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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생해 내린 이 물방울 드시면 나으니, 생활하게 몇 푼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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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고생해 내린 이 물방울 드시면 나으니, 생활하게 몇 푼 주세요" [류하경의 불온한 사건첩] 변호사(辯護士) : 선비와 상인의 경계에서
작은 시(市)법원에 오랜만에 갔다. 지역마다 지방법원이 있고 그 지역 안에서도 외곽지 또는 소규모인 시, 읍·면·군의 소액사건 등 비교적 간단한 사건처리를 위해 '시법원'이 있다. 이를테면 경기도에서 가장 많은 시를 관할하는 수원지방법원이 수원에 있고, 그 외에 별도로 용인시법원, 오산시법원 등이 있다. 내가 재판을 하러 간 그 곳엔 법정이 단 한 개 있었다. 재판 일정표를 보니 10분 단위로 한 타임에 대여섯 사건씩 오전, 오후 꽉 차있다. 소소한 이권 사건들이다. 역시나 대부분 변호사 없이 '나홀로소송'을 하는 당사자들이다. 나는 지인의 사건을 호의로 맡아서 왔다. 소소한 이권 사건이다. 상대방은 혼자 왔다. 판사가 힘들어 보인다. 일찍 와서 방청석에 앉아 앞 사건들 두어 개를 봤는데 판사가 많이 답답해하는 게 와 닿는다. '나홀로소송' 당사자들은 재판에서 이기기 위한 법리를 잘 모르다보니 사실관계 정리도 잘 못해오고 정작 중요한 증거를 빠뜨린 경우가 부지기수기 때문이다. 우리 사건 상대방에게도 판사가 앞 사건들과 비슷하게 말한다.

"소송이라는 게 증거랑 각종 조건들이 필요해요. 말로만 하는 게 아닙니다. 재판을 한 번 더 열어드릴 테니 다음 재판 때까지 주위에 법무사나 변호사나 상담이라도 한번 받아보고 오세요.

변호사님께도 부탁합니다. 말씀은 맞는데요, 입증을 원고가 해야 한다고만 하시게 되면 저는 재판을 좀 길게 할 수 밖에 없어요. 원고에게 기회는 줘야하니까…. 그러니까 열심히 반증도 해주시고 여러 가지 정리 좀 먼저 부탁드립니다."

그 마음을 잘 알겠어서, "네 이해했습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했다. 오는 길에 동료변호사 전화가 온다. 의뢰인이 상담료 안내를 미리 받고 왔으면서도 상담 끝나고 돈을 안 주려해서 짜증이 단단히 났다고 한다. "그래서 어쨌냐?" 묻자 "그냥 가시라 했지 뭐…"라고 한다. 들어보니 소소한 이권 사건이다. 당사자들에게는 소소한 사건이 어디 있으랴. 객관적으로도 수백만 원에서 수천만 원이 걸린 사건이다. 송무 법률가들, 우리 업자들 입장에서야 소소한 사건이지만 당사자에겐 소소한 사건이 어디 있겠는가 말이다. 그러니 전문가의 상담과 조력이 꼭 필요하다. 예방이 우선이요, 치료는 필수다. 예방도 혼자 하려하고 치료도 혼자하려 하면 그게 일이 될까. '말 몇 마디에 무슨 돈을 그렇게 달라 해요?' 몽짜를 놓는 분들은 대개 이런 마음들이시다. 그 '말 몇 마디' 해드리려고 오래, 그리고 많이 공부해서 자격증을 땄다. 현업에 나와서도 연구하고 시행착오로 노하우를 쌓았다. 그렇게 산 아래 돌 틈에서 떨어지는 물방울들이 변호사의 말 몇 마디다. '이 물방울을 드시면 낫습니다. 오래 고생해서 내린 물방울이거든요. 그러니까 제가 생활할 수 있게 몇 푼 주세요. 이 일 말고는 다른 생계수단이 있는 게 아니어서요' 이 말을 자존심에 못하고 그냥 보낸 손님을 손가락 발가락으로 다 못 헤아린다. "점집가면 귀신 들린 사람 말 몇 마디에도 수 십 만원 주시잖아요" 이 말은 한번 해본 적 있다. 그래도 내겐 돈을 안주고 가셨다. '몸 아프면 병원 가시듯이 사건이 생기면 변호사 도움을 받으세요. 더 많이, 더 여러 군데 아프고 나서야 찾으면 안 좋으니까요' 이게 정말로 하고 싶은 말이다. 변호사의 필요성과 유료 원칙에 대해 말해봤다. 그럼 무료로는 일하지 않는가? 그렇지 않다.

나는 어떤 때 무료로 일을 하는가

변호사로서 하고 싶은 일이 많다. 사회적 약자를 위해 헌신도 하고 싶고, 경제적 안정도 이루고 싶다. 둘 다 사람답게 살기 위해서이기에 어느 하나 포기할 수가 없다. 아직도 그 균형점을 찾는데 미숙하다. 두 바퀴가 같은 크기와 속도로 굴러야 하는데 여전히 울퉁불퉁 삐거덕거리며 나아가는 형국이다. 변호사의 노동 중 어떤 것이 '무료'인가에 대한 나와 상대의 관점이 다를 때 특히 더 그렇다. 이 기준을 잘만 세우면 좋은 뜻을 가진 변호사는 길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어떤 때 무료로 일을 하는가. 안산 시화공단에 무료 법률상담을 나간 적이 있다. 누군가가 다가오는데 처음엔 초등학생인가 중학생인가 했다. 체구도 자그맣고 앳된 외모였다. 24세 파견노동자였다. 19세 고3 때 처음 제조업 파견일을 시작해 몇 군데 공장을 다녔다고 한다. 회사에 돌려줘야할 돈이 있는데, 이 때문에 회사가 두 달째 임금 전액을 공제해 생활이 어렵고 마음이 슬프다고 한다. 우리 근로기준법에는 임금전액불 원칙(제43조 '임금 지급' ① 임금은 통화(通貨)로 직접 근로자에게 그 전액을 지급하여야 한다. 다만, 법령 또는 단체협약에 특별한 규정이 있는 경우에는 임금의 일부를 공제하거나 통화 이외의 것으로 지급할 수 있다)이 있다고 설명해주었다. 임금은 노동자가 생활하기 위해 꼭 필요한 돈이므로 일단 임금은 전액을 지불해야 하고 빚을 이유로 함부로 공제하면 안 된다는 원칙이다. 이를 들은 그의 얼굴은 더 어두워졌다. 노동부에 신고하나 사장한테 임금 밀린 것 달라고 직접 말하나 해고당하는 건 매한가지라고 했다. 그런 경우가 수도 없단다. 그래서 노동조합을 만들고 싶다고 한다. 나 역시 생업을 잠시 거두고 그 청년들을 돕고픈 마음이 들었다. 매달 둘째 주 수요일에 이 자리에서 무료상담이 늘 있다고 하니 소박하게 웃으면서 "매번 올 수 있겠네요. 수요일은 야간 잔업이 없으니까"라고 했다. 다음 달에 보자고 인사한 후 돌아 나가는 그의 가방에 노란리본이 흔들거린다. 경기도 안산역 근처에는 중학생, 고등학생들이 뭐라 종알대면서 행복하게 집으로 돌아간다. 저 아이들이 내 눈에는 다 파견노동자로 보였다. 한동안은 택배, 퀵서비스, 대리운전, 요구르트 판매자 등 소위 '이동노동자'들의 쉼터에 무료 법률상담을 나가기도 했었다. 이러한 무료 법률상담을 마치고 퇴근하는 길은 행복하다. 이것은 '일'이라기보다는 '삶'에 가깝다. 그러나 나는 이 작업들이 생업이고 그래서 돈을 벌어야 한다. 한번은 거대 규모 뉴스 방송사에서 프로젝트 자문 의뢰가 왔다. 주말임에도 양해 없는 개인 휴대폰 연락은 차치하더라도 문제가 좀 있었다. 프로젝트 참여 및 자문은 무료로 해주어야 한다는 요구다. '공익', 인권, 빈곤계층 등 무료자문 대상기준에 맞지 않고 귀 방송사 정도면 충분히 정당한 노동에 대한 대가를 지불하고도 차고 넘치기 때문에 위 제안은 적절하지 않다고 정중히 답변했다. 방송사의 담당자가 반문하기를, 청년일자리라는 사회문제에 대한 프로젝트인데 무료로 해줘야 되는 것 아니냐는 것이었다. 이에, 나 역시 청년이고 벌이가 시원찮은데 귀사의 제안은 해당 프로젝트 주제도 배반하는 업무진행 방식이므로 유감을 표하며 참여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그 방송사는 왜 특별한 사정없이 무료노동을 요구한 걸까.

선비와 상인의 경계에 선 변호사의 균형점 찾기

우리는 저마다 자기 직군의 노동에 종사하며 살아가는데, 이념과 사상, 진보, 보수를 떠나 모든 사람은 자기 노동에 대해 정당한 대가를 받는 것을 정의라고 생각한다. 공익 또는 인권을 지향하며 그러한 활동을 하는 이들도 자기 직군의 노동으로 생계를 유지한다. 변호사도 노동자이거나 상행위 주체다. 변호사에게 당연한 듯 무료노동을 기대하다가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면 실망하는 것은 여러모로 서로를 힘들게 한다. 우리 사회가 아직도 말 몇 마디, 글 몇 자에 금전적 가치를 부여하는 데 익숙지 않기 때문에 변호사의 조력을 '선의' 정도로 여겨 상담료를 지불하지 않는 것을 당연시 하는 사람이 많다. 그러나 앞서 설명한 것처럼 변호사는 특정한 말과 글을 드리기 위해 수년간 지식을 쌓았다. 이를 근거로 법적 절차에 있어서 배타적인 어떤 자격을 얻기도 했다. 사는 동안 말과 글을 위해 공부를 계속해야하는 전문가이기 때문에 말과 글이 곧 자본이고 상품이다. 타당한 기준 없이 무료로 일을 해주는 변호사도 있겠으나 지속가능한 운영방식이 아니고 정당하지도 않다. 이를테면 법원 정문 코앞에서 "무료 법률상담"이라 적힌 거대한 간판을 내걸고 영업을 하는 사무실들이 있다. 이 중 일부는 분별없이 무료 법률상담을 한다. 이는 아무렇게나 무책임하게 진행하는 상담이 되기 쉽다. 또는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일단 소송으로 유인해서 수임료나 벌려는 상술로 이어지는 경우가 잦다. 그리고 정당한 노동의 대가를 받고 진지하게 일하는 다른 변호사들의 생업을 위협한다. 그래서 부당한 업무행위다. 대한변호사협회와 각 지방변호사회들은 이러한 무분별 무료 법률상담을 하지 말 것을 회원들과 의뢰인들에게 강하게 권고하고 있다. 이처럼 무료 법률상담이 '공익'이나 인권 같은 가치로 바로 이어지는 것이 아니다. 앞서 예로 든 것처럼 정반대의 가치관계에 있는 경우도 많다. 흐릿했던 고민이 점점 뚜렷해진다. 그렇다면 나는 변호사로 사회에서 어떤 방식으로 존재해야 하는가. 돈을 벌어 내 생계는 내가 책임지고, 남에게 큰 해를 안 끼치고 살아가면 그만인가. 변호사의 '사'자는 선비 사(士)자다. 판사와 검사는 일 사(事)자를 쓴다. 변호사들은 선비와 같이 고매한 이상을 추구하고 도를 닦듯 진리를 탐구하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는 작명 취지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변호사는 고용된 자인 경우 임금노동자이므로 사용자 또는 법인에 이윤을 창출해야 하고, 개인사업자인 경우에는 사무실 임대료와 직원들의 급여 등 운영비용을 벌고 제 생활비도 구해야 하므로 더더욱 상인과 같이 명석한 경제적 선택이 필요하기도 하다. 선비의 도리(哲理)와 상인의 이재(理財) 어느 것도 소홀히 하지 않아야 하는데, 안전망 없는 경쟁 일변도의 시장상황에 변호사 역시 예외가 아니다. 아름다운 꿈을 품었던 재야 변호사들은 진퇴유곡(進退維谷)에 처해있다. 소위 말하는 '공익', 인권, 가난하고 힘없는 자들을 위해 무료로 일하고 싶은 꿈 많은 젊은 변호사들의 앓는 소리가 커진다. 나 역시 마찬가지다. 다만 고민 그 자체는 계속되어야 한다.
▲ 서울중앙지방법원(자료사진).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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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하경
자전거와 수영과 강아지를 좋아하는 변호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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