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리는 기차에서 본 세상> 을 연재 하고 있는 자칭·타칭 '철도 덕후' 사회공공연구원 박흥수 철도 전문위원은 지난 1월 말에서 2월 초까지 태국 철도 답사를 다녀왔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죽음의 철도 노선으로 불렸던 시암 – 버마 철도 구간 중 현재 남아 있는 방콕 – 남톡 구간을 달리며 일본 제국주의의 대동아 공영이라는 미명 아래 벌어진 역사의 한 부분을 돌아보는 시간을 가졌다. 대동아공영권의 울타리를 철도로 달린 그 이야기를 <도쿄 야스쿠니에서 칸차나부리 죽음의 철도까지>라는 부제로 몇 차례에 나누어 소개한다.
칸차나부리 이틀째 아침, 100바트에 그랩 택시를 호출해 버스터미널로 향했다. 전형적인 구조의 버스터미널에는 여러 방향으로 가는 버스들이 승강장에 서 있었다. 목적지인 헬파이어 패스행 버스가 서 있는 곳은 쉽게 찾을 수 있었다. 붉은색 8203번 버스가 손님을 기다리고 있었다. 엔진 룸이 운전석 옆에 있는 구형 버스였다. 이런 형식의 버스는 만난 지 최소한 30년은 됐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고 버스에 오르는데 커플로 온 외국인 중 남자가 반가운 체를 하며 국적을 물었다. 코리아라는 대답에 아마도 북한에는 이런 버스가 있을 거라며 농을 쳤다. 어? 당신 내가 남한 사람인 거 어떻게 확신해? 버스는 오전 9시 30분에 터미널을 출발해 북쪽으로 이어진 323번 국도를 타고 달렸다. 버스의 모든 창문과 앞뒤 출입문을 활짝 연 채 달린 덕에 덥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대신 운전기사가 엔진이 터질 듯 악셀을 밟는 바람에 어디든 꽉 붙들어야 했다. 안전벨트는 처음부터 없었던 듯 보이는데 속도는 시속 90~100킬로미터를 넘나들었다. 그렇게 한 시간 반쯤 달린 끝에 헬파이어 패스 기념관 입구에 도착했다. 정식 명칭이 헬파이어 패스 해설 센터 및 추모의 답사길(Hellfire Pass Interpretive Centre and Memorial Walkway)인 헬파이어 패스 기념관은 태국 군부대 안에 있어 입구의 경비 병사가 방문자를 맞이했다. 호의를 얼굴에 가득 담은 병사는 기념관까지 가는 길을 알려주고 돌아 나올 때 칸차나부리행 버스는 대략 2시간에 한 번씩 있지만 정확한 시간은 알 수 없으며 다른 교통수단은 없다고 알려주었다. 안내 병사와 인사를 나누고 땡볕 아래 연병장을 우회해 헬파이어 패스 기념관으로 들어갔다. 냉방이 잘 된 기념관 안으로 들어서자 기분이 한결 나아졌다. 안내 데스크로 가니 직원이 친절하게 기념관 관람 동선과 헬파이어 패스 탐사 코스에 대해 설명해주었다. 사전에 얻은 정보에 따르면 반드시 여권을 소지해야 입장이 가능하다고 했는데 따로 여권 확인은 하지 않았다. 기념관은 호주 정부의 주도로 만들어졌고 호주 보훈부가 관리하고 있다. 그만큼 헬파이어 패스에는 호주군 포로 희생자가 많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 헬파이어 패스는 지옥불 고개를 의미한다. 일본군 사령부가 태국-버마 철도 공사 기간 단축을 명령하자 공사는 24시간 내내 진행되는 방식으로 바뀌었다. 포로들은 하루 18시간 노동에 투입되었다고 한다. 일본군은 헬파이어 패스를 이루는 산악 지대에 철길을 내기 위해서 밤에도 횃불을 밝혀 공사를 이어갔다. 공사에 투입된 아시아인 노동자들과 연합군 포로들에게는 지옥불일 수밖에 없는 야간 조명이었다. 연합군 포로들은 일본군이 갑자기 공사에 속도를 내기 시작한 때를 스피도(Speedo)기간 으로 기억한다. 일본군이 틈만 내면 내뱉었을 스피드의 일본식 영어 발음이 스피도였기 때문이다.
리처드 플래너건의 <먼 북으로 가는 좁은 길>속으로 들어가 보자.
"일본인들이 갈수록 적어지는 식량과 갈수록 심해지는 구타로 포로들을 몰아붙였으므로, 포로들은 더욱더 오랜 시간 동안 더욱더 힘들게 일해야 했다."
"속도전이 삼십칠 일째 쉼 없이 진행 중입니다, 소령. 도리고 에번스가 입을 열었다…천황의 뜻을 이루어드리기 위해, 우리의 자원을 잘 이용해야겠지요. 최고의 철로를 건설하려면, 우리 병사들을 망가뜨릴 것이 아니라 쉬게 해줘야 합니다. 하루만 쉬면 병사들이 기운을 낼 수 있을 뿐만 아니라…하지만 그는 후쿠하라 중위의 통역을 들으며 웃음을 터뜨릴 뿐이었다. 그리고 재빨리 뭐라고 한마디 하고는, 후쿠하라가 도리고에게 그 말을 통역하는 동안 벌써 자리를 떴다. 나카무라 소령님은 포로들이 운이 좋다고 말씀하십니다. 천황 폐하를 위해 목숨을 바쳐 명예를 회복할 수 있으니까요."
"포로의 지휘관이자 상급 군의관으로서 도리고 에번스는 나카무라 소령에게 전날 네명이 죽고 밤사이에 두 명이 죽어 현재 838명의 포로가 남아 있다고 보고했다. 이중 67명은 콜레라에 걸려 콜레라 병동에 있었고, 179명은 중병에 걸려 병동에 누워있었다. 또한 가벼운 일 밖에 할 수 없을 만큼 아픈 사람도 167명이나 되었다. 그는 티크 목재에 기대어져 있는 포로들을 가리키며 오늘 아침에 아픈데도 사열에 나온 62명이 저기 있다고 말했다. 따라서 철로 공사를 할 수 있는 인원은 363명입니다. 후쿠하라가 통역했다. 나카무라 소령님께서 500명이 필요하다고 하신다…소령님이 병동에서 사람을 더 데려오라신다."
"지미는 이 안쓰러운 장례행렬을 따라 빗물이 뚝뚝 떨어지는 어두운 정글로 들어갔다. 나팔을 어깨에 걸친 채였다. 원래 나팔에는 가죽끈이 달려 있었지만 썩어버렸기 때문에, 매듭을 지은 누더기 천을 대신 달아 두었다…사람들이 새로 가져온 시체 세 구와 그들의 소지품을 장작더미 위로 올리는 동안…"
기념관 실내 전시실을 둘러보고 과거 철길이 놓였던 산길로 향했다. 언덕 위 전시실 뒤쪽 통로에서 연결된 나무 데크를 따라 길게 이어진 내리막길을 걸은 끝에 마침내 헬파이어 패스 위에 섰다. 깎아지른 절벽 아래 평탄한 길이 놓여 있다. 철길이 놓여 있던 길이란 걸 한눈에 알 수 있다. 헬파이어 패스에 서서 철길을 이루는 언덕 아래 지형을 살펴봤다. 멀리 쾌노이 강을 품은 험준한 산들이 이어졌고 그 앞은 무성한 정글로 덮여있었다. 일본군은 포로들의 탈출을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지형을 보니 짐작이 갔다. 탈출한 다 한들 마땅히 갈 곳이 없었기 때문이다. 헬파이어 패스를 걸었다. 철길이 놓여 있었던 길은 산모퉁이 절벽을 끼고 달리다가 절개지 한 가운데로 들어갔다. 철길 양쪽으로 수십 미터 높이의 암반이 둘러싸고 있다. 이 험한 산속에서 좋은 일자리라는 속임수에 끌려온 주변 아시아 국가의 노동자들과 연합군 포로들은 죽음의 행진을 이어갔다. 포로들의 증언에 따르면 바위를 깨는 장비 따위는 존재하지 않아 인간 드릴이 되어야 했다고 한다. 길 곳곳에는 아직도 철도 침목이 남아 있다. 당시에 쓰였을 녹슨 쇠못이나 연장들도 보인다. 한 곳에는 아마도 헬파이어 패스를 탐방로로 복원하면서 가져다 놓은 것으로 보이는 10여미터 정도의 철길이 놓여져 있다.
헬파이어 패스 답사길은 왕복 40분 정도 걸리는 Walk 1 코스가 있고 힌똑으로 이어져 3시간이 소요되는 Walk 2 코스가 있다. 칸유 또는 꼰유 커팅(Kanyu;Konyu Cutting)으로 불리는 헬파이어 패스의 깊은 계곡은 출발지에서 460미터 거리에 있는 Walk 1 코스 안에 있다. Walk 1 코스 끝자락에는 추모의 벽이 있다. 추모의 벽 암반 한쪽에는 헌신적으로 포로들을 돌본 호주군 군의관 에드워드 던롭(Edward Dunlop) 중령을 기리는 동판이 있다. 인도네시아 반둥 병원에서 일본군 포로가 된 던롭은 1943년 태국-버마 철도 현장 호주군의 지도자가 된다. 일본군 앞에서 당당했고 포로들에게 자비로웠던 의사 던롭의 헌신은 포로들 사이에 전설이 되었다. 변변한 약도 없는 말라리아 예방약인 소량의 키니네가 전부였던 말뿐인 병동에서 던롭은 환자들에게 최선을 다한다. 그의 부하였던 작가 도널드 스튜어트(Donald Stuart)는 "광기와 고통으로 가득한 우주에서 온전한 정신적 등대"가 되었다고 증언했다. 리처드 플래너건의 <먼 북으로 가는 좁은 길>의 주인공 도리고 에번스의 모델이 바로 던롭이었다. 이번에는 헬파이어 패스 또 다른 경험자 알리스테어 어쿼트(Alistair Urquhart)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일본인은 우리의 열악한 건강상태나 굶주림을 고려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들은 대나무나 소총으로 주기적으로 우리들의 등을 내려쳐 고개를 떨구게 만들었다. 아주 긴 첫날이었다. 만약 내가 이날이 정글 속에서 노예처럼 지내야 하는 750일 중의 첫 번째 날이었다는 걸 알았다면 나는 어린 아기처럼 울부짖었을 것이다." 어쿼트는 1919년 스코틀랜드 에버딘에서 태어났다. 1939년 열아홉의 나이로 영국군에 징집된 어쿼트는 싱가포르 포트 캐닝에 주둔한 고든 하이랜더 부대원으로 복무하다 일본군 포로가 된다. 싱가포르 주둔 연합군 포로들 대부분의 행선지가 시암-버마 철도 공사현장이었기에 어쿼트 역시 칸차나부리로 이송됐고 헬파이어 패스 구간 시공 첫날부터 공사에 내몰렸다. 어쿼트는 자신의 전쟁 체험 기록을 2010년 <잊힌 하이랜더;The Forgotten Highlander>라는 책으로 낸다. 어쿼트는 2016년 9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으니 그의 체험기는 91세에 발간된 것이다. 생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인지한 순간에도 기록을 남겨야 할 의지가 충만할 만큼 어쿼트의 삶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파란만장하다. 죽음의 철도 공사 현장에서 생존한 어쿼트는 싱가포르캠프로 이송되어 부두 노역에 동원되다 어느 날 갑자기 배에 태워진다. 일본군은 지속되는 전쟁으로 노동력이 부족하자 포로들을 활용하기로 결정했다. 이에 따라 싱가포르의 연합군 포로 일부가 일본행 수송선에 오르게 된다. 포로들은 화물칸으로 사용되는 배 밑창으로 쑤셔 넣어졌다. 수송선은 지옥선이라 불린 카치도키 마루와 라쿠요 마루 호 두 척이었다. 각각 950명, 1,317명의 포로들이 태워졌다. 이 두 수송선은 항해 중 미해군 잠수함 전대의 공격을 받아 침몰하게 된다. 라쿠요 마루호는 어뢰 공격을 받아 1,159명의 포로가 사망했다. 카치도키 마루호도 침몰 과정에서 431명의 포로가 목숨을 잃는다. 미 잠수함 전대는 자신들이 침몰시킨 배에 연합군 포로들이 있었다는 것을 뒤늦게 알고 침몰 해역으로 돌아와 구조에 나서 159명을 구출한다. 이렇게 살아남은 포로들로부터 연합군은 처음으로 태국-버마 죽음의 철도 이야기를 듣게 되고 경악하게 된다. 포로들의 충격적인 증언은 이후 런던과 캔버라 국회의사당에서 발표되고 일본군의 반인륜적 행위를 규탄하는 계기가 된다. 한편 수송선 카치도키 마루호에 있던 어쿼트는 배가 침몰하자 널빤지에 몸을 의지해 바다에서 5일을 표류하다 기적적으로 구출되어 일본으로 이송된다. 어쿼트는 나가사키 항에 도착 후 아소 탄광으로 보내졌다. 윤석열 대통령이 일본 정부의 강제동원 배상에 대한 대법원 판결 해법으로 한국 정부 등 제3자 변제안을 제시하자 전 일본 총리 아소 다로는 "중요한 결단"이라고 극찬했다. 아소 다로는 "창씨개명은 조선인이 원했던 것, 운 좋게도 한국 전쟁이 발발했다, 유대인 학살은 아무리 동기가 옳더라도 해서는 안되는 것, 전쟁으로 한국에서 난민이 발생해 일본으로 오면 당연히 사살해야 한다, 성희롱은 죄가 아니다, 재무성 담당 기자를 모두 남자로 바꾸자" 등 주옥같은 망언으로 세계인을 열 받게 해 망언제조기로 불린다. 극우 정치인 아소 다로의 증조부 아소 다키치는 아소 탄광의 소유주였다. 강제 동원된 조선인들 상당수가 아소 탄광에서 살아 돌아오지 못했다. 조선인과 연합군 포로들의 피와 땀으로 일군 재산으로 부를 축적했지만 아소 가문은 이 사실을 부정해왔다. 어쿼트 역시 자신의 책에서 아소 일가의 전쟁포로 노예 동원 사실 부정을 통탄한다. 그러나 연구자들이 증거를 찾아내고 실제 일했던 포로들의 증언이 쏟아지자 2009년 1월 아소 다로는 약 300명의 연합군 포로가 일했다는 사실만 인정했다. 아소 다로는 당시 5세에 불과해 사정을 알 수 없었고 강제 노동에 대해서는 개인적으로 아는 바가 없다고 발뺌했다. 어쿼트가 마지막으로 수용된 곳은 나가사키 시내에서 16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노동 수용소였다. 원자폭탄이 떨어질 때 어쿼트는 그곳에 있었다. 죽음의 철도 – 어뢰에 맞아 침몰 – 탄광 막장 노동 – 원자폭탄까지 비극적 사건이 한 인간에게 이토록 짧은 시기에 중첩되어 덮치는 일은 영화에서나 볼 수 있는 일일 것이다. 2016년 어쿼트가 세상을 떠나자 텔레그래프 지는 "죽음의 철도 생존자 사망"으로 헤드라인을 잡았고 BBC는 "나가사키 원폭 생존자 97세로 생을 마감하다"로 했다. 어쿼트의 책 부제가 그의 삶을 말해주는 듯하다. '믿을 수 없는 나의 극동 전쟁 동안의 생존 이야기'이다.
전후 전쟁 범죄자 처리를 위해 도쿄에서 열린 국제극동군사재판 판결문에는 일본군의 포로가 된 연합군 중 27%가 사망했다고 기술하고 있다. 지옥의 노동이 이어진 태국-버마 철도 건설에 투입된 포로들의 사망률은 이보다 더 높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독일 나치에 붙잡힌 연합군 포로의 사망률 3.6%와는 비교가 안 된다. 도쿄재판은 포로들의 죽음에 대한 책임을 어떻게든 물어야 했다. 연합군은 전쟁 내내 일본군의 포로 학대 정보를 포착하고 있었고 지속적으로 일본에 항의했다. 그러나 일본은 연합군 측의 요구에 응하지 않았다. 일본 패전 후 연합군은 포로 구출부터 서둘렀다. 일본군이 포로들을 모두 죽일까 봐 두려웠기 때문이다. 일본군은 왜 포로들을 그토록 심하게 학대했을까? '전진훈'에 그 비밀이 있다. 과거 한국에서 사병 생활을 겪은 사람들은 알고 있겠지만 훈련소에서부터 신병에게 주어지는 과제가 있다. 바로 주요 암기 사항이다. "육군 복무 신조", "군인의 길" 같은 규범을 외워야 했다. 군 출신자들에게 이 암기가 끔찍했던 것은 이를 빌미로 가혹행위가 자행되었기 때문이다. 워낙 반복해서 암송하기에 일정 시간이 지나면 내용은 다 외울 수 있게 된다. 하지만 선임병이나 당직 사관에 의해 불시에 요구되는 암기는 내용 숙지 여부와 무관하게 발음이나 눈빛, 태도 등 어떤 이유라도 붙여서 체벌이 가해졌다. 암기 불량 쫄병들은 한 참 구른 후 화장실 뒤편에 모여 담뱃불을 붙이고는 "군인의 길! – 나의 길이 아니다"를 속삭이며 불쌍한 자신들을 위로했다. 전진훈은 1941년 육군 대신 도조 히데키가 시달한 육군 훈령 제1호를 말한다. 육군 최고 사령관이 하달한 행동규범이기에 일본군은 전진훈을 달달 외워야 했다. 이 전진훈의 내용 중에는 "살아서 포로가 되는 치욕을 당하지 말고, 포로가 되는 오명을 남기기 전에 죽을지어다"라는 내용이 들어있다. 일본군은 포로가 된다는 것은 군인 정신과 사내다움을 포기하는 굴욕적인 일로 간주했다. 포로가 되기보다는 차라리 자결을 해야 한다고 주입했다. 태평양 전쟁 시기 연합군의 점령을 앞둔 수많은 일본군 진지와 민간인 마을에서 강요된 집단 자살이 자행되었던 것의 뿌리는 이 전진훈에 있었다. 전진훈의 정신은 곧바로 포로에게도 적용됐다. 일본군의 입장에서 연합군 포로들은 자결하지 못한 비겁한 종자들이었다. 어차피 죽어 마땅한 자들이었기에 포로들은 그에 합당한 대우를 받는 게 당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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