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이 일본과 정상회담을 사실상 거절했지만, 기시다 후미오(岸田文雄) 일본 총리는 여전히 북한과 고위급 접촉을 진행하고 있다고 밝혔다. 오는 10일(이하 현지시각) 일본 총리로는 9년 만에 미국 국빈 방문을 통해 미일 정상회담을 앞두고 있는 기시다 총리는 7일 미 방송 CNN과 진행한 인터뷰에서 북한과 "해결되지 못한 문제"들 및 양국 간 안정적 관계를 가져가기 위해 북한과 "고위급 접근"을 하고 있다고 밝혔다. 기시다 총리는 북러 간 군사 무기 교환과 중국과 러시아 간 합동 군사 훈련 등이 "국제 질서의 안정과 관련해 우려스럽다"며 "법치주의에 입각한 자유롭고 열린 국제질서 유지라는 확고한 메시지를 북한과 중국에 전달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고 방송은 전했다. 그러면서 "분열과 대립이 아닌 강력한 국제사회를 만들기 위해 그들과 협력해야 한다"며 "국제사회를 진전시키기 위해 분열과 대립이 아닌 협력의 분위기를 조성하기 위해 미국과 동맹국들과 협력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라고 말했다. 북일 양측의 접촉은 올해 초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기시다 총리에게 지진 발생에 대한 위문 전문을 보내면서 본격화됐다. 그러나 지난달 26일 김여정 당 중앙위원회 부부장이 본인 명의의 담화에서 일본과 어떠한 접촉이나 교섭을 하지 않겠다고 밝히면서 정상회담은 사실상 어려워진 것 아니냐는 전망이 나오기도 했다. 여기에 최선희 외무상 역시 지난달 29일 김 부부장과 유사한 내용의 담화를 발표하고 리룡남 주중국북한대사는 "28일 중국주재 일본대사관 관계자는 우리 대사관 참사에게 전자우편으로 접촉을 제기하여왔다"며 접촉 사실을 공개하는 등 회담 거부로 읽힐 수 있는 북한의 행보가 이어져 왔다. 북한이 일본과 회담을 거부하겠다고 밝힌 공식적인 이유는 일본인 납치자 문제다. 김 부부장과 최 외무상 등은 담화에서 납치자 문제는 이미 해결된 사안이라는 입장을 표했지만, 일본은 여전히 이 문제의 해결을 최우선 과제로 상정하고 있다. 특히 낮은 지지율을 좀처럼 극복하지 못하고 있는 기시다 총리가 북한과 정상회담을 통해 납치자 문제 해결에 나서려는 것이라는 관측이 나왔을 정도로 일본 입장에서는 북한과 접촉에서 납치자 문제가 핵심적인 사안이다. 일부에서는 납치 문제 뿐만 아니라 식민지 배상 책임과 관련한 사안도 회담 성사의 장애물이 되고 있는 것 아니냐는 관측도 나온다. 북한이 납치자 문제 해결에 대한 대가 및 식민 지배 배상을 이유로 일본에 상당한 지원이나 경제협력 사업을 요구할 경우, 기시다 내각과 자민당, 일본 사회가 이를 수용할 가능성이 높지 않기 때문이다. 북일 양측이 접촉에서 납치자 문제와 배상 책임 사안을 연계해 의견을 나눴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어 보인다. 일본이 원하는 납치자 문제의 해결 수준과 북한이 원하는 배상 액수를 두고 줄다리기를 벌이던 와중에, 북한의 의도대로 잘 풀리지 않으면서 김 부부장과 최 외무상 등이 공개적으로 회담 거부 담화를 발표한 것 아니냐는 분석이다.
한편 기시다 총리는 이번 방미를 통해 공격을 받을 경우에만 방위력을 행사한다는 평화헌법의 '전수방위'(專守防衛)에서 벗어나겠다는 뜻을 보이기도 했다. 그는 방송에서 "지정학적 긴장이 고조되면서 세계가 '역사적 전환점'에 도달했고, 일본의 방위 태세를 바꾸도록 강요하고 있다"고 말했다. 기시다 총리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과 중동 정세, 그리고 동아시아 정세 등 역사적 전환점에 직면해 있다"며 "이것이 일본이 방위력을 근본적으로 강화하기로 결정한 이유이며, 우리는 이러한 전선에서 일본의 안보 정책을 크게 변화시켰다"고 주장했다. 방송은 일본의 이같은 움직임에 대해 "2차 세계대전 군국주의 하에서 큰 피해를 입은 아시아의 다른 국가나 지역에서 논란이 없는 것은 아니다"라면서 "기시다 총리는 이 질문에 대해 답을 들었을 때 동아시아를 둘러싼 '심각하고 복잡한' 안보 환경을 지적했다"고 전했다. 기시다 총리는 "우리 이웃에는 탄도 미사일과 핵무기를 개발하고 있는 나라들과 불투명한 방식으로 국방력을 높이고 있는 나라들이 있다. 또 동중국해, 남중국해 등에서 무력으로 현상을 바꾸려는 일방적인 시도가 있다"고 말해 북한과 중국을 동시에 겨냥했다. 기시다 총리는 이번 미국 방문에서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과 양자 정상회담뿐만 아니라 처음으로 개최되는 미국, 필리핀과의 3국 정상회의에도 참석할 예정이다. 이는 남중국해에서의 중국 견제를 위한 행보로 풀이된다. 기시다 총리는 일본의 군사적 억제력과 대응 능력 구축이 미국과 동맹에 있어 "필수적"이라며 "이번 방문을 통해 미국과 일본이 협력을 더욱 발전시킬 것이라는 것을 세계에 보여주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런데 미일 양측 정부의 이같은 계획이 그대로 실행될지는 미지수다. 방송은 "일본 총리는 당과 관련된 스캔들에 이어 지지율이 좋지 않아 고심하고 있고, 곧 있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이 내년에 백악관에 복귀할 경우 정책이 바뀔 가능성이 높아졌다"고 진단했다. 방송은 트럼프 대통령의 복귀를 우려하는지에 대한 질문에 기시다 총리는 별다른 답을 하지 않았다고 밝혔다. 대신 "정당에 관계 없이" 미일 동맹 중요성을 폭넓게 인식하고 있다는 원론적인 답변을 내놨다고 전했다. 그는 "일본과 미국의 관계는 그 어느 때보다 돈독해졌다"며 "대선 결과와 상관없이 미국 국민들이 미일 관계의 중요성을 확실히 인식하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기시다 총리는 10일 바이든 대통령과 미일 양자 정상회담을 가진 뒤 11일 미 의회 연설 및 미국, 필리핀 등과 3자 정상회담을 예정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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