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아무리 생각해도 징역 10년 살 행동을 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게 통했는지 7년 형으로 감형되었다. 이에 나는 상고를 해보았자 별 소용이 없다고 생각하고 상고포기를 해버렸다. '까짓 것 7년 살고 말지' 하는 배짱이었다. 그러자 형이 확정되어 영등포 교도소로 이감되어 출역(出役)하게 되었다. 내가 일하는 공장은 헝겊을 오려 '뻥튀기꽃'(수국꽃)을 만드는 조화(造花)2공장이었다. 여기서 나는 공범인 백영서, 김학민, 최민화 등과 함께 징역을 살고 있었다. 그런데 유신독재 정권은 한국의 인권상황이 극도로 악화되었다는 세계 여론에 밀려 1975년 2월 15일. 긴급조치4호 위반자 중 인혁당 관계자와 이현배, 유인태, 이강철, 김효순 등 졸업생 몇 명만 남겨두고 재학생 전부와 박형규 목사, 김지하 시인 등 재야인사 모두를 형집행정지로 석방하였다. 출소해 보니 수감자 중 대법원에 상고한 사람들은 서류가 법원에 갔다 와야 하는 형식적인 절차가 복잡해 미처 석방되지 않았다. 그리고 이틀 뒤인 17일 저녁에 출소한다는 소식이 텔레비전 뉴스에 나왔다. 그래서 나는 '공범들'의 석방을 맞이하러 서대문 교도소로 갔다. 그때 나는 감옥 안에서 말로만 듣던 지하철을 처음 타보았던 것이 기억에 깊이 남아 있다. 그날 저녁 일찍부터 현저동 서대문 구치소 앞에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가족들은 물론이고 재야인사들로 가득했다. 나처럼 갓 출소한 '빵잽이'들은 빡빡머리 아니면 모자를 쓰고 있었다. 당시 나는 모자도 쓰지 않고 다녔는데 키가 큰 바람에 나의 빡빡머리는 유난히 눈에 띄었던 모양이다. 구치소 문이 이제나저제나 열리기만 기다리는데 내 곁에 있던 한 중년의 신사분이 내게 말을 걸어왔다."이번에 출소했소?"
"예, 서울 문리대 미학과 학생입니다."
"거, 고생 많았소."
"선생님은 누구신가요?"
"나, 리영희라고 하오."
"예에? 선생님! 반갑습니다. 교도소 안에서 선생님의 <전환시대의 논리>를 세 번 읽었습니다."
리영희 선생의 <전환시대의 논리>는 1974년 6월에 나온 것으로 알고 있다. 그리고 내가 그 책을 받아 읽을 수 있었던 것은 도서 열독이 허가된 그해 11월이었다. 여동생이 황석영의 <객지>와 함께 보내주었는데 <객지>는 감방 잡범들이 돌려보느라 표지가 다 떨어질 정도였지만 <전환시대의 논리>는 내 손에서 한 달간 떠나지 않았다. 사실 내가 리영희 선생을 글로 처음 만난 것은 군에 있을 때인 1972년 여름, <창작과비평>에 실린 <베트남전쟁(I)>이었다. 이 글은 내게 세상을 보는 눈을 열어준 잊을 수 없는 글로 되었다. 지금은 그 내용을 다 잊어버렸지만 내 눈에 씌워 있던 모든 편견의 장막을 걷어버렸다는 통쾌감만은 가슴에 깊이 박혀 있다. 그래서 리영희 선생은 나의 어느 선생님보다도 내 마음속의 은사로 되어 있었다. 교도소 안에서 읽은 <전환시대의 논리>는 다시 내게 사물을 바라보고 세계를 인식하는 방법에 대해 많은 것을 가르쳐주었다. 같은 조화공장에 일하던 백영서와 이 책에 대해 참으로 많은 감동을 나누었다. 교도소에서의 독서가 얼마나 진지할 수 있는가를 생각한다면 이 책에 대해 홋날 다른 후배들이 갖던 의미보다 더했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리영희 선생님께 한번 찾아뵙고 싶다고 했더니 선생님은 아무 때나 놀러 오라고 하시며 전화번호를 알려주셨다. 그리하여 일주일쯤 뒤 나는 백영서와 함께 제기동 한옥으로 선생님을 찾아뵈었다. 선생님은 우리를 반갑게 맞이하시며 안방을 향해 사모님께 큰 소리로 외치셨다."여보, 여기 이번에 고생하고 나온 분들 오셨으니 어서 술상을 내오시오."
사모님이 차려오신 술상 앞에서 우리는 선생님의 따뜻한 위로와 진지한 인생 사회 철학을 들었다. 2.이렇게 나는 감옥생활 11개월 만에 자유의 몸이 되었다. 그러나 내 처지란 대학 졸업은 못하였고 형집행정지로 요시찰의 대상이 되어 매달 동향보고를 쓰는 담당형사를 만나는 상태라 무얼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무엇보다 부모님 뵐 면목이 없었다. 그래서 백기완 선생의 주선으로 강민 시인이 편집국장으로 있는 금성출판사에 취직하여 일상을 살아가면서 내가 구속됐을 때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50일 동안 구류를 살았던 사랑하는 애인과 결혼하여 오붓이 살기로 마음먹었다. 부모님의 허락을 얻은 나는 결혼식을 준비하면서 주례 선생으로 장준하 선생을 모실 생각이었다. 당시 나는 면목동 장준하 선생 댁에 자주 드나들어 장남인 장호권 형과도 가까이 지냈다. 그런데 그해 8월 17일 장준하 선생은 의문사로 돌아가셨다. 결혼 날짜가 다가오는 나로서는 난감했다. 그래도 나는 주례 선생님만은 인생의 사표로 삼을 분을 모셔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떠오른 분이 리영희 선생이었다. 그러나 나라는 인간은 학생운동을 하다 감옥을 살았다는 것 이외에는 내세울 것이 아무 것도 없었고 선생님과는 한 번 찾아뵈었다는 인연밖에 없으며 또 선생님은 당시 47세로 나이가 젊어서 거절하실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서도 용기 내어 제기동으로 찾아뵙고 주례를 부탁드렸더니 뜻밖에 흔쾌히 승낙하시며 안방을 향해 사모님을 불렀다."여보, 유군이 결혼을 한다는구려. 술상 좀 내와요."
나중에 알고 보니 선생님께서는 항상 술상을 내올 명분을 그렇게 강조하시곤 한 것이었다. 사모님은 그놈의 술 좀 작작 마시길 바랐고, 선생님은 항시 구실을 찾곤 했던 것이다. 사모님께서는 술상을 내오며 내게 축하한다는 인사말을 잊지 않으시면서 술상의 안주 그릇을 가지런히 놓으며 지나가는 얘기로 이렇게 말씀하셨다."엊그제만 해도 새장가 갈 판에 무슨 주례냐고 거절하시더니 어떻게 마음을 바꿔 잡수셨수?"
"그때는 그랬었지."
나는 그제야 선생님의 첫 주례가 나인 줄 알았다. 며칠 후 나는 내 처 될 사람과 함께 주례 선생님 댁에 인사드리러 갔다. 당시 관례에 따라 와이셔츠와 넥타이를 사 갔는데 사모님께서는 선생님 목과 팔 사이즈를 꼭 맞추었다며 역시 미학과 출신답다고 칭찬해주셨다. 그때 다른 한 쌍의 젊은이가 찾아와 우리는 이내 자리를 비켜주고 일어났는데 그는 바로 선생님의 글 <농사꾼 임군에게 보내는 편지>의 '임군'으로 나보다 일주일 뒤에 결혼을 하게 되어 인사온 것이라고 했다."인생을 뜻있고 선이 굵게 사는 사람은 자잘한 것에는 잔신경을 쓰지 않는 것으로 생각되기 쉽지만, 매사에 정확하고 성실하고 섬세한 사람이 선이 굵고 멀리 볼 수 있는 법입니다. 신랑, 신부는 시간을 지킨다는 작은 일부터 소홀히 하지 말고 먼 곳을 생각하기 바랍니다.
그리고 두 사람이 살다보면 의사결정에서 의견이 달라질 때가 있습니다. 남자와 여자의 판단이 다를 때 작은 일은 남자 쪽이건 여자 쪽이건 어느 것을 따라도 무방할 것이니 서로 양보하는 미덕이 해결해줄 것입니다. 그러나 결정적 순간의 큰 일에서 의견차가 생긴다면 신랑은 반드시 신부의 의견을 따르기 바랍니다. 이것은 인생의 선배로서 경험적으로 드리는 충고입니다."
나는 이 충고를 항시 잊지 않았다. 내 인생에는 두어 번 큰 갈림길 같은 것이 있었을 때 나는 내 처에게 판단해줄 것을 물었고 그때마다 그녀의 판단에 따랐다. 한 번은 내가 <계간 미술>을 떠나 어느 대학 교수로 발령받고 신원조회에 걸려 하루 만에 취소되었을 때다. <계간 미술>로 바로 복귀할 수도 있었고, 또 그곳은 내게 3개월간 월급을 주며 기다렸다. 그러나 나는 '미술평론가로 살려면 백수가 될지언정 그곳을 나와야 한다'고 생각했다. 안정된 직장과 불안정한 프리랜서 중 어느 것을 택할 것인가에서 나는 주례 선생님의 충고대로 내 처의 판단에 맡겼다. 내 처는 "직장에서 나와도 당신은 나를 굶기진 않을 것 같다"며 내 길을 가게 해주었다. 사실 그때 아내가 막는다고 내가 직장으로 돌아갈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주례 선생의 충고에 따랐기 때문에 우리 집에는 그로 인한 마찰도 없었고 아내는 나의 어려운 처지를 항시 이해해줄 수 있었던, 일종의 삶의 슬기로운 형식 하나를 갖춘 셈이었다. 나의 결혼식에는 잊을 수 없는 하나의 기념품이 있었다. 그것은 '혼인서약'이다. 지금은 없어졌지만 그때는 '성혼선언문' 이외에 '혼인서약'이라는 것이 있었다. 일종의 맹세로, 군인의 맹세, 혁명공약, 국민교육현장 등의 연장선상에 있는 형식적인 서약인데 그 문장은 어디나 똑같다. 신랑 유홍준 군과 신부 최영희 양은 어떠한 경우라도 항시 사랑하고 존중하며 진실한 남편과 아내로서의 도리를 다할 것과 어른을 공경하고 나라에 공헌할 것을 맹서합니까? 기쁠 희(囍)자를 윗단 가운데 두고 봉황새가 좌우로 장식되어 있고 아랫단에 무궁화꽃이 무늬로 그려 있는 이 혼인서약서는 두꺼운 판에 파란 우단으로 덮여 성스럽게 신랑, 신부에게 전달하게 되어 있다. 물론 거기에는 '1975년 9월 27일 주례 리영희'라는 사인이 들어 있다. 그런데 나중에 신혼여행에서 돌아와 이 '혼인서약'을 펼쳐보니 주례 리영희 선생은 혼인서약 문장 중 '나라'라는 단어를 두 줄로 긋고 '사회'라고 교정보아 놓았다. 만년필로 '사회'라고 고쳐 쓴 것이었다. 신혼여행을 다녀온 뒤 제기동으로 선생님을 찾아뵙고 인사드리면서 '혼인서약서'에 단어 고친 것을 물었더니 이렇게 말씀하셨다."그게 그거일 수 있으나, '나라'라는 말에는 파쇼 냄새가 나지만 '사회'라는 말에는 인간의 윤리가 살아 있다는 차이 아니겠어."
아! 나는 이런 분의 주례로 결혼했다. 이것이 나의 복인가, 아니면 내 생의 부담인가. 그것을 나는 아직도 분명히 가늠치 못한다. 다만 주례 선생님께 변함없는 존경과 감사를 드리며 살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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