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범한 사람들의 욕심은 단죄하고 그들은 수혜를 본다
김남국 의원의 개인적인 불성실 문제는 이 사건에서 가장 낮은 층위다. 상임위 회의 시간에 거래를 했다거나, 재산신고 대상이 아니어서 누락됐다는 건 잘못이긴 하지만 사과로 넘어갈 문제일 수도 있다. 우상호 의원의 지적처럼 "의원직 사퇴까지 할 사안은 아니"고, "명백한 근거를 제시하지 않은 인격 살인적 의혹 제기"라고 할 수도 있다. 그 아래 층위에는 김남국 의원이 불법적인 부정부패를 저질렀다는 의혹이 있다. 내부 정보나 코인 자체를 불법적으로 취득했고, 그 대가로 코인 업계에 유리한 입법을 했다는 내용이다. 사실이라면 매우 큰 범죄이겠지만 아직 뚜렷하게 밝혀진 증거는 없다. 물론 극도로 위험성이 높은 투자 패턴이나 높은 수익률 등이 의심스러운 정황이 되긴 하지만, 코로나 시기 코인 시장이 하도 미쳐있어서 야수의 심장으로 겁 없이 투자하던 사람들이 워낙 많았고, 그 중에는 한 때 천문학적 수익을 올렸던 사람도 드물지 않으니 그 자체로 불법의 증거라고 하기엔 쉽지 않다. 여기까지는 경중의 차이는 있지만 어쨌든 김남국 의원 개인의 문제다. 김남국이 이럴 줄 몰랐다 하고 경중에 따라 꿀밤을 때리든 제명을 하든 하면 끝날 문제다. 그러나 가장 깊은 층위에 있는 최종 보스는 민주당의 정체성과 책임성에 대한 것이다. 이 층위에는 민주당이 지난 30년간 뭉갰던 신자유주의와 금융자본주의에 대한 불확실한 입장에 대한 환멸이 있다. 그리고 그 불확실한 입장 뒤에서 평범한 사람들의 욕심은 도덕적으로 단죄하면서, 국회의원 등 사회적 엘리트들만 수혜를 본다는 넓게 공유된 의심들이 있다. 서민적이고 오히려 약간은 경제적 수완이 부족한 이미지였던 김남국 의원의 코인 투자 의혹은 너무도 짠듯하게 이러한 의혹을 사실로 확증해버린 결정적 증거다. 민주당, 특히 86들은 더 갖기 위해 욕망하고 자기계발하는 것을 상찬하는 신자유주의 윤리에 대해 어떤 입장인가? 당장 더 갖기 위해 장기적으로 공동체가 유지되기 위해 필요한 모든 것들을 부수고, 이에 동참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무능력하다고 모는 신자유주의에 대해 민주당은 어떤 입장을 보여왔고 어떤 입장을 보여야 하는가? 심지어 신자유주의의 경제적 성과마저 저물면서, 서로를 대접하지 않아야 할 이유들만 찾는 악다구니 같은 혐오와 더 파괴적인 초고위험 투자들만 남고 있는 지금까지도 우리는 민주당과 그 주류의 86의 입장을 잘 모른다.사회경제적 쟁점에 무관심한 86, 86이 주류가 된 민주당
이 문제는 생각보다 오래된 문제다. 80년대 중후반부터 90년대 초반까지 최전성기였던 학생운동 세력은 90년 초중반 급격한 쇠퇴를 겪는다. 제도적인 민주주의가 자리 잡으며 국민들은 점차 선거를 통해 자신들의 욕구를 반영시키는데 주력했다. 1993년 문민정부가 출범하면서 학생운동이 대의민주주의 밖에서 싸울 영역이 극도로 축소되었다. 국제적으로도 1989년 독일 통일에 이어, 1991년 12월 사회주의 종주국인 소련이 붕괴하면서 현실 사회주의의 몰락이 분명해졌다. 1990년 9월 한국-소련 수교, 1992년 8월 한국-중국 수교를 맺으며 한국 사회도 빠르게 냉전질서에서 벗어나기 시작했다. 사회주의 몰락에 따라 체제 존립에 대한 불안을 심각하게 느낀 북한이 1992년부터 핵무기 개발을 본격화하면서 남북관계는 급속도로 냉각되었다. 86운동권의 리더들은 이 '대좌절의 시기'를 겪으며 제도정치권에 대거 진입했다. 그들은 제도정치권에서도 우리 사회의 근본적 모순을 해결한다는 목표 자체는 버리지 않았다. 그러나 민주화, 탈냉전 이후 그들의 정치적 목표는 정작 아주 벙벙한 것이 되어 버렸다. 사람, 인간, 정의 등 아주 추상적이고 모호한 개념들이 구체적인 정치적 목적을 대신하고 있다. 86들은 자신들만의 분명한 지향점을 갖고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지만, 도통 그 목표가 무엇인지는 굉장히 뿌옇게만 보인다."1999년에 새천년민주당의 창당 발기인으로 정치에 입문했습니다. 가장 가까운 친구들이 가장 염려하고 또 질타했습니다. 지금까지의 삶이 마치 정치의 길을 걷기 위한 경력 쌓기처럼 비쳐져서 심한 자괴감과 무력감에 휩싸일 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1987년과 지금의 이인영이 한 사람이라는 것만큼은 부정할 수 없습니다. 1987년 시청 앞 과장에 섰던 열정과 진정성은 지금도 아무런 흔들림이 없습니다. 정치에서 제 당당한 역할을 찾을 때까지 저는 결코 포기하지 않을 것입니다. 저는 지금도 스스로에게 묻습니다. 제가 선택한 길에서 저의 역할을 제대로 하고 있는지…. 그러면서 또 다짐해봅니다. 성숙한 개인, 따뜻한 공동체를 향한 나의 길을 묵묵히 걸어갈 것입니다." (이인영, <나의 꿈 나의 노래>, 이룸, 2007. 67쪽)
"우리에게는 꿈이 있었다. 현실을 변화시켜보겠다는 그 원대한 꿈은 부분적으로 실현되었다. 그러나 꿈을 포기할 정도로 완성된 것은 결코 아니다. 누구에게나 버릴 수 없는 꿈이 있다. 꿈을 버린 순간부터 우리는 사실상 죽어가고 있는 것이다. 나는 정의롭고 깨끗한 사회를 늘 꿈꾸어왔다. 그때 버릇처럼 말했었다. 우리 아이들에게만은 이런 사회를 물려주지 말자. 어두운 골방에서 경찰의 눈을 피해 시위 계획을 짜야 하는 세상, 최루탄 뽀얀 거리에서 짐승처럼 울부짖어야 하는 세상, 감옥에 끌려가 법정에서 부모님을 울게 만드는 그런 세상을 물려주지 말자. 나는 지금도 맑고 깨끗한 세상을 만들고 싶다." (우상호, <촌놈>, 두물머리, 2004. 269쪽)
스스로 정치인이 되어야 하는 이유를 말하는 이인영과 우상호의 논리는 놀랄 만큼 닮아있다. 그들에게 남아있는 정치적 목적을 이인영은 '성숙한 개인, 따뜻한 공동체'라고, 우상호는 '정의롭고 깨끗한 사회'라고 말한다. 미성숙하고 부정의한, 차갑고 더러운 사회를 바라는 정치인이 있을까? 아름답지만 추상적인 개념어를 독점하려는 그들의 욕심은, 두고두고 그들에게 동의하지 않는 유권자들이 마음을 돌릴 수 없게 하는 높은 장벽이 되었다. 목표의 모호함을 대체한 건 스스로에 대한 확신이었다. 그들은 스스로를 민족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자임한 존재라고 믿었다."우리 개개인은 현재는 다소 불완전하며 미래는 아주 불확실한 사람들일지만 모르지만 대중으로서의 386, 생활인 386들의 역사는 아주 낙관적이며 비전이 있다는 점을 다시 강조하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민주화운동의 3세대이면서 통일운동의 1세대이며, 우리 당대에 통일을 이뤄 통일 1세대가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더 많은 평화와 복지의 길을 위해 성실하게 노력하고 부지런히 일하며 정성을 다해 봉사하고 복무하는 전대협인의 길을 걸어가야 합니다." (이인영, <나의 꿈 나의 노래>, 205쪽)
모호한 비전을 자기확신으로 대체한 86들의 정치는 특히 사회경제적 쟁점에 대한 무능과 무관심으로 두드러졌다. 90년대는 80년대 영국과 미국에서 시작한 신자유주의적 변화가 전 세계적으로 확대되던 시기였다. 특히 한국에선 신자유주의적 변화와 독재 정권의 관치 경제에서의 탈피가 동시에 진행되었다. 신자유주의적 변화는 IMF 외환위기 이후 더 본격화되지만, 김영삼 대통령부터도 '세계화'를 주장하며 한국경제의 체질 개선을 추진했다."기존의 사회구성체 논쟁의 연장선에서 한국 자본주의의 발전단계를 규명하는 것은 더는 가능하지도 않고 바람직하지도 않습니다. 매판성, 독점성을 핵심으로 그 내면에 착취와 수탈의 메커니즘을 폭로하고, 이에 복무하는 권력의 파괴와 새로운 건설이라는 논리적 메커니즘은 지금 이론적 무기로서의 효용성을 잃었습니다. (중략) 이른바 자본주의의 법칙적 발전과 필연적 소멸논리는 우리의 나침반과 지도로서의 기능을 상실했습니다. (중략) 그러나 어찌되었든 우리는 이 현상을 구조적으로 진단하고 새로운 해법을 구할 새로운 인식론을 마련해야 합니다. (중략) 형용모순 같지만 지나온 길을 돌아보고 새로운 성찰을 통해 열심히 걷는 인간의 얼굴을 한 따뜻한 시장경제, 아름다운 시장경제의 모습을 보고 싶습니다." (이인영, <나의 꿈 나의 노래> 189쪽)
86들이 제도 정치권에서 활동한 지난 30년간 한국 사회의 가장 큰 갈등은 신자유주의적 정책의 작용과 반작용이었다. 이 문제에 대해 86들은 경쟁에서 최종적으로 낙오한 사람들을 위한 최소한의 안전망이 있어야 한다는 것 외에 대체로 뚜렷한 입장이 없었다. 물론 이런 문제는 이 시기 전 세계 자유주의 정당들이 어느 정도는 겪어야 했던 혼란으로, 한국 민주당만의 문제는 아니었다. 하지만 특히 계속 '빨갱이'라는 비판에 시달려야 했던 86들은 스스로 얼마나 중도적인 사람인지를 계속 증명해야 하는 상황에 처했다. 게다가 86 스스로도 변혁에 대한 욕망과 신자유주의적 실천으로 분열된 자아를 통합하는 데 끝내 실패했다. 핵심적인 사회경제적 갈등에 대해 개입하지 못할수록 그들은 민주-반민주 전선에 더욱 집착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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