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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남아 국가를 갉아먹은 제국주의라는 거대한 괴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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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남아 국가를 갉아먹은 제국주의라는 거대한 괴물 [도쿄 야스쿠니에서 칸차나부리 죽음의 철도까지] ②대동아 공영권에 환호한 사람들과 태국의 밤부 외교

<달리는 기차에서 본 세상> 을 연재 하고 있는 자칭·타칭 '철도 덕후' 사회공공연구원 박흥수 철도 전문위원은 지난 1월 말에서 2월 초까지 태국 철도 답사를 다녀왔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죽음의 철도 노선으로 불렸던 시암 – 버마 철도 구간 중 현재 남아 있는 방콕 – 남톡 구간을 달리며 일본 제국주의의 대동아 공영이라는 미명 아래 벌어진 역사의 한 부분을 돌아보는 시간을 가졌다. 대동아공영권의 울타리를 철도로 달린 그 이야기를 <도쿄 야스쿠니에서 칸차나부리 죽음의 철도까지>라는 부제로 몇 차례에 나누어 소개한다.

베트남, 라오스, 캄보디아를 포함한 인도차이나를 장악한 프랑스는 태국에도 욕심을 냈다. 태국은 인도와 버마를 점령한 영국과 인도차이나반도를 식민지로 삼은 프랑스 양쪽으로부터 압박을 받았다. 오랜 기간 앙숙이었던 영국과 프랑스는 태국이 일방적으로 상대국에게 넘어가는 것을 경계했다. 또한 태국이 벌인 특유의 외교가 독립을 유지하는데 도움이 되었다. 이런 가운데에서도 프랑스는 태국과 계속 충돌하면서 동쪽의 태국 영토를 조금씩 손에 넣었다.

제국주의는 거대한 괴물처럼 동남아시아 국가들을 갉아먹었다. 폭식으로 몸이 터질 듯 했지만 설령 몸이 뒤뚱거릴지라도 아랑곳하지 않고 식탐을 부렸다. 프랑스는 인도차이나반도만으로도 숨이 차고 있었다. 베트남을 비롯해 인도차이나반도 곳곳에서 벌어지는 독립운동을 감당하기에도 어려운 실정이었다. 프랑스는 몇 번씩이나 인도차이나반도를 적당한 가격에 일본에 넘기려다 포기하기도 했다. 2차대전 유럽 전선에서 독일의 프랑스 점령은 일본에 자신감을 주었다. 일본군은 독일의 괴뢰정부가 된 비시 프랑스 관할 동아시아 식민지를 좋은 먹이감으로 삼았다. 인도차이나 북부를 점령한 일본군은 내친김에 인도차이나반도 전체를 점령하기로 했다.

1941년 6월 25일 일본군 수뇌부는 대본영 회의를 통해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남부 장악을 결정했고 7월 2일 어전회의는 군의 결정을 허가했다. 일본군은 속전속결로 7월 28일 인도차이나 남부를 점령했다. 태평양 전쟁의 트리거가 당겨지는 순간이었다. 미국과 영국은 일본군이 인도차이나 남부로 진주할 경우 일본에 대해 경제제재를 하기로 합의했었다. 미국은 8월 1일 모든 침략국에 대한 석유 수출 금지를 발표했다. 석유 소비량의 80%를 미국으로부터 수입하던 일본은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일본군 전쟁 수행을 위한 비축 석유는 1년 6개월치에 불과했다. 일본군 수뇌부에서 미국과의 개전론이 급부상했다.
▲인도차이나 반도와 태국을 포함하는 1941년 일본군의 점령지를 나타내는 지도 - 싱가포르 국립박물관 ⓒ박흥수
▲1942년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자 말레이반도와 싱가포르는 일본군의 수중으로 떨어졌다 - 싱가포르 국립박물관 ⓒ박흥수
1941년 12월 7일, 하와이 진주만 상공에는 붉은 원을 날개에 새긴 전투기 400여대가 하늘을 뒤덮었다. 태평양전쟁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실제 전쟁은 동남아시아 전선에서 먼저 시작됐다. 진주만 공습 1시간 전 일본 남방군 제25군은 말레이반도 코타바루(Kota Bharu)에 상륙했다. 가볍게 영국군 수비대를 제압한 일본군은 12월 25일 홍콩, 1942년 1월 2일 마닐라, 2월 15일 싱가포르, 3월 8일 버마 랑군까지 거침없이 밀어붙였다.

일본군이 싱가포르를 함락하자 일본 열도는 승리의 기쁨으로 들썩였다. 태평양 전쟁에 비판적이었던 지식인들조차 싱가포르 점령을 역사적 쾌거라고 주장하며 흥분했다. 조선의 지식인들도 마찬가지였다. 대국 미국을 기습해 전과를 올리고 동남아시아를 파죽지세로 평정하는 일본을 보고 조선의 많은 지식인들은 대일본제국의 천년왕국을 확신했다. 주저하던 이들이 앞다투어 친일의 길로 뛰어들었다. 조선의 주요 도시에서는 동원된 초중학생들을 앞세워 "우리 일본"의 싱가포르 함락 축하 대중 집회가 열렸다.

작가들도 나섰다. 노천명은 재빠르게 시를 지어 일본군의 싱가포르 함락을 칭송했다.

아세아의 세기적인 여명은 왔다

영미(英米)의 독아에서

일본군은 마침내 신가파를 뺏아내고야 말았다

.....................

일본의 태양이 한번 밝게 비치니

.....................

대동아 공영권이 건설되는 이날

.....................

젖과 꿀이 흐르는 이 땅에

일장기가 나부끼고 있는 한

너희는 평화스러우리 영원히 자유스러우리

.....................

우리 이날을 유쾌히 기념하자

일본과 그 추종세력의 환호와 달리 싱가포르 곳곳에서는 일본군에 의한 학살이 자행됐다. 항일 세력을 소탕한다는 명분 아래 화교나 중국계 싱가포르인들을 모아 총검으로 찔러 죽였다. 1959년 봄 일본 기업이 싱가포르에 공장을 세우는 건설 현장에서 백골이 무더기로 발견되면서 묻혀있던 학살 증거가 드러났다. 공장 조성을 위해 택지를 개발할 때마다 쏟아져 나오는 백골들은 싱가포르인들에게 지난 전쟁의 고통과 상처를 떠올리게 했다. 싱가포르 정부는 1962년 4월 일본 정부에 보상을 요구했다. 5년간의 협상 끝에 1967년 9월, 일본 정부는 싱가포르와 말레이시아 정부에 5000만 싱가포르 달러(약 29억엔)을 보상했다. 일본은 유독 한국에 대해서만 사죄와 보상을 외면하고 식민지 침략의 과오를 인정하지 않는 태도를 보이고 있다. 이런 가운데 일본의 침략이 축복이었다고 거침없이 이야기하는 한국 사람들을 보는 것은 슬픈 일이다.

▲싱가포르 점령기 일본의 선전포스터-이미지와 달리 싱가포르에서는 학살이 자행됐다 - 싱가포르 국립박물관 ⓒ박흥수
▲싱가포르 진격에 사용된 일본군 전차 - 싱가포르 국립박물관 ⓒ박흥수
▲싱가포르 함락을 다룬 일본의 선전 영화 포스터 - 싱가포르 국립 박물관 ⓒ박흥수
태국으로 향하는 비행기 안에서 에릭 로맥스의 <레일웨이 맨>을 다시 펼쳤다. 나는 1942년 태평양 전쟁의 한가운데로 들어갔다. 멀쩡해 보이는 군대 조직도 공세를 받게 되면 홍수에 무너지는 둑처럼 속절없이 붕괴된다. 장군들은 우유부단에 빠지고 부대들은 고립되며 전투 의지는 소멸된다. 홍콩, 필리핀, 인도네시아, 말레시아, 싱가포르에 주둔하던 수만 명의 영국군, 오스트리아군, 미군들은 고스란히 일본군의 포로가 됐다. 이들 포로들은 아시아 전역에 급조된 연합군 포로수용소에 수감되었다. 비교적 운이 좋았던 일부 영국과 오스트리아 군 포로들은 조선으로 이송돼 본소인 경성 포로수용소와 분소인 인천, 흥남의 세 곳으로 분산 수용됐다. 경성으로 배정된 포로들은 430여 명에 이르렀는데 이중 360여 명은 싱가포르에서 온 군인들이었다. 포로들은 서울역과 남영역 사이 철길 옆 현재 신광여중고 자리에 마련된 수용소로 이송되었다. 포로들은 연합군이 경성 폭격을 시도할 경우 수용소 인근 일본군 사령부를 보호하기 위한 인간방패용 인질이었다. 연합군 포로들은 일본군 육군 창고에서 노역을 하거나 경성(서울)역이나 한강 다리로 불려 나가 강제노동을 했다. 1945년 8월 15일 조선해방은 용산 연합군 포로수용소의 문도 열었다. 3년간의 포로 생활을 마친 연합군 수감자들은 해방의 기운이 가득한 경성 거리로 나올 수 있었다. 방콕 주변으로 이송된 연합군 포로들은 운이 나빴던 축에 속한다. 조선과 달리 태국은 남방전선 최전방 지역의 허브였기 때문이었다. 에릭 로맥스의 증언을 들어보자.

"다른 포로 24명과 함께 기차 화물칸에 올랐다. 열린 창을 통해 스쳐 지나가는 푸른 들판과 진흙탕이 눈에 들어왔다. 이따금 일렬로 심어놓은 고무나무들이 수십 킬로미터씩 질리도록 이어졌다......기차가 잠깐 멈춘 사이 나는 밖으로 얼른 뛰어나가 엔진부터 살펴보았다. C56이었다. 내가 아는 한, 원래 오사카에서 만들어진 기관차지만 말라야-시암 트랙 운행을 위해 더 협소한 미터 게이지로 변경한 게 틀림없다. 기차를 식민지까지 옮겨온 것으로 보아 이곳에 오래 머물 의도가 분명했다. 갑자기 화장실이 급해졌다. '기본생리 해결'문제가 참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을 때 나는 옆 동료에게 마지못해 도움을 청했다. 양동이로 쓸만한 물건도 없어 결국 네 명이 달리는 화차 문간에서 나를 붙잡아주는 동안 겨우겨우 일을 볼 수 있었다. 신체 접촉을 꺼리는 나로서는, 더군다나 이 공개적인 '친밀함'이 무척이나 당혹스러웠다. 나는 아직까지도 이 일을 내 생애 가장 수치스러운 경험으로 기억하고 있다....싱가포르에서 1,600킬로미터 이상 달린 끝에 드디어 반퐁역에 도착했다. 하차 명령을 받고 내려서는 순간 나는 뻣뻣하게 굳어버렸다. 이제 원하든 원치 않든 철도노동자가 된 것이다."

싱가포르를 출발해 말레이반도를 종단, 방콕 서쪽 외곽 반풍역까지 이동한 여정이 담겨있다. 연합군 포로들은 반퐁역과 농플라독, 칸차나부리, 남톡 등 버마로 향하는 철도 노선 곳곳에 배치되었다. 한겨울 추위를 뒤로하고 6시간 비행 끝에 도착한 방콕의 공기는 방문자를 뜨겁게 감쌌다. 80여 년 전 전략적 요충지였던 태국은 이제 세계적 관광지로 탈바꿈했음을 보여주듯 입국심사대 앞으로 다양한 국적의 사람들을 줄 세웠다. 공항에서 예약한 유심을 찾아 갈아 끼우고 숙소로 향하는 차량을 기다리는 중에도 세계 곳곳의 언어가 대기를 채웠다. 오후 4시가 안 돼 공항에 착륙했지만 숙소에 도착했을 때는 어둠이 깔렸다. 체크인을 마치고 방콕의 유명한 여행자거리 카오산로드를 목적지로 택시 서비스 그랩을 호출했다. 한때 배낭여행자들의 성지로 유명했던 카오산로드는 밤이면 뜨거운 유흥가로 변신하는 곳이다. 300미터도 채 되지 않는 짧은 거리에 방콕의 밤을 압축해놨다. 마사지샾, 기념품점, 주점이 들어서 있고 길을 따라 온갖 물건과 음식을 파는 노점 수레가 이어져있다. 길을 걷다 보면 한국어, 중국어, 일본어, 영어, 스페인어, 독일어, 러시아어가 태국어와 뒤섞여 돌림노래처럼 울린다. 아마도 이토록 짧은 거리에 다양한 국적과 인종을 모아 놓은 국제적 용광로는 전 세계를 통틀어 몇 군데 되지 않을 듯싶다. 어쩌면 태국의 근대사를 생각하며 걷기에 적합한 장소는 국제거리 카오산로드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베트남 사람들이 세계 최강 미국 군대와 싸워 이겼다는 자부심을 갖는다면 태국은 역사상 한 번도 외세의 식민지가 되지 않고 독립을 유지했다는 긍지를 갖고 있다. 태국이 자랑하는 독립의 역사는 고도로 복잡한 국제정치가 만들어 낸 산물이었다. 태국의 외교는 밤부(Bamboo) 외교, 즉 대나무 외교로 불린다. 태국은 국제 정치 역학에 따라 대나무처럼 극단적으로 휘어지는 외교전략을 펼쳤다. 물론 전략의 기준은 국익이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열린 파리의 승전 퍼레이드에 시암 정부가 파병한 태국군 병사들도 참가했다. 영국과 프랑스와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려 했던 시암 정부는 제1차 세계대전에서 영국, 프랑스와 함께 독일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 맞서 싸웠다. 덕분에 베르사유 평화회의의 한 자리를 차지한 시암 정부는 시암의 완전한 주권 회복을 주장했다. 19세기 영국과 프랑스 등 서구 열강들과 맺은 불평등 조약을 폐기해야 한다는 의미였다.

1939년 국호를 시암에서 태국으로 바꾼 정부는 1942년 12월 그동안의 중립 정책을 포기했다. 일본이 진주만을 공격하고 말레이반도를 장악하자 태국 정부는 일본을 선택했다. 태국은 일본과 군사동맹을 맺음으로서 2차 대전 추축국의 일원으로 합류했다. 일본은 말레이반도와 버마 침략의 근거지로 삼을 태국이 필요했다. 일본군은 태국 곳곳에 군사 기지를 두고 버마로 향하는 태국 서부 종단 철도 건설에 나섰다. 태국은 자국 내 일본군의 자유로운 활동을 보장했다.
▲야스쿠니 신사에 설치된 가미가제 특공용사 동상과 같은 포즈로 서있는 전투기 조종사를 표지로한 애창가요집 - 싱가포르 국립박물관 ⓒ박흥수
일본이 무너지자 태국은 미국을 선택했다. 1950년 발발한 한국전쟁은 제2차대전 이후 벌어진 대규모 국제전이 되었다. 태국은 재빨리 남한에 파병을 했다. 파시즘 대 반파시즘이었던 세계의 전선은 자본주의 대 공산주의의 싸움으로 변했다. 태국은 향후 국제정치를 주도할 미국의 편에 서는 길을 택했다. 미국은 일본을 동아시아에서 소련과 중국에 대응하는 하위 전략 파트너로 삼았고 동남아시아에서는 필리핀과 태국을 선택했다. 베트남과 캄보디아, 라오스에 차례로 공산주의 정부가 들어서자 태국은 동남아시아에서 미국의 이해를 관철시키는 핵심 국가가 되었다. 태국의 대나무 외교 정책은 현재 진행형이다. 미국과의 동맹을 과시하면서도 중국과의 협력도 놓지지 않고 있다. 미중대결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일방적으로 미국의 어깨에 기대지 않고 있다. 2023년 7월에도 태국은 자국으로 중국군을 초청해 합동 연합군사훈련을 실시했다. 동남아시아의 많은 나라들이 항일 투쟁을 벌였고 일본에 전쟁 책임을 물었지만 태국만큼은 일본과 갈등을 벌이지 않는 이유는 동맹국이었기 때문이다. 태평양 전쟁 이전에도 태국은 일본에 우호적이었다. 프랑스의 영토 분쟁에서 일본이 태국편을 들어줬기 때문이다. 1931년 관동군이 전격작전을 벌여 만주를 장악한 만주사변 당시에도 태국은 일본 편에 섰다. 1933년 만주사변에 관한 국제연맹 총회의 장에서 태국 정부는 일본 규탄 안에 홀로 기권표를 던지고 1941년 8월에는 만주국을 정식 승인했다. 일본이 버리고 간 C5631호 증기기관차를 운행하던 태국 정부가 일본으로 기관차를 보낸 것은 태국-일본 우호의 증표였다. 전후 경제 부흥기에 일본은 태국에 대규모 투자를 했다. 그 결과 C56계열 증기기관차 대신 도요타를 비롯한 수많은 일본산 자동차가 태국 땅을 달린다. 인프라, 전자 회사들이 태국에 깊게 뿌리 내렸다. 현재도 태국 사람들이 제일 선호하는 동아시아 국가는 일본이다. 2023년 U17 아시안컵 남자축구 결승전에서 한국과 일본이 만났다. 두 팀은 공방을 벌였지만 전반전 막판 태국 심판의 석연치 않은 판정으로 한국 선수가 퇴장을 당했고 승패의 추는 급격히 일본으로 기울었다. 일본은 아시아의 강팀으로 여겨지는 호주와 우주벡과의 경기에도 태국 심판이 배정됐고 이때도 판정 논란이 있었다. 한국과 일본의 축구 국가대항전이 열릴 때 태국 심판이 선정된다면 한국 선수들은 훨씬 더 열심히 뛸 각오를 해야 할지도 모른다.
▲C5623호 기관차가 견인하는 열차에 탑승하기 위해 모여선 연합군 포로들 - 야스쿠니 전쟁박물관 ⓒ박흥수
▲칸차나부리 콰이강의 다리 역에 전시되어 있는 연합군 포로 수송에 쓰인 C5623호 증기기관차 ⓒ박흥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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