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자유시 참변과 홍범도
국방부는 해당 자료에서 "홍범도 장군이 1921년 6월 러시아공산당 극동공화국 군대가 자유시에 있던 독립군을 몰살시켰던 자유시 참변과 연관되어 있다는 의혹이 있다"며 "1991년 한·소 수교 직후 발굴한 소련 측 정부문서에 따르면, 홍범도 장군이 1930년대에 소련 정부로부터 연금을 받기 위해 작성한 이력서에 '자유시 유혈사태에 대해 보고하기 위해 한인 빨치산 지대 대표단원 자격으로 레닌 동지를 만나러 모스크바로 갔다'로 되어 있다"고 밝혔다. 국방부는 "자유시 참변사태는 1921년 6월에 자유시에서 무장해제를 거부한 독립군이 공격당한 사건을 말하는데, 홍범도 장군은 순순히 무장해제하는 편에 섰다는 평가"라며 "이때 독립군측이 400명에서 600명까지 사망하였고, 약 500명이 재판에 회부되었다고 하는데, 당시 홍범도 장군이 독립군을 재판하는 위원으로 참가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자유시 참변에 대해 근현대사와 독립운동사를 오랜 기간 연구한 반병률 한국외국어대학교 명예교수는 지난 2013년 한국근현대사연구 67집에 수록된 '홍범도장군의 항일무장투쟁과 고려인 사회'라는 제목의 글에서 이렇게 규정하고 있다."자유시에는 홍범도 군대를 비롯한 만주에서 활동하던 독립군부대들 외에 러시아에서 활동한 한인빨찌산부대들이 집결해 있었다. 이들 무장세력을 둘러싼 고려공산당의 양 파벌이 각축전을 벌였고, 국제공산당 동양비서부장 슈미야츠키의 일방적 지원을 받은 이르쿠츠크파의 승리로 귀결되었다. 1921년 6월 28일의 자유시참변은 이르쿠츠크파가 상해파계열의 독립군과 한인빨찌산대를 탄압한 동족상잔의 비극적 사건이었다"
이 사건은 독립세력 내 사회주의 계열의 권력 다툼 과정에서 발생했다. 국방부는 이 과정에서 마치 홍범도 장군이 소련의 편에 서서 독립군을 탄압한 것처럼 주장하고 있지만, 반 교수를 비롯한 독립운동 연구자들은 이와 다른 견해를 보였다. 장세윤 성균관대 동아시아역사연구소 수석연구원은 지난 2021년 발표한 "‘독립전쟁의 영웅’ 홍범도의 귀환, 그 시사점과 과제"라는 제목의 논문에서 "홍범도의 '자유시사변'(1921년 6월 28일) 가담설이나 '자유시 학살' 개입설, '한국독립군 대학살', '독립군 학살 공모' 등은 전혀 사실이 아니다. 오히려 허재욱(許在旭, 흔히 허영장[許營長]으로 불림) 휘하 부대 등 홍범도 관련 독립군부대가 이 사변의 피해자라 할만 했다"고 진단했다. 그는 "허재욱의 의군부(義軍府, 무장 해제 당시에는 '총군부'소속) 독립군은 이 때 큰 피해를 입었는데, 홍범도 부대와 함께 청산리독립전쟁에서 크게 활약한 부대였기 때문"이라며 "(자유시) 사변 당시 홍범도는 장교들과 솔밭에 모여 땅을 치며 통곡하면서 매우 안타까워했다는 기록이 전한다"고 밝혔다. 이는 윤상원 전북대학교 사학과 교수가 지난 2010년 '러시아지역 한인의 항일무장투쟁 연구 : 1918-1922'이라는 제목으로 발표한 박사학위 논문에도 나타나 있다. 윤 교수는 "피해자의 대부분은 허재욱의 의군부 부대원들"이었다고 전하고 있다. 홍범도 장군이 당시 세력 다툼을 하던 고려공산당의 양 파벌인 이르쿠츠크 파와 상하이 파 어디에도 소속되지 않고 중립을 지켰다는 연구 기록도 있다. 특정한 파벌에 속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후 항일 무장투쟁 과정에서 주도권을 잃었다는 분석도 공통적으로 나온다. 반병률 교수는 위 논문에서 "홍범도는 사건 당시 중립을 지켰으나 참변 이후 군사지휘권으로부터 소외되었다"며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 측은 항일의병장으로서의 명성이 높은 홍범도를 파쟁에 활용하였다"고 분석했다. 장세윤 수석연구원 역시 지난 1991년 <한국독립운동사연구> 5집에 수록된 '홍범도 일지를 통해 본 홍범도의 생애와 항일 무장투쟁'이라는 제목의 논문에서 "다른 부대가 많은 피해를 입었음에 반하여 홍범도가 이끈 부대는 거의 아무런 피해를 받지 않았다"며 "이는 그가 상하이파와 이르쿠츠크파의 대립 한 가운데서 엄격히 중립을 지켰기 때문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고 전했다. 또 홍범도 장군이 독립군을 재판하는 재판위원으로 참여한 것은 사실이지만, 이를 독립군에 대한 탄압으로 볼 수 없다는 것 역시 공통된 평가다. 장세윤 수석연구원은 2021년 논문에서 "홍범도가 자유시사변 관련 고려혁명군사법원 재판관의 한사람으로 참석한 것은 사실이지만, 실형(징역형 2년)을 받은 독립군은 3명 뿐"이었다며 "사변 직후부터 상하이파 등의 반발과 상하이파 대표단의 외교적 노력, 코민테른 한국위원회의 '한국문제 결정서'(1921.11.15) 등으로 이 재판의 결과가 사실상 무력화되었다"라고 설명했다. 윤상원 교수는 지난 2017년 '홍범도의 러시아 적군 활동과 자유시사변'이라는 제목의 논문에서 "홍범도는 자유시사변을 처리하는 고려혁명군사법원 재판관의 위원으로 참석하게 된다. 홍범도는 재판에서 병사들이 피해를 보지 않고 공정한 판결이 나올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위원으로 참가했다고 하지만, 재판과정에서 위원을 맡은 일은 홍범도 개인에게는 무척 불행한 일"이었다고 평가했다. 자유시 참변에서 사망한 독립군에 대한 숫자도 논란의 여지가 있다. 국방부는 사망자를 600명까지 보고 있다고 밝혔지만, 국방부 군사편찬위원회가 2017년 발간한 <독립군과 광복군 그리고 국군>에는 가해자 측인 고려혁명군의 주장으로 사망자가 36명이라고 기록돼 있고 피해자 측인 대한의용군의 집계로는 전투 중 사망 및 익사, 행방불명 인원이 총 600여명으로 나타나 차이가 있다. 신주백 전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소장이 지난 2021년 <지식의 지평> 31호에 펴낸 '독립전쟁과 1921년 6월의 자유시 참변'에서도 사망자 숫자에 대한 언급이 있는데 당시 고려혁명군정의회 측이 코민테른 동양비서부에 "가해자 측은 1명 사망에 9명 부상, 사할린부대(대한의용군, 상하이 파)는 36명 사망 60명 행방불명, 무장해제 860명"이라고 보고했다고 밝히고 있다.2. 홍범도와 소련공산당
국방부는 홍범도 장군이 소련 공산당에 가입했다는 점을 문제삼았다. 국방부는 "1991년 한·소 수교 직후 발굴한 소련 측 정부문서에 따르면, 홍범도 장군이 1930년대에 소련 정부로부터 연금을 받기 위해 작성한 이력서에 '자유시 유혈사태에 대해 보고하기 위해 한인 빨치산 지대 대표단원 자격으로 레닌 동지를 만나러 모스크바로 갔다'로 되어 있다"고 밝혔다. 이어 "홍범도 장군은 1922년 코민테른(국제공산당)이 개최한 '극동민족혁명단체 대표대회’에 한인대표 52명의 일원으로 참석하였고, 동년 레닌으로부터 권총, 상금, 친필서명된 '조선군대장' 증명서를 접수하였으며, 1927년에는 소련공산당에 입당하는 등은 분명한 역사적 사실"이라고 주장했다. 국방부는 홍범도 장군의 공산당 가입을 김일성 주석과 스탈린 정권이 한반도에 일으킨 전쟁과 연결지었다. 이는 1920년대 공산당에 가담한 것이 1950년 발발한 한국전쟁에까지 영향을 미쳤다는 주장인데, 홍범도 장군은 1943년에 사망했고 사망 전까지 김일성이나 스탈린 등과는 접촉이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홍범도 장군은 자유시참변이 일어난 뒤 6년이 지난 1927년 공산당에 가입했는데, 여기에는 독립 무장투쟁을 전개하기 위해 소비에트의 힘이 필요하다는 현실적인 수요가 있었다. 장세윤 수석연구원은 2021년 논문에서 홍범도 장군이 당시 중립을 지키다 결국 고려혁명군정의회 측으로 옮겨간 이유에 대해 "'무장부대 통합'이라는 명분, '혁명러시아 당국 및 코민테른(국제공산당)의 권위' 인정, 그리고 '무기・식량 등의 원활한 공급(즉 보급문제)'이라는 현실문제에 대한 고려가 컸던 것으로 파악된다"고 분석했다. 그는 "홍범도는 자유시사변 과정에서 매우 중요한 선택과 결정을 내림으로써 휘하의 독립군 세력을 온전히 보존할 수 있었다"며 당시 선택에 대한 긍정적 평가를 내리기도 했다. 독립을 위해 소비에트의 힘이 필요햇다는 것은 이승만 당시 상하이 임시정부 임시대통령이 모스크바로 주요 인사들을 파견했다는 것에서도 드러난다. 반병률 교수는 지난 2010년 <역사문화연구>에 수록된 '러시아(소련)의 대한민국임시정부 인식'이라는 제목의 논문에서 "상호 경쟁하던 상하이파, 이르쿠츠크파 등 고려공산당에 더하여 1921년 중반 기호파 중심의 우파가 주도하뎐 상해임시정부의 임시대통령 이승만은 이동휘가 파견했던 한형권을 소환하고 외무차관 이희경과 안공근을 모스크바로 파견"했다고 전했다. 반 교수는 "원동민족혁명단체대표회가 개최되고 있던 1922년 초 모스크바 한국혁명세력을 대표하는 세 개의 그룹이 소비에트정부와 코민테른을 상대로 경쟁적인 외교활동을 전개하게 되었던 것"이라고 해석헀다. 당시 독립운동세력이라면 소련과 관계를 소홀히 할 수 없었다는 증거인 셈인데, 1920-1930년대 식민지 국가들의 민족해방운동에 코민테른이나 소비에트 등이 이들을 지원하는 주요한 역할을 했기 때문이었다. 독립운동사를 20년 넘게 연구하며 이를 주제로 석‧박사 학위를 취득한 김주용 원광대학교 한중관계연구원 교수는 29일 <프레시안>과 통화에서 "이민족의 지배로부터 방어하려고 항거했던 사람들이 당시에 가지고 있는 무기가 얼마나 되겠나"라며 "(홍범도 장군의) 공산당 가입은 '적의 적은 아군'이라는 것이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즉 일본으로부터 독립을 위해 일본의 적인 소련과 일정 부분 협력이 있었다는 분석이다. 홍범도 장군이 공산당에 가담했지만 항일무장투쟁이나 이후 한반도에서 정부를 구성하는 데 있어 결정적 역할을 하지 않았다는 점을 고려했을 때, 홍범도 장군의 공산당 가담과 북한 정권의 출현을 연계시키는 것은 논리적 비약이기도 하다. 반병률 교수는 위 논문에서 홍범도 장군이 자유시참변이 일어난 이후 1923년부터 이만(달네레첸스크)에서 3년간 농사를 지었고 2년간 양봉을 했다고 전했다. 이후 스파스크, 한카이, 수청 등 연해주 지역에서 1937년까지 집단농장에 소속되어 농사를 지었다고 설명했다. 그가 소련공산당에 가입을 하긴 했지만 이렇다 할 활동은 없었던 셈이다. 장세윤 수석연구원은 1991년 논문에서 "홍범도의 사상적 편력에 대하여 확실한 단정을 내릴 수는 없다. 그러나 홍범도외 출신 성분과 성품, 행적을 미루어 추측해 볼 때 그가 체계적으로 완비된 사회주의 이론이나 사상에 입각하여 행동하지는 않았다고 하더라도, 그러한 이념에 동조할 개연성은 충분히 있었을 것으로 본다"고 진단했다. 그는 "하지만 우리에게 더 중요한 문제는 그의 이념이 무엇인가를 구태어 무리하게 재단하기보다는 그의 철저한 항쟁과 투철한 애국심이 어디서 연유하고 결국 무엇을 위한 것이었겠느냐 하는 것을 규명하는 일"이라며 "홍범도가 사회주의 사상에 폭넓은 자세를 취하였고 비교적 늦은 시기인 59세 때 공산당에 입당하였으나, 사회주의 이론이나 사상에 깊은 조예가 있는 투철한 '주의자'는 아니었다"고 분석하기도 했다. 이러한 역사적 연구가 이미 30여 년 전부터 쌓여왔음에도 국방부가 일부의 시각만을 가지고 홍범도 장군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는 것에 대해 김주용 교수는 "호국은 6.25만 있는 것이 아닌데, 독립운동을 제대로 배운 적이 없으니 이러한 인식이 나오는 것 같다"며 홍범도 장군과 김일성, 스탈린 관계를 엮는 것은 "논리 비약이면서 역사 왜곡"이라고 일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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