이어의 글을 살펴보자. 그의 책에는 근대 이전 시기에 대한 낭만적 동경이 넘친다. 매킨타이어는 이렇게 적고 있다."자유주의적 개인주의에 있어서 공동체는 단지 모든 개인이 스스로 선택한 자신의 '좋은 삶'의 생각을 추구하는 무대이다. (중략) 이와 반대로 고대 및 중세의 시각에서 보면 정치적 공동체는 자기 자신을 유지하기 위하여 덕들의 실행을 요청할 뿐만 아니라, 아이들을 덕을 갖춘 성인으로 키우는 것은 권위 있는 성인들의 과제에 속한다."(<덕의 상실>, 문예출판사 펴냄)
풀이하자면 현대인은 자기 좋은 것에만 몰두하지만 고대·중세인들은 자신이 유덕한 삶을 살고자 노력했을 뿐만 아니라 자녀에게도 덕있는 삶을 가르쳤다는 말이다. 매킨타이어는 개인주의에 근거한 자유주의의 대안으로 덕에 기초한 공동체주의를 제안한다. 좋은 말이지만 가능한 구상일까? 윤리철학자 황경식은 공동체주의자들의 덕에 근거한 공동체건설이라는 제안을 반대한다. 그의 논문 <도덕체계와 사회구조의 상관성>을 살펴보자. 황경식은 도덕과 사회구조의 관계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도덕체계는 그 자체로서 아무리 정합적이고 바람직해 보이는 것일지라도 그것이 실천적 지침으로서 제대로 작동되고 기능을 수행할 수 있을 경우, 다시 말하면 그 체계의 현실적 적용가능성이나 실현가능성에 있어 하자가 있을 경우 사회윤리로서 무력하고 무의미한 것이 아닐 수 없다."
전통적 윤리와 덕 사상을 현대에 재현하기 위해서는 현대 사회의 제반사항에 대한 사회철학적 숙고가 전제되어야 한다. 말은 부드럽지만 단호하다. 황경식은 혁명을 상정하지 않고는 소규모 지역공동체에 기반한 덕성공동체를 조성해내지 못할 것이라 말한다. 혈연과 연고를 토대로 한 공동사회(Gemeinschaft)에서 형성된 전통적인 공화주의적 덕윤리의 퇴조는 온전히 자유주의 때문만이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오히려 거대하고 익명성이 강한 사회 가 도래하고 그 속에서 기존의 덕윤리, 공화주의적 에토스를 상실해버렸기에 이를 대체하기 위해 개인에 기초한 자유주의가 도입되었다고 보는 것이 맞을 것이다. 칸트, 밀, 롤스가 이런 사회를 포착한 자유주의의 대표적 사상가들이다. 즉 하부구조의 거대한 변화에 조응한 윤리체계가 자유주의인 것이다. 황경식은 이렇게 말한다."현대 사회의 구조에 대한 근본적 개혁이 전제되지 않거나 사회경제적 체제의 변혁이 가능하지 않는 한 규칙-의무의 윤리(자유주의윤리-필자주)는 현대사회의 주도적 도덕체계로서, 특히 성품-덕 윤리의 하부구조이자 기초질서로서 엄존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현대 사회처럼 복잡한 사회에서는 자유주의윤리가 불가피하다는 주장이다. 샌델은 자본주의가 조성하는 사회적 불안을 공화주의로 극복하자고 독려한다. 샌델의 공화주의에 대한 애착은 무언가 부족한 느낌을 준다. 기득권지배층이 설정한 적정한 선 이상을 넘지 않기 때문이다. 그의 말이다."케인스의 통찰은 해방적이면서도 우리의 정신을 번쩍 들게 만든다. 정치가 우선임을 주장하는 그의 통찰이 무엇보다 해방적이다."
그의 비전은 신자유주의를 대신해 케인즈주의를 재도입할 배짱있는 공화주의정치를 호명하는 선에 머무른다. 미국은 케인즈주의도 해봤고 신자유주의도 해봤다. 모두 실패로 끝났다. 미국은 현재 실질적 내전상태에 빠졌다. 사상가 백낙청은 남다른 관점을 제시한다. 백낙청은 김용옥과의 대담에서 미국 헌법의 창안자들은 "민주주의를 하지 않겠다는 분명한 의지를 가졌었다"고 말한다. 삼권분립, 상하원 양원제, 대통령 간접선거가 그런 의도로 만들어졌다. 인민의 바램이 여러 장치를 통해 구조적으로 왜곡되는 시스템을 만든 것이다. 이런 구조를 그대로 두고서는 개혁적 시도는 과두제로 귀착될 수밖에 없다. 미국 민주주의가 최종적으로 과두제로 귀착되는 메커니즘을 유지하는 한 거대 경제권력을 극복해낼 정치세력의 형성은 요원하다. 철학자 김용옥의 민주주의 비판은 더욱 급진적이다. 김용옥은 "민주라는 언어의 폭력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민주주의'라는 역사상 존재하지 않았던 개념에 매몰되면 그 개념이 만들어내는 중력장에서 허우적대게 되기 때문이다. 샌델의 공화주의가 조락해가는 미국과 세계의 민주주의에 희미한 빛이라도 비출 수 있을까? 필자는 쉽지 않을 것이라 판단한다. 그럼에도 샌델이 말하는 덕에 기초한 공동체의 건설은 매우 소중한 제안이라고 생각한다. 토착신학자 이은선이 말한 '조숙한 근대국가' 조선이 500년을 지속했던 것도 양반이라는 지식인지배층을 성리학이라는 윤리적 이념체계에 경도시켰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필자는 생각하기 때문이다. 책을 읽고 나면 이런 생각이 든다. 민주주의는 자본주의와 동행하기 참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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