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가부 존치·강화를 주장하는 여성들이 여가부 장관의 퇴진을 요구하는 데엔 이유가 있다. 김 장관은 지난해 5월 인사청문회 당시부터 "여가부 폐지 원칙은 변하지 않는다"라는 등 '여가부 폐지를 여가부 장관이 직접 추진하겠다'는 취지의 입장을 고수해왔다. (관련기사 ☞ '김현숙의 역설' … '여가부 폐지'로 여가부 기능을 강화하겠다?)
이날 현장을 찾은 오경진 한국여성단체연합 사무처장은 이에 대해 "(여가부 폐지 공약은) 여성운동과 수많은 시민의 힘으로 조금씩 진전시켜 온 성평등의 궤적을 한 순간에 원점으로 되돌리고, 나아가 그 근간을 흔들어놓겠다는 선언"이라며 "국가 성평등 정책을 총괄하고 이끌어야 할 정부부처의 수장이, 그 근간을 흔드는 일에 나서서 함께한 것"이라고 평했다.젠더 관점 소실된 김현숙 체제 … '글로벌 스탠다드'와 반대로?
취임 당시 김 장관은 여가부 폐지에 대한 야당 및 시민사회의 반발에 대해 "(여가부 폐지야말로) 여가부의 기능과 역할을 극대화하는 방향"이라고 대응하기도 했다. 그러나 국제사회의 여성·성평등 전담부처가 통상 설정하고 있는 '기능과 역할'은 국내에서 김 장관의 취임 이후 한 결 같이 내리막길을 걸었다. 1995년 전 세계 189개국 정부대표가 모여 선언한 '베이징 행동강령'은 성평등 전담부처의 주요 역할을 명시하고 있다. 강령에 따르면 국가는 "국가기구와 기타 정부기구를 설립하거나 강화"하여 "법률, 공공정책, 프로그램 및 사업 등 모든 정책과 프로그램에 젠더 관점이 반영되도록 도모"해야 한다.'김현숙 체제' 지난 1년 한국 여가부는 정반대의 길을 걸었다. 오 사무처장은 특히 "여가부 폐지 공약으로 대표되는 잘못된 정책 방향 아래, (지난 1년간) 각 부처·지자체 정책에서는 '여성'과 '성평등'이 급속도로 지워"지고 말았다는 점을 지적했다. (관련기사 ☞ 여가부 신년 업무추진계획 살펴보니 '젠더', '성평등' 사라졌다)
실제로 지난해 12월 여가부가 공개한 '제3차 양성평등기본계획안'에선 '여성폭력', '젠더폭력' '성별에 기반한 폭력' 등의 개념어가 일반 단어 '폭력'으로 대체되는 등 전반적인 젠더 관점의 약화가 관측돼 논란을 낳았다. 유엔(UN) 등 국제사회는 '여성폭력'을 "남성과 여성 사이 불평등한 권력관계의 표지"로서 일반적 폭력과는 다른 개념으로 규정하고 있다. 중앙부처의 '여성 지우기' 기조에 발맞춰 지자체도 움직였다. 강릉시, 거제시, 속초시, 서울시, 충척북도, 대구광역시 등 각 시도 지자체에선 여성정책을 담당하고 있던 전담 부서 혹은 추진체계가 다른 부서로 통폐합되거나 명칭이 수정됐다. 이정아 경기여성단체연합 상임대표는 이를 두고 "엄연히 중앙부처가 존재하고 있음에도 여성가족부폐지를 기정사실화하며 앞장서서 기존 부서명과 업무를 수정하거나 폐지하고 있는 것"이라며 "(성차별과 관련해) 무엇이 해결되었기에 정책과제에서 여성, 젠더, 성평등을, 심지어 성폭력, 가정폭력이라는 용어가 금기어처럼 되는 것인가" 꼬집었다. 국내의 이 같은 흐름에 대해 국제사회도 지속적인 우려를 표시하고 있다. 지난 1월 스위스 제네바에서 열린 4차 국가별인권상황정기검토(UPR) 한국권고 현장에선 미국·영국·캐나다 등 참여국들이 국내 여성가족부 폐지 이슈에 대한 우려의 뜻을 전한 바 있다. 그에 앞서 지난해 8월엔 아시아·태평양 지역 30개 국가 265개 여성단체 연합체인 '아시아·태평양 여성과 법 개발 포럼(APWLD)‘이 "(윤 정부의 정책 기조가) 가뜩이나 취약한 여성의 권리와 성평등 운동에 큰 위협이 되고 있다"는 공동 NGO 보고서를 유엔 인권이사회에 제출했다.지난해 6월 미국·영국·캐나다·호주·뉴질랜드 등 주한 5개국 대사와 김현숙 장관 사이 간담회에서는 필립 터너 주한 뉴질랜드 대사가 '독립부처로 운영되는 여성가족부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다'는 취지의 이야기를 김 장관에게 건넨 사실이 알려지기도 했다. (관련기사 ☞ "김현숙, '여가부 폐지' 합리화하려 뉴질랜드 대사 발언까지 왜곡")
오 사무처장은 "외신을 비롯한 국제사회, 유엔까지 여가부 폐지 시도를 한 목소리로 비판하고 있으나, 오직 정부만이 '구조적 성차별은 없고 여가부 폐지가 옳다'는 주장만 1년째 되풀이하고 있는 셈"이라고 평했다.'반 여성'에는 누구보다 적극적, '여성' 정책에 있어선 허수아비
정책적인 후퇴만이 아니다. 김 장관은 여러 여성폭력 사건의 국면마다 언론 인터뷰를 통해 "구조적 성차별은 없다"는 윤 대통령의 발언에 발맞춘 행보를 직접 보여 오기도 했다. 김 장관은 지난해 7월 인하대학교 성폭력·사망 사건 당시엔 "그건 안전의 문제지, 또 남녀를 나눠 젠더 갈등을 증폭시키는 건 절대 바람직하지 않다"라며 "디지털성범죄피해자지원센터의 남성 피해자 비율이 20%가 넘는다. 무조건 남성과 여성의 문제로 갈 게 아니"라고 답해 '성폭력의 구조적 성격을 부정한다'는 지적을 받았다. 이어 그해 9월에는 신당역 스토킹 살인사건과 관련해서도 "(신당역 사건을) 여성과 남성의 프레임으로 보는 것에 대해 동의하지 않는다"라며 해당 사건이 '여성혐오 범죄가 아니'라는 요지의 발언을 남겼다. 최나눔 한국여성의전화 여성인권상담소 정책팀장은 "(통계상) 대한민국 성인 여성 3명 중 1명은 살면서 한 번 이상의 여성폭력 피해를 경험한다. 대한민국 강력범죄 중 여성 피해율은 86%에 달한다"라며 김 장관의 해당 발언들이 "사건의 본질을 지우는 태도로 일관한 것"이라고 지적했다. 최 팀장은 또한 여가부가 "강간죄 구성요건을 현행 '폭행·협박'에서 '동의 여부'로 개정하는 '비동의 강간죄' 개정안을 검토하겠다고 발표했으나 법무부의 반대 의견으로 이를 철회"했고, 신당역 사건 이후 "정부와 국회가 쏟아낸 '스토킹처벌법' 개정안은 여전히 국회에 계류 중"이라며 "정부는 여성폭력 피해자의 인권 보장을 위해 무엇을 하고 있나" 묻기도 했다. 그는 대법원 양형위원회에 성폭력 무고죄 형량 강화 의견을 제출한 법무부에 대해서도 "협소한 성폭력의 정의로 인해 피해를 말하기 어렵게 만드는 사회구조를 유지하고 여성폭력 피해자를 불신하는 통념을 강화·확산하는 것"이라며 이러한 사안에 대해 여가부가 성평등 전담 부처인 여가부가 "여성폭력 피해자의 목소리를 듣고 분명히 그 소임을 수행"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윤석열 정부는 취임 당시 무고죄 강화와 성폭력 처벌 강화를 함께 제시하며 이른바 엄벌주의를 통한 피해자 보호를 피력한 바 있다. 그러나 여성가족부의 2023년 예산안에선 디지털성범죄 인식 개선 홍보예산이 전액 삭감되는 등 범죄방지·피해자보호 기조와 엇갈린 흐름이 이어졌다. 이에 여성들은 지난 2월 정부조직개편안의 수정 의결로 존치가 결정된 여성가족부가 '김현숙 체제'를 벗어나 성평등 강화라는 "본연의 책무를 다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이날 모인 여성들은 지난 2월 국회 행정안전위원회가 여가부 폐지안이 제외된 정부조직법 개정안을 의결한 일을 두고 "시민들의 힘으로 여성가족부 폐지를 막는 성과를 만들어 낸 것"이라며 "(앞으로) 국가는 성차별적인 한국 사회구조와 문화를 바꾸기 위해 적극적으로 나서야 하며, 따라서 여성가족부는 폐지가 아니라 강화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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