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POP에는 특정한 정서가 깊게 배어있다. K-POP의 대표격인 '방탄소년단'이 전하는 메시지의 핵심은 자기 자신을 사랑하자는 것이다. 그런데 K-POP의 자기는 늘 불안정하고 흔들리는 자아다. 방탄소년단 노래 '전하지 못한 진심'에는 이런 불안한 자아의 모습이 여실히 보인다. 전 세계 청년들이 K-POP에 열광하는 이유에는 훌륭한 퍼포먼스 역량도 있겠지만 불안한 자아를 공유한다는 동질감도 한몫을 차지할 것이다. 현대인의 고질병인 이 불안감은 어디서부터 생겨난 것일까? 현대인의 불안을 철학적 주제로 삼아 자신의 사상을 구축한 철학자가 있다. 현대 공동체주의를 대표하는 찰스 테일러다. 그의 책 <불안한 현대사회>(찰스 테일러 지음, 송영배 옮김, 이학사 펴냄) 를 펼쳐본다. 현대 사회의 불안은 어쩌다 생겨난 것일까? 테일러는 불안을 초래한 원인으로 개인주의를 든다. 개인주의의 등장에는 모순적 상황이 전개된다. 개인주의가 등장하기 위해서는 이전에 존재했던 개인을 둘러싼 의미망과의 단절이 필요했다. 테일러의 설명이다.(출처 미기재는 상기책에서 인용) "옛날에는 자신을 보다 더 큰 질서의 한 부분으로 간주하였다. 어떤 경우에 이 큰 질서는 바로 하나의 우주적 질서, 즉 '존재의 거대한 고리(great chain of Being-'존재의 대연쇄'로 번역되기도 한다-필자주)'를 의미했다." '세상만물이 서로 깊게 연결되어 있다'는 이 감각은 이전 사회에서 매우 소중한 것이었다. 신의 존재는 의심 받지 않았다. 나와 함께 세상은 신의 창조물이었다. 동양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선비들은 늘 솔개가 날고 물고기가 물위를 뛰어오르는 광경의 생생함을 뜻하는 연비어약(鳶飛魚躍)을 이야기하며 자연에 대한 숭고의 감정을 느꼈다. 학문으로서의 유학 이전에 세상의 근원으로서의 진리인 도(道)를 실감하는 것이 선비에게 중요했다. 전통시대 합리성의 끝판왕인 유교조차 세계를 수학적, 물리적 공간으로 인식하지 않았다. 선비에게 자연은 범신론에 가까운 신학적 대상이었다. 사실 연기법을 설하는 불교를 흡수한 유학이 신유학이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당연한 일이기도 하다. 테일러의 설명이다. "근대적 자유는 이런 질서들에 대한 부정을 통하여 생겨난 것이다." "이런 전통적 질서들은 우리의 자유를 제한했지만, 세계와 사회적 행위에 의미를 부여하는 측면도 가지고 있었다. (중략) 이런 전통적 질서에 대한 불신은 탈주술화라고 불려왔다. 이런 과정을 통하여 사물들은 그들에게 부여되었던 마력을 상실하고 만 것이다." 현실의 차등적 질서를 부정하면서 획득된 자유는 불가피하게 부작용을 동반했다. 세상이 나에게 주던 '의미'가 사라져버린 것이다. 천동설이 지동설로 바뀌면서 우주가 주던 의미감도 퇴락했다. 세계와 나 사이에 의미적 단절이 생겨났다. 전통 질서는 합리성에 기반하든 않든 간에 의미에 충만한 세상이었다. 근대는 생활 공간에서 의미를 하나씩 제거해나갔다. 베버가 말한 '탈주술화'였다. 충만했던 세상은 이제 합리성으로 재단된 밋밋한 세상이 되었다. 테일러도 개인주의의 폐해를 인정한다. "개인주의는 자기에 대한 집중을 수반하며, 동시에 종교적, 정치적 또는 역사적인 맥락에서 자기를 넘어서는 보다 더 중요한 문제들이나 의미를 아예 지워버리거나 전혀 의식하지 못하게 한다. 결과적으로 인생의 의미는 축소되거나 또는 단조로워지는 것이다." 그러나 개인주의를 거부하기만 하는 평론가들과 달리, 테일러는 개인주의가 만들어낸 불선(不当)으로부터 새로운 의미를 도출하고자 한다. 테일러는 자기실현의 개인주의 이면에 '도덕적 이상'이 움틀대는 것을 본다. 테일러는 현대 개인주의에서 두드러지는 스스로를 표현하고자 하는 특징에 주목한다. "자기 실현 뒤에 있는 도덕적 이상은, 이 단어를 현대의 문화적 맥락에 가장 충실하게 이해하자면, 자기 자신에게 진실하라는 이상이다." 그 특징을 테일러는 '자기 진실성(authenticity)'이라 정의한다. 테일러는 '자기 진실성의 윤리'의 기원을 찾아 거슬러 올라간다. 테일러에 따르면 자기 진실성의 윤리는 18세기 말에 생겨났다. 데카르트의 합리적 개인주의가 초기 형태였다. 데카르트가 사유를 통해 도달한 자아는 다른 대상들과의 연결이 끊어진 단독자였다. 이후 사회적 의무보다는 개인을 중시한 로크의 정치적 개인주의가 등장해 이 흐름을 이어간다. 자기 진실성의 윤리에서 획기적인 전환점은 18세기의 사유였다. 천부적으로 부여받은 인간의 직감 즉 도덕관념이 도덕의 근거가 되었다. 마침내 외재적 도덕규범 대신 인간의 내면이 도덕의 최종 근거가 되었다. 칸트의 후학이었던 헤르더는 이런 흐름을 결정지었다. 테일러는 헤르더의 사상을 이렇게 풀이하고 있다. "이제는 인간적일 수 있는 특정한 방법이 존재하며, 그것이 바로 나의 방식이다. 나는 결코 다른 사람의 것을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방식으로 내 인생을 살아가도록 소명받은 것이다. 내가 나 자신에게 진실하지 못하면 나는 내 인생의 요점을 읽어버리는 것이고, 인간답게 산다는 것이 결국 나에게 무엇을 의미하는가에 대해 파악하지 못하는 셈이다." 삶의 기준은 내 자신이며 누구나 자신만의 가치척도로 살아야 한다는 주장이다. "나만의 방식으로 살기"가 마침내 도덕적 이상이 되었다.
이제부터 문제가 발생한다. 사회는 공통의 윤리적 도덕적 기반이 있어야만 유지될 수 있다. 자기실현이 중요해져서, 공통의 토대가 사라지고 나서도 공동체는 유지될 수 있을까? 테일러는 정치한 논리를 전개해 개인주의의 대안을 찾기보다 개인주의 그 자체로부터 공동체의 새로운 근거를 확보하려 한다. 테일러에 따르면 개인주의에서 가장 중요하게 간주되는 "선택의 자유"는 다른 의미지평으로부터 단절되어있는 것이 아니다. 선택의 의미는 "선택한다"는 사실에서가 아니라 선택 이전에 설정된 의미지평으로부터 발생하는 것이다. 내가 채식주의를 "선택"한다고 해서 선택 자체가 의미를 창출하는 것은 아니다. 나의 선택 이전에 동물감수성과 생태학적 지구라는 의미지평이 있어야만 비로소 나의 선택은 "의미"를 가지게 된다. 부정적으로만 인식되던 자기 진실성에 의미지평이 연결되면서 공동체의 윤리적 근거가 새롭게 마련된다. 테일러는 "자기 진실성"을 이기주의로 거부하기보다 내용을 풍요롭게 채우자고 독려한다. 테일러가 이런 논리를 전개하는 이유는 분명하다. 현대 사회의 파편화, 원자화된 개인으로는 도구적 이성에 휘둘리는 공동체에 진정한 민주주의를 불러오기가 힘들기 때문이다. 테일러는 이렇게 우려한다. "국민의 대다수가 공동 기획의 틀을 짜고 그것을 수행해나갈 수 있다는 생각은 너무나 천진난만하고 실현불가능한 유토피아처럼 보인다. 그래서 사람들은 포기하고 마는 것이다. 함께 행동한 경험의 결핍은 이미 확신 없는 타인과의 공감적 연대를 더욱 약화시킨다. 공감할 수 있는 희망이 전혀 없다는 느낌은 그런 시도를 결국 시간 낭비로 보게끔 만든다. 이것은 모든 것을 희망 없는 것으로 만든다. 이렇게 악순환이 생겨나는 것이다." 테일러의 말은 공감적 유대가 있어야 유토피아를 향한 공동의 기획이 가능하다는 주장이다. '자기만의 삶'으로 보여질 수 있는 '자기 진실성'에서 도덕적 이상을 찾아내려는 테일러의 탐색에는 이런 의도가 밑바탕에 깔려있다. 테일러의 기대와 달리 개인주의로 사회를 재구성하기에는 역부족일지도 모른다. 테일러는 현대 개인주의가 표현주의를 낳았다고 본다. 테일러는 표현주의를 이렇게 정의한다. "우리 안에 있는 본원적·독창적인 것을 말이나 행동으로 표현함으로써 우리 안에 있는 존재가능성을 찾아내는 것이다." 이렇게 예술은 자기발견과 창조의 전범이 된다. 예술가를 영웅시하는 사회문화가 이런 심리적 습속 덕에 생기게 되었다. 그런데 표현주의는 헤겔이 인간사회의 본질적 요소라 본 '인정투쟁'과 맞물리게 된다. 개성의 표출을 강하게 옹호하는 표현주의는 계급갈등 이외의 항목들에 대해서 극단적 정서를 표출하는 것도 정당화한다. 이 지점에서 표현주의에 충실한 개인주의는 뜻하지 않게 페미니즘, 인종주의, 다문화주의, 동성애, 낙태 등을 둘러싼 문화전쟁으로 진행된다. 자신의 정체성을 강하게 주장하는 것이 정언명령으로 요구받는 세상이 된 것이다. 철학자 슬라보예 지젝은 책 <멈춰라, 생각하라>(주성우 옮김, 이현우 감수, 와이즈베리 펴냄)에서 이렇게 말한다. "자유주의자들이 가난한 자와의 연대를 주장하는 한편, 대립적인 계급 메시지로 문화전쟁을 코드화하는 방식이다. 다문화적 관용과 여성의 권리를 지지하는 이들의 싸움은 '하층계급'의 이른바 비관용, 근본주의, 가부장적 성차별주의와 대척점에 설 때가 많다." 문화투쟁이 늘어나면서 계급간의 경계선은 모호해진다. "페미니즘투쟁은 중상층계급이 가부장적이고 비관용적인 하층계급에 비해 우월함을 주장하는 이데올로기적 도구로 사용될 수 있다." 지젝은 왜 이렇게 문화전쟁에 대해서 예민할까? 그의 이어지는 말에 답이 있다. "지배계급은 포퓰리스트의 도덕적 의제에 동의하지 않으면서도 하층계급을 억제하는 수단으로서 '도덕적 전쟁'을 용인한다." 오해없기를 바란다. 필자는 여러 문화전쟁 페미니즘, 동성애, 낙태 등을 지지한다. 다만 현재와 같이 보편성을 기각한 각자도생의 서바이벌은 공동체를 결속시키보다는 분해하는 힘으로 작용할 가능성이 크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을 따름이다. 위화와 더불어 중국을 대표하는 작가 한사오궁은 책 <혁명후기>(백지운 옮김, 글항아리 펴냄)에서 이렇게 말한다. "민주주의라는 화수분에 대한 백화점식의 괴상한 신념은 제쳐두더라도, 한집안에서 아내가 여권을 주장하고 남편이 남권을 쟁탈하며 아들이 자녀권을 계산하고 할머니가 노인권을 주장한다면 (중략) 민주주의가 이런 것이라면, 그저 몇몇 고객으로 구성된 요란한 게임장이라면, 가족의 통합도 없고 책임지는 이도 없다면, 과연 민주주의에 운명공동체라는 중요한 전제가 있다고 할 수 있는가." 홉스가 말한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이 생존이 아닌 인정투쟁의 영역에서 벌어지는 상황이다. 분명한 사실은 이런 시기가 노동운동이 약화되고 빈부격차가 극심하게 벌어진 시기와 겹친다는 점이다. 만인의 만인에 대한 인정투쟁이 보편성으로 진화하지 못하고 개별적 이익추구에 머무르고 만 것이다. 테일러 철학에서 미덥지 못한 부분이 하나 더 있다. 테일러 사유에서 개인은 새로운 공동체를 구성하는 주체로 등장하는데 만약 그 개인이 시장경제에 상처받고 자본주의가 초래한 극단적 소외로 일그러진 개인이라면 어떨까? 이런 경우에 그 개인의 내면에 새로운 내용을 채우고서 건강한 공동체를 형상할 수 있을까? 건강하지 못한 개인이 건강한 내용을 자의적으로 받아들일까? 사회심리학자이자 사상가인 에리히 프롬은 책 <소유냐 존재냐>에서 이렇게 말한다. "경제적 변혁은 이를테면 새로운 윤리와 자연에 대한 새로운 태도와 같은 인간의 가치와 태도에, 혹은 나의 표현에 따르면 인간의 성격지향에 근본적인 변혁이 일어날 경우에 비로소 가능하다." 자본주의가 만든 권위주의적 소유지향형 성격의 인간은 인간성격의 변혁과정을 거쳐야 새로운 사회건설의 주체가 될 수 있다는 주장이다. 테일러와는 다른 관점이다. 필자는 분단 직후 북한에서 남한으로 탈출한 룸펜출신들 이야기를 여럿 들었다. 전언에 따르면 그들에게는 회의를 통한 설득작업이 무척 힘든 경험이었다고 한다. 일제시기 형성된 낡은 습속을 개선하려는 사회주의적 실험이 그들에겐 고통이었던 것이다. 일정 수준의 사회적 강제없이 개인들이 자발적으로 좋은 내용을 내면에 온축하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공동체주의자 테일러가 지지하는 개인주의는 바로 이 지점에서 현실적 한계에 부딪힌다. 개인은 주체가 되기에 너무 일그러져있다. 테일러의 사유는 일정한 한계에도 불구하고 개인과 공동체의 접합 가능성에 대한 통찰의 계기를 제공해준다. 현대의 개인주의는 이미 비가역적으로 압도적 수준에 이르렀다. 시대적 흐름의 불가피성을 인식하면서도 흐름의 방향을 돌려보려는 그의 철학적 분투에 경의를 표한다. 필자는 그의 개인에 기반한 공동체주의 기획이 미진한 것은 테일러 자신이 사회주의적 전망을 기각한 채 철학적 사유를 전개했기 때문은 아닐까 생각해본다. 자본주의의 본연성을 믿는 이에게는 희열을 사회주의의 당연성을 믿는 이에게는 살짝 아쉬움을 남기는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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