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 대통령 묘의 비석 아래 철판에 새겨진 글이 '민주주의 최후의 보루는 깨어 있는 시민의 조직된 힘입니다'죠. 저는 이게 답이라고 생각해요. 기본적으로 우리 시대의 의 또는 올바름, 가치를 추구하기 위해서는 우선 그 가치를 인식하는 사람들이 있어야죠. (중략)
여러분, 국민은 그냥 주어지는 거죠. 대한민국에 태어나면 여권 국적란에 '대한민국, Republic of Korea'라고 그냥 주어지는 겁니다. 자기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국민이에요. 시민은 뭔가요? 자기의 권리가 무엇인지 알고 그 권리를 행사하려고 하는 각성된 국민이 시민이죠. 지금 벌어지는 이 모든 사회적 갈등을 보면 그 기저에는 우리가 보통 말하는 국민과 권리의 주체인 시민 사이의 갈등이 있습니다. 국민은 대개 한나라당 편, 시민은 우리 편이라고 볼 수도 있겠죠. 그러니까 깨어 있는 의식을 가진 시민이 많아지도록 하는 일이 노무현 정신을 계승하는 방법 중 첫 번째 단계에 또는 늘 해야 하는 기본적인 일입니다. (중략)
정말 올바름과 이로움이 충돌할 때 이로움을 버리고 올바름을 추구할 정신을 갖고 있는가. 그럴 준비가 돼 있는가. 이걸 한번 돌아보셨으면 합니다." (유시민, <노무현의 진보>, 오마이북, 2010. 61~62쪽)
'깨어있는 시민'은 권력을 견제하기 위한 시민 의식을 갖춰야 한다는 보편적 경구이지만, 유시민은 '시민'의 상대항에 '국민'을 두고 두 항목을 재정의함으로써 차등적인 이분법 구도를 끌어낸다. 사실 모든 국민이 참정권을 갖는 현대 민주주의에서 국민과 시민은 개념적으로 같은범위를 지칭하지만, 여기서 시민은 어떤 자격을 갖춘 존재, 자격이 있기에 '국민'보다 더 큰 정치적 권리를 주장할 수 있는 당위가 있는 자들이 된다. '국민'과 '시민'의 관계는 이해관계의 대립이 아니라, 아직 진정한 이해를 깨닫지 못한 '국민'과 그들을 위해 진짜 이익을 대변해 줄 수 있는 '시민'사이의 계몽적 관계가 된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시민'이 될 수 있는가? 구체적 실천이 필요하다. 올바름을 추구해야 한다. 올바름과 이로움이 충돌할 때 올바름을 추구해야 한다. 많은 투쟁과 고민 끝에 현대 민주주의는 특정한 조건이나 자격 없이도 모든 국민이 같은 주권을 가진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하지만 이러한 인식 하에선 우리가 진정한 주권을 갖기 위해선 굳이 깨어 있기까지 해야 한다. 대한민국에 그냥 태어나서 사는 것만으로도 꽤나 피곤한 일인데 말이다. 이런 민주주의관은 이후 '이로움' 즉, 이해관계를 조정하는 민주주의 문제를 제대로 다루지 못하는 한계로 이어진다. 이러한 인식은 80년대 학생운동의 '품성론'의 업데이트된 재현이다. 품성론은 혁명가가 되기 위한 방법이다. 혁명가가 민중을 닮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거지, 민중이 어떤 행동을 하든 민중에서 탈락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반면 '시민'이 되어야 한다는 품성론적 요구는 혁명가가 아니라 유권자 일반의 자격에 대한 요구다. 결국 시민이 되지 못한 유권자의 목소리는 무시해도 되거나, 혹은 더 적극적으로 무시되어야 할 것이 된다. 품성론이 대의 민주주의와 만나면서 유권자 사이의 차등을 주는 담론이 된다. 또한 '민중'이 '시민'이 되면서, 모호하게나마 존재했던 계층성은 완전히 사라졌다.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의 문제일 수도 있겠지만, 1980년대 대학 교육을 받고 중산층 이상이 된 86 집단의 경제적 계층 변화와도 무관하진 않을 것이다. 이제 누구라도 특정한 방식으로 행동하는 것만으로 '시민', 즉 우리 편이 될 수 있다. 그런데 이 실천 과제는 매우 어려우면서도 쉽다. 최단 경로는 그냥 민주당을 지지하는 것이다. 당신이 이로움보다 의로움을 추구하는 시민이라면 민주당을 지지할 것이라는 가정은, 손쉽게 민주당을 지지하면 깨어있는 시민이라는 역 명제로 전환된다. 이런 구도에서 민주당을 지지하지 않는 전제 하의 정치적 요구는 모두 비합리적이고 어리석은 것이 된다. 유시민은 2030 남성들이 "불만을 합리적인 방법으로 제시"하지 못한다고 얘기한다. 민주당 정부에 대해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회고적 투표는 합리적 방식이 아니란 것이다. 유시민은 이어 "기성세대가 부당하게 안 들어주면 돌 들고, 화염병 들고 정부종합청사, 민주당사에 던지라", "우리도 다 돌 들고 화염병 들어 세상이 바뀐 것이고, 그렇게 해서 세상은 자꾸 나아가는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유시민이 비판한 에펨코리아 등의 커뮤니티에서는 유시민의 발언에 대해 이미 충분히 불만을 제시했는데 무엇을 더 해야 하는지 모르겠다는 반응이 많았다. 그리고 불만을 투표로 충분히 표시했다는 것이다. 실제로 2030 청년들은 젠더 갈등의 양상으로나, 실제 투표 결과로나 이미 충분히 불만을 드러냈다. 그 불만이 이기적이거나 여성 등 다른 집단을 차별하는 것이라는 비판은 가능하겠지만, 불만은 제대로 드러내지 못했다는 지적은 이해하기 어렵다. 집회결사의 자유와 저항권은 민주주의를 유지하는 데 필수적인 가치이긴 하지만, 유시민의 발언에 따르면 여당에 대한 불만으로 야당에 투표하는 민주주의의 일상적 표현 방식은 비합리적인 것이 되고, 화염병과 돌을 던지는 예외적인 방식은 오히려 권할만한 것이 된다. 이러한 정치적 상상도에서는 정치의 가장 깊은 내핵인 제도 정치 영역에는 민주당과 그 지지자들이 마땅히 있다. 그리고 그 다음 결에는 민주당이 미처 다 챙기지 못한 잠재적 과제로서의 민중의 불만이 예외적으로 존재한다. 여기까지가 민주당이 생각하는 정당한 정치의 영역이다. 국민의힘은 이 예외적 영역에서도 밀려난 다른 세계, '악'의 세계에 존재한다. 이렇게 이해할 때 2023년 대한민국의 정치는 악의 세력에 의해 무단으로 점령된 전시 상태가 된다. 이 구도에서 악의 세력인 국민의힘에 동조하는 행위는 민주당에 돌과 화염병을 던지는 것보다 더 잘못된, 아둔하고 깨닫지 못한 이들이나 할 수 있는 행위가 된다. 가장 큰 문제는 투표로 표출한 불만이 정치세력에 가닿지 못한다는 것이다. 특정 집단의 요구가 이기적인 건 사실 민주주의 전체에서 문제는 아니다. 어차피 대부분의 요구는 이기적이다. 이기적 요구들만으론 사회가 유지될 수 없다는 걸, 결국은 우리가 평등한 대안을 찾는 것이 우리 사회의 장기적 존속과 발전을 위해 필요하다는 걸 설득하는 건 정치인과 정당의 역할이다. 그 역할을 잘 해 다수의 지지를 모아낼 수 있는 이들이 결국은 집권한다. 민주당에 어떠한 요구를 해도 튕겨나오기만 할 때, 더 이상 유권자들은 민주당에 요구도, 기대도 하지 않을 것이다. 그것보다 확실하게 민주당을 망가뜨리고 집권을 방해하는 방법을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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