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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림 '페미사이드'에도 여성 밤거리가 안전? 어디에도 '젠더'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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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신림 '페미사이드'에도 여성 밤거리가 안전? 어디에도 '젠더'가 없다 [해설] 엄벌도 치안도 여성폭력 막을 수 없다면, 답은 성평등

"강간하고 싶어서 범행 했다"

신림 공원 강간살인 사건의 가해자 최윤종 씨(30)는 지난 17일 진술과정에서 자신의 범행동기를 이렇게 밝혔다. 즉 최 씨는 '여성을 강간하기 위해' 흉기를 이용해 피해자를 폭행했다. 그 과정에서 의식불명에 이른 피해자는 지난 18일 끝내 사망했다. 경찰은 강간치상에서 강간살인으로 혐의를 변경했고, 23일 사건을 중대한 흉악범죄로 분류해 최 씨의 신상을 공개했다. 중대범죄에는 대책 마련이 따른다. 공은 국회와 행정부로까지 넘어갔다. 22일 국회에서 열린 '묻지마 흉악범죄 대책 마련 당정협의회에서 박대출 국민의힘 정책위의장은 △지난 7월 일어난 신림역 칼부림 사건과 △지난 3일 일어난 서현역 칼부림 사건에 이어 △17일 일어난 '대낮 성폭행살인'(신림 공원 강간살인)을 당정협의회의 주요 키워드로 꼽았다. 이날 박 의원에 따르면 윤석열 대통령 또한 이 같은 흉악범죄들에 대한 근본적 대책 마련을 지시했다. 윤 대통령은 "일련의 흉악범죄 사건들이 보다 심층적인 사회병리적 원인을 가지고 있다"고 시사했고, 이에 당정은 이날 "묻지마 흉악범죄의 근본적, 심층적 대책은 은둔, 빈곤, 정신질환관리 등 사회병리적 차원까지 포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신림동 등산로 성폭행 사건의 피의자 최모씨가 19일 서울중앙지법에서 열리는 영장실질심사를 위해 관악경찰서를 나서고 있다. ⓒ연합뉴스

신림 사건 대책에 '젠더'가 없다? 전문가들 "전형적인 '여성폭력' 범죄인데"

이날 당정협의회의 결론에 특이한 점이 있다. 먼저 남성 가해자가 강간을 목적으로 여성 피해자를 살해한 전형적인 페미사이드(여성살해) 범죄를 '동기를 알 수 없는' 이상동기범죄로 분류했다는 점이다. 강간은 자체로 목적성을 가진 범죄행위다. 우발성이나 계획성을 따지는 것을 넘어 강간의 동기 자체를 '알 수 없다'고 표현하는 것엔 어폐가 있다. 여기서 연쇄적인 문제가 발생한다. 비 면식범의 소행이라는 공통점을 통해 강간살인 범죄와 무차별 흉기난동 범죄를 '이상동기 범죄'로 한 데 묶으니, 해당 범죄들의 '심층적 원인'을 언급하면서도 '젠더' 언급은 일절 나오지 않는다. 2022년 경찰청 통계 기준 강간범죄는 전체 피해자의 97.1%가 여성이고 전체 가해자의 98.4%가 남성이다. 수치상으로만 봐도 '성별화'된 범죄인데, 막상 그 대책에선 성별에 대한 고려가 빠진 셈이다. 전문가들 사이에선 "국가가 문제의 본질을 외면하며 근본적인 원인 해결에 다가가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송란희 한국여성의전화 상임대표는 <프레시안>과의 전화 인터뷰에서 "최근의 사회 분위기상 해당 사건을 신림역·서현역 사건과 묶는 것도 이해는 간다"라면서도 "그러나 엄밀히 말해 이번 신림 공원 사건의 경우 너무나 전형적인 여성폭력 범죄다. 오히려 '인하대 성폭행·사망 사건'이나 '신당역 여성살해 사건'과 동일한 선상에 놓고 봐야 한다"라고 지적했다. 성폭력 전문 변호인 이은의 변호사 또한 "이번 사건은 가해자가 불특정 피해자를 골랐다는 점에서 무차별(이상동기) 범죄 경향을 가지고 있지만 동시에 여성 대상 혐오범죄, 즉 여성폭력 범죄의 성격도 가지고 있다"라며 "범죄를 하고 싶은 대상, 범죄를 할 수 있는 대상 계층이 따로 있다면 그것은 차별범죄고 혐오범죄"라고 말했다. 국제연합(UN)은 '여성폭력'을 "남성과 여성의 권력 차이"에서 비롯하는 젠더 기반 폭력(Gender based violence)으로 정의하고 있다. 이때 범죄를 유발하는 '남성과 여성 간의 권력 차이'란 개개인이 소유한 권력을 넘어 사회·경제·문화적으로 성별화된 지위의 개념을 포괄한다. 가령 여성을 성적인 대상으로 물화 또는 대상화하는 사회적 경향성은 강간 등 성폭력의 발생에 직간접적 영향을 끼치는 대표적인 권력구조로 꼽힌다.

어떤 폭력이 성별 등 사회적 조건에 대한 구조적 차별에서 기인하고 있다면, 그 해결이나 완화 또한 구조적인 수준에서 이뤄져야 한다. 전 세계 여성폭력 범죄 대응을 위해 구성된 유엔(UN) 스포트라이트 이니셔티브(Spotlight Initiative)의 경우 '성평등 구현'을 구체적인 목표로 설정하고 각 국가의 교육 및 시민사회 역량강화에 재원을 쏟아붓는다. (관련기사 ☞ 국제무대에선 "여성인권 증진" 외치는 한국, 국내에선 "안티 페미 대통령"?)

국내 여성계 또한 "위계적이고 차별적인 문화, 아무렇지 않게 여성을 대상화하는 문화, 성적'농담'과 '가벼운' 추행은 별일 아니라고 여기는 분위기, 불법촬영과 성폭력이 일상화되고, 누군가의 피해를 조롱하고, 외면해온 현실"(한국여성민우회) 등이 '여성폭력의 구조적 원인으로 작용하고 있다'고 지적해왔다.
▲18일 오후 지난 17일 성폭행 사건이 일어난 서울 관악구 신림동 소재 야산 현장(왼쪽) 모습. ⓒ연합뉴스

'치안활동 개선', '엄벌주의 강화'만으로 여성폭력 완화가 가능할까?

송 대표는 특히 '젠더' 관점을 배제한 당정 등의 대책이 폐쇄회로(CC)TV 확충 등 물리적 수준의 치안환경 개선에만 머무는 것에 아쉬움을 표한다. 실제 당정협의회 끝에 나온 '범죄발생억제방안'은 자율방범대 활성화 및 CCTV 확충 등에 집중되는 모습을 보였다. 서울시와 25개 자치구가 모여 진행한 관련 긴급회의 또한 마찬가지다. "당장의 막을 수 있는 범죄를 막고 시민불안감을 완화하기 위해 물리적 환경 개선도 물론 신경 써야 할 일"이다. 그러나 CCTV가 설치된 곳에서도 '서면 돌려차기 사건'은 일어났다. 전자발찌를 훼손한 전과범이 2명의 여성을 살해한 '강윤성 사건'이 지난 2021년의 일이다. 때때론 경찰의 스마트워치를 지급받은 여성조차 스토킹 살인의 피해자가 된다. 송 대표는 당정이 내놓은 정신질환자에 보호강화 방안에 대해서도 "강간, 페미사이드 등 수많은 여성폭력 범죄자 중에 정말로 '정신질환'인 사람이 도대체 몇 명이나 있었나" 되물으며 "일부 특이한 '위험군'을 관리하겠다는 방식의 대책은 여성폭력에 대한 근본적인 대책이 전혀 될 수 없다"고 강조했다. 특정 개인의 정신질환 이력만을 강조하거나, '가해자 최 씨는 은둔형 외톨이', '성관계를 가져보지 못했다'라는 등 가해자의 개인적 서사에 주목하는 일은 오히려 "가해자 개인만을 악마화할 수 있다는 점"에서 대중의 범죄 인식에 악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말이다. 이소희 한국여성민우회 성폭력상담소장은 <프레시안>과의 지난 인터뷰에서 "특히 성폭력의 경우 '강간문화'와 같은 사회문화적 조건 아래 발생하는 것"이라며 "(개별 사건에 있어) 사건의 실체를 파악해 가해자의 죄를 엄밀하게 묻되, 성폭력 문제를 '악마같은 가해자 한 명'만의 문제로 인식해선 안 된다"고 지적한 바 있다.

'강간문화'란 성폭력이 만연하고, 또 만연할 수 있게 하는 사회적 경향성을 설명하는 사회학적 개념이다. '성폭력 피해자에 대한 비난', '성적 대상화 문화', '성폭력 범죄가 빈번히 발생한다는 사실에 대한 부정' 등은 강간문화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요소로 꼽힌다. 이번 신림 사건의 유가족 또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여자 혼자 그 시간에 왜 운동하러 가냐"는 등 피해자를 비난하는 2차 가해 문화로 인해 고통을 받고 있다고 호소했다. (애초 피해자는 운동이 아닌 출근길에 변을 당했다.)

이 변호사는 "이 같은 흉악범죄에서 집중해야 할 것은 가해자의 비루한 욕구가 피해자에겐 어떤 심대한 피해를 입혔는지에 대한 것이고, 또한 이 같은 피해를 막아내기 위해 정치·사법 등은 무엇을 해야 할지 고민하는 일이다"라며 "가해자 개인에 방점이 찍히고 관심이 몰리게 한다는 점에서는 가해자 신상공개 등의 조치도 일부 역효과가 있다고 본다"고 말했다. 당정이 강조한 엄벌주의 강화에 대해서도 '능사는 아니'라는 의견이 나온다. 이 변호사는 특히 "대중의 관심이 쏠리는 일부 사건에 대해서만 방어적인 형태의 엄벌주의를 외치는" 수사·사법기관의 태도를 경계했다. 수사, 기소, 재판 전 과정에 차별적인 관행이 녹아있는데, 지금 한국사회에선 "잠시 들끓는 여론을 특정 사건에 대한 보여주기식 엄벌 적용으로 잠재우고만 있다"는 것이다. 가령 한 남성이 피해 여성을 강간할 목적으로 중상해를 입힌 사건인 서면 돌려차기 사건의 경우, 애초 1심에서 적용되지 못한 '강간' 혐의가 여론의 관심을 받으며 2심에선 극적으로 적용된 바 있다. 이 변호사는 "강간의 정황은 애초부터 드러났지만, 강간의 '고의성'을 보수적으로 판단해온 사법부의 관행이 검사 측의 기소를 방어적으로 만든 사례"라며 "여론의 관심 속에서 결국은 엄벌이 적용됐지만, 비슷한 수많은 다른 사건들은 어떻겠나" 되물었다.

특히 한국은 여성 등 사회적 약자에 대한 '혐오' 동기를 양형요소로 고려하고 있지 않다. 강간 등 여성폭력범죄는 불기소율도 커 수사과정에서부터 배제되는 경우도 많다.(관련기사 ☞ '비동의강간죄' 토론하자는 한동훈, 이미 틀렸다) 결국 "피해자가 죽거나 불수가 되어야만, 혹은 언론을 통해 화제가 되어야만 범죄의 동기를 심각하게 들여다보는" 경우가 증가한다. 이 같은 관행으로는 "혐오범죄를 저지르면 엄벌을 받는다는 사회적 개념 자체가 탑재되기 어렵다"는 것이 이 변호사의 지적이다.

▲오세훈 서울시장이 18일 오후 성폭행 사건이 일어난 서울 관악구 신림동 소재 야산 등산로를 찾아 근처 CCTV 위치를 확인하고 있다. ⓒ연합뉴스

"여성 밤거리 안전했는데 최근 위협당해"? … 얼마나 더 죽어야 '젠더문제' 인정할까


"여성이 밤거리를 안전하게 걸을 수 있었다."

22일 당정회의와 23일 지자체회의에선 같은 요지의 발언이 나왔다. 박대출 의원은 "한국은 여성이 밤거리를 안심하고 걸을 수 있었던 나라"라고, 오세훈 서울시장은 "서울은 여성이 혼자 걸어도 안심할 수 있는 도시로 유명했다"고 각각 말했다. 본래 여성의 보행환경은 안전했지만, 최근의 '비정상적' 사건들로 그 '정상성'이 흔들리고 있다는 말로 풀이된다. 결국 이번 사건 또한 ‘비정상적인 개인의 일탈적 행위’였다는 게 당국이 보여주는 인식이다. 당국의 이 같은 관점은 앞서 지난해 인하대, 신당역에서 발생한 두 건의 페미사이드 사건에 대한 김현숙 여성가족부 장관의 발언으로도 이미 확인된 바 있다. 김 장관은 당시 일련의 사건들에 대해 '젠더 관점으로 보면 안 된다'는 인식을 일관되게 보였다. 여가부는 이번 사안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사항은 해당 부서에 확인한 후 말씀드리겠다"(21일 여가부 정례브리핑)라고만 답하기도 했다. 여가부는 여성폭력 관련 정부의 대응을 총괄해야 할 성평등 전담부처다.

여성들은 피로감을 느낀다. "아무런 학습 효과도, 성의도 없이 반복하는 정책이 무엇을 방지할 수 있는지 의문"이라는 것이다. 서울시와 국민의힘은 '본래는 여성의 밤거리도 안전했다'고 주장하지만, 신림 사건이 일어나기 불과 이틀 전인 15일에도 전남 목포의 도심 상가 화장실에서 여성이 살해당했다. 서울 금천구의 교제살인이 지난 5월의 일이다. 같은 달 여성을 타깃한 이상동기 폭행범죄는 언론에 소개된 것만 4건이 넘었다. (관련기사 ☞ 계속되는 무차별 여성폭행 … 여성은 '때리고 싶고, 때릴 수 있는' 존재?)

송 대표는 "여성문제를 여성문제라고, 젠더문제를 젠더문제라고 인정하지 않는 정부당국의 '메시지'는 앞으로의 여성폭력 범죄에도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할 것"이라며 우려를 표했다. 특히 '여가부 폐지'를 전략적으로 활용해온 윤석열 정부 아래에선 "명백한 여성문제에 있어서도 '여성'에 방점을 찍는 것에 (각 기관 등이) 노골적인 반감을 표현하고 있다"는 진단이다. 송 대표는 "혐오와 차별은 결국 사람이 바뀌어야 하는 일"이라고 강조한다. 사회 전반에서 여성폭력 범죄를 감소시키기 위해선 "결국은 근본적인 이야기를 할 수밖에 없다." 그 시작이 정치적 메시지에 있다. 신림 사건과 같은 사례를 '여성폭력'으로 호명하는 것, 여성폭력이 구조적 문제에서 비롯됨을 인정하는 것, 그 구조적 문제에 단호히 대처하겠다고 선언하는 것. "그렇게 강력한 메시지를 전파함으로써 사회 전반에 영향을 행사해야 한다." 다만 현재의 정치는 오히려 '구조적 차별은 없다'는 구호를 전제한 듯 "문제에 눈 감고 있다." 가령 국민의힘 최인호 관악구의원은 사건 발생 지역인 관악구에서 '남성 역차별'을 주장하며 여성안심귀갓길 폐지를 홍보해 논란이 됐다. 23일 긴급회의에서 '사건 전만 해도 여성은 안전했다'는 식으로 통탄한 오세훈 서울시장 역시 이와 비슷한 일을 한 적이 있다. 오 시장은 2009년 여성폭력 방지를 외치며 자신이 직접 만든 여성전용주차장을 올해 가족배려주차장으로 전환했다. 2021년 기준 경찰청 통계상 주차장에서 일어나는 강력범죄의 70%는 여전히 대표적인 여성폭력인 성범죄였지만 그에 대한 대비책은 논의되지 않았다. 송 대표는 "여성안심귀갓길이나 여성전용주차장 모두 실효성 측면에서 논의돼야 할 필요는 있을 것이다. 그런데 최근 이러한 정책들에서 '여성'이 빠질 때에는 이게 마치 여성을 우대하는 정책인 것처럼, 남성을 차별하는 정책인 것처럼 포커스가 맞춰진다"라며 "이러한 태도들은 결국 여성폭력 범죄의 현실을 부정하는 메시지가 된다"고 강조했다. 정반대의 메시지가 필요한 때다. 한국여성의전화, 한국성폭력상담소 등 여성단체들은 신림 사건에 대한 추모의 뜻을 모아 24일 오전부터 '공원 여성살해 사건 피해자 추모 및 여성폭력 방치국가 규탄 긴급행동'에 나선다. 이들은 2016년 강남역 여성살해 사건 당시 이미 여러 번 등장했던 구호를 추모 논평의 앞단에 다시 꺼냈다. "끊임없이 말해왔다, 성평등해야 안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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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예섭
몰랐던 말들을 듣고 싶어 기자가 됐습니다. 조금이라도 덜 비겁하고, 조금이라도 더 늠름한 글을 써보고자 합니다. 현상을 넘어 맥락을 찾겠습니다. 자세히 보고 오래 생각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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