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 페미니스트지?"
게임업계에 종사 중인 40대 직장인 A씨의 회사에선 최근 여성 직원들을 대상으로 '사이버 마녀사냥'이 일어났다. 누군지 알 수 없는 네티즌들이 사내 여성 개발자들을 찾아내 "페미인지 아닌지 대답하라"는 메시지를 지속적으로 발송했다. 메시지에는 칼로 난자당한 여성의 사진이 포함돼 있었다. 직원을 대상으로 한 사상검증인 동시에, 직접적인 사이버 테러였던 셈이다. 지난 2016년 게임 <클로저스>의 제작사 넥슨이 페미니즘 성향을 이유로 성우 김자연 씨를 하차시킨 이후, 게임업계에선 이 같은 일들이 7년째 이어지고 있다. 20대 게임 원화가 B씨는 "원화가 동료의 개인 SNS를 수시로 염탐하고, 스토킹하며 온라인에 퍼 나르는 사람들이 있었다"고 목격담을 말했다. 게임회사에서 관리직을 맡고 있는 30대 직장인 C씨는 "개인 SNS계정으로 '강남역 살인사건에 대한 견해를 밝히라'는 메시지(DM)를 받았다"고 털어놨다. 17일 오전 청년유니온과 우원식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국회 소통관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이 같은 내용을 담은 '게임업계 사이버불링 및 직장 내 성희롱·성차별 실태 제보분석 결과'를 발표했다. 이들은 이날 오후 국회 환경노동위원회에서 진행된 고용노동부 대상 국정감사 현장에도 출석해 게임업계에 대한 노동부 차원의 근로감독 실시를 요구했다.여성·청년 노린 게임업계 사이버불링 … 회사는 보호조치 대신 '마녀사냥' 동조
청년유니온이 지난 9월 8일부터 10월 3일까지 온라인, 이메일, 유선전화 등으로 수집한 게임업계 사이버불링, 사상검증, 직장 내 성차별 피해 제보 실태에 따르면, 총 62명의 제보자 중 90%에 이르는 58명이 20~30대 청년세대로 확인됐다. 또한 피해 제보자 중 55명은 여성으로 대부분의 피해가 여성·청년에게 집중되는 모습을 보였다. 제보자들의 소속 기업 규모는 300인 이상 기업이 19곳, 100인 이상~300인 미만 기업이 15곳, 30인 이상 100인 미만이 15곳으로, 사상검증 등 성차별 피해는 기업규모를 가리지 않고 나타났다. 고용형태로는 근로계약을 맺은 정규직 및 무기계약직이 46명, 기간제 등 비정규직이 5명, 산업안전보건법의 사각으로 꼽히는 프리랜서가 11명으로 확인됐다.지난 7월 게임사 '프로젝트문'에서 여성노동자가 해고당하며 다시 한 번 논란이 된 게임업계 페미니즘 사상검증·사이버불링 피해는 독특한 피해구조를 가지고 있다. (관련기사 ☞ '여성이 비키니 안 입어서'? 게임업계 또다시 '페미니즘 검증' 논란)
먼저 관리직, 원화가 등 고객응대근로자가 아닌 노동자의 경우에도 게임이용자 등 제3자에 의한 사이버불링에 노출된다는 점이다. 7월 프로젝트문 사태의 경우 처음에는 '여성 캐릭터의 노출이 적다'는 등의 이유로 게임 원화가가 공격의 대상이 됐고, 이후엔 게임제작에 관여한 제3의 인물이 표적이 됐다. 이번 실태조사 상에서도 관리직, 프로젝트 매니저, 개발자, 디자이너, 원화가 등 다양한 형태의 노동자들이 피해경험을 토로해왔다. 다음은 피해가 지속적인 동시에 확장적이라는 점이다. 대부분의 공격이 '노동자가 페미니스트 여성'이라는 전제에서 시작되기 때문에, 공격자들은 피해자가 페미니스트임을 끊임없이 '검증'하려 하는 양상을 보인다. 꾸준히 메시지를 보내 사상검증을 시도하는 동시에, 피해자의 SNS 계정을 찾아내 '평소 어떤 사상을 지녔는지' 평가하는 등 온라인 스토킹이 지속된다. 30대 게임 프로젝트 매니저 D씨는 "(공격자들은) 게임회사 공식 사이트 혹은 공식 SNS에 댓글로 (피해자에 대해)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을 비속어로 표현하고 허위 사실을 유포하기도 한다"라며 "(피해자를 공개적으로) 조롱하는 태도가 기본적"이라고 말했다. 게임 개발직으로 일하는 30대 노동자 E씨는 "(피해자가 부친상을 당하자) '디씨'와 '루리웹'에 (부친상을 모욕하는) 도배성 글들이 올라왔다"고 전하기도 했다. 2016년 넥슨 사태와 같이, 이 같은 사이버불링은 공격자들의 집단행동을 통해 피해자에 대한 직접적인 생계위협으로 확장된다. 넥슨 사태 당시 사이버불링 피해를 겪은 40대 직장인 F씨는 "(당시 넥슨을 비판한 노동자들을 대상으로) 직장인 익명 사이트를 통해 과거 행적을 들추어 인신공격을 하는 글이 올라왔다"라며 "또한 페미니즘을 지지한 사람들의 얼굴과 실명을 블랙리스트로 만들어 업계에 다시는 취업 못하도록 공유하겠다는 협박 글도 올라왔다"고 회상했다. 지난 7월 프로젝트문으로부터 사내규칙 위반을 사유로 해고당한 피해자의 경우, 해당 직원이 과거 SNS 계정에 올린 불법촬영 규탄시위 지지 발언이 논란이 됐다. 해당 SNS 게시 글을 명목으로 남성이용자들의 별점테러, 항의방문 등이 이어진 끝에 회사는 실제로 해당 직원과의 계약종료를 공지했다. 사이버 스토킹을 기반으로 찾아낸 정보가 다시 인터넷 등을 통해 공유되며 생계위협의 재료가 된 셈이다. 이처럼 노동자를 향한 공격에 '회사가 동조한다'는 점이 게임업계 사이버불링 피해사례의 마지막 특이점이다. 청년유니온이 제보자들을 대상으로 사이버불링 문제의 심각도를 묻자 62명 중 47명이 '매우 심각(5점)'으로 답하는 등 피해자가 체감하는 피해 정도는 심각한 수준에 이르렀다. 반면 사이버불링 발생 시 회사의 보호조치 여부를 묻자 23명(50%)이 '방치했다'고, 19명(41.3%)이 '불이익 조치를 했다'고 답했다. 보호조치가 이루어진 경우는 4명(8.7%)에 그쳤다. 산업안전보건법 제41조 제2항은 '사업주는 업무와 관련하여 고객 등 제3자의 폭언 등으로 근로자에게 건강장해가 발생하거나 발생할 현저한 우려가 있는 경우에는 업무의 일시적 중단 또는 전환 등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필요한 조치를 하여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지만, 게임업계에선 회사가 보호의무의 이행은커녕 오히려 불이익 조치를 취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는 결과다. 피해자들이 제보한 내용을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사이버불링 피해자에 대한 회사의 불이익 조치는 △계약해지 등 해고 △개인 SNS 검열 △면접을 통한 사상검증 및 교정시도 △인신공격과 지위를 이용한 압박 등 다양한 양상으로 나타났다. 게임 작가로 일했던 30대 G씨는 사이버불링을 당한 이후 "(회사로부터) 자발적 퇴사의 형식을 강요한 사실상 해고를 당했"고, 게임 원화가 H씨는 과거 트위터 행적을 이유로 "대표님 면담에 사과문까지 작성"해야 했다. 게임 마케팅을 맡은 20대 I씨는 "(온라인에서) 페미니스트로 몰렸다는 이유로 경위서를 작성"했으며 경위서를 검증하겠다는 이유로 "개인 SNS와 취미로 하던 유튜브 채널까지 검사"당해야 했다. 사이버불링 피해자에게 "메갈X" 등 비속어를 쏟아내는 등 관리자가 공개적인 인신공격을 가하는 경우도 있었고, 한 회사는 "페미니스트로 오해받을 수 있다"며 오프라인 행사 시 머리가 짧은 여성 직원에게 가발 착용을 지시하기도 했다.근로감독 4만6000 건 중 게임업계는 '단 1건'…"게임업계 특별근로감독 실시해야"
청년유니온, 전국여성노동조합 디지털콘텐츠창작노동자지회, 한국게임소비자협회 등 이날 기자회견 참여 단체들은 게임업계 기업들의 행태와 더불어 고용노동부의 책임방기를 지적했다. "게임업계 노동자들이 사이버불링으로 인한 피해에 노출되고 게임회사들이 이를 방치, 심지어 불이익을 주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고용노동부의 게임업계 근로감독은 전무하다시피 하다"는 것이다. 실제로 우원식 의원실이 고용노동부로부터 지난 9월 제출받은 산업안전보건 근로감독 현황 자료에 따르면, 2021년 10월 14일부터 2023년 8월까지 누적된 산업안전보건 근로감독 전체 4만 6천여 건 중 게임회사에 대한 근로감독은 단 1건에 불과했다. 우 의원은 이날 기자회견에서 "사이버불링은 주로 약자를 향한다. 남성보다는 여성, 중장년보다는 청년이 그 대상이다"라며 "하지만 이에 대한 국가의 보호는 너무나 허술하다"고 지적했다. 이 같은 사이버불링 문제는 결국 게임업계 내의 만연한 '성차별 구조'에서 기인하고 있다는 분석도 나왔다. 청년유니온이 피해제보자들을 대상으로 게임업계의 직장 문화가 성평등한지 묻자 '매우 성차별적(1점)'이라는 대답이 40.32%(25명), '성차별적(2점)'이라는 대답이 43.55%(27명)으로 가장 높게 집계됐다. 매우 성평등함(5점)부터 매우 성차별적(1점)이라는 응답을 점수화한 평균 점수는 1.94점(5점 만점)에 그쳤다. △연봉 평가에 성별 반영 △성희롱 및 성차별 발언 △면접·승진 성차별 및 육아휴직 거부 등 현행 '남녀고용평등과 일·가정 양립 지원에 관한 법률'에 위반하는 것으로 보이는 의심사례들도 다수 제보됐다. 이날 단체는 게임업계 사이버불링 피해에 더해 이 같은 성차별 사례에 대한 노동부 차원의 근로감독을 촉구하는 1만 2745명의 청원을 고용노동부에 제출했다. 김설 청년유니온 위원장은 이날 환노위 국정감사 자리에 증인으로 출석해 "사이버불링, 직장 내 성희롱 및 성차별에 노출되어 있는 노동자들을 보호하기 위해 게임업계에 대한 근로감독을 실시해야 한다고 요청하는 12745명의 요구를 무시해선 안 될 것"이라며 △게임업계에 대한 산업안전보건법, 남녀고용평등법, 근로기준법에 대한 특별 근로감독 실시 △프리랜서도 사이버불링으로부터 보호받도록 산업안전보건법 제41조 보호 범위 확대 등을 요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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