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리는 기차에서 본 세상> 을 연재 하고 있는 자칭·타칭 '철도 덕후' 사회공공연구원 박흥수 철도 전문위원은 지난 1월 말에서 2월 초까지 태국 철도 답사를 다녀왔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죽음의 철도 노선으로 불렸던 시암 – 버마 철도 구간 중 현재 남아 있는 방콕 – 남톡 구간을 달리며 일본 제국주의의 대동아 공영이라는 미명 아래 벌어진 역사의 한 부분을 돌아보는 시간을 가졌다. 대동아공영권의 울타리를 철도로 달린 그 이야기를 <도쿄 야스쿠니에서 칸차나부리 죽음의 철도까지>라는 부제로 몇 차례에 나누어 소개한다.
남톡에서 칸차나부리로 가는 열차가 탐크라세 역을 떠나 만난 목조 철교는 81년 전 완공 됐을 당시의 원형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었다. 달리는 열차에서 다리를 내려다보니 아찔했다. 쾌노이 강이 유유히 흐르는 가운데 절벽에 붙어있는 철도교를 만들기 위해 얼마나 많은 위험과 희생이 뒤 따랐는지 쉽게 상상할 수 있었다. 열차는 산과 벌판을 뒤로 밀어내며 남쪽으로 남쪽으로 달렸다. 정차 역에서는 보통 2분 정도 서 있었고 때에 따라 5분 이상 서 있을 때도 있었다. 왕옌 이란 역에서는 30분 넘게 서 있었다. 단선 철길이었기에 마주 오는 열차가 올 때까지 기다려야 했기 때문이다. 덕분에 한국에서는 정선선 정선 아우라지 구간에만 남아 있는 고전적인 열차 운행 방식인 통표 폐색식을 볼 수 있었다. 통표는 단선 구간에서 역과 역 사이에 단 하나의 열차만 다니게 해 사고를 막는 신호 방식이다. 원형 쇠고리 한쪽에 붙어있는 가죽 주머니에서 쇠로 된 통표를 꺼내 기계 장치에 넣어야 선로가 개통된다. 일종의 선로 개통용 열쇠인 것이다. 기관사는 승강장에 진입할 때 창문을 열고 팔을 뻗어 승강장에 설치된 통표 채집기에서 통표를 낚아 채야 한다. 기관사가 걷어 올린 통표는 다음 역까지 운행할 수 있는 허가증이다. 기관사는 통표를 다음 역에 도착해 전달해주고 이어진 구간을 가기 위한 새로운 통표를 받는다. 아주 오래전 경의선에서 서커스 단원처럼 통표를 건져 올렸던 일이 추억처럼 떠올랐다. 반대편 열차를 보내고 30분 정도 달린 열차는 갑자기 속도를 줄였다. 노란색 디젤기관차가 끄는 열차는 다리를 넘고 있었다. 콰이강의 다리다. 이른 아침부터 서둘러 헬파이어 패스와 남톡, 탐크라세와 럼섬 구간 절벽에 매달린 철길을 돌아보고 칸차나부리로 돌아오는 여정이 마무리 되고 있는 순간이었다. 어느덧 해는 서쪽 언저리에서 막 주황빛 옷으로 갈아입고 있었다.
<먼 북으로 가는 좁은 길>에는 최상민이라는 조선인 포로 감시병이 등장한다. 최상민의 별명은 큰도마뱀이다. 이학래의 별명이 도마뱀이었던걸로 봐서 최상민은 이학래를 모델로 한 것으로 보인다. 일본 패전 후 최상민은 싱가포르로 이송되어 감옥에 갇혔다. 얼마 전까지 연합군 포로들을 수감하던 곳이었다. 호주 군사법정에서 이틀 동안 열린 재판에서 최상민은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재판은 영어로 진행되었기에 전후 사정을 알 수도 없었다. 통역이 전해준 긴 문장의 마지막 말은 "피고는 교수형으로 처형될 것이다."였다. 최상민은 창이 감옥에서 포로 학대에 대한 최종 책임이 있었던 일본군 고타 대령이 무혐의로 석방되었다는 소식을 들은지 얼마 지나지 않아 형장의 이슬이 되었다. 전범 재판 동안 이름을 바꾸고 몸을 숨겼던 최상민의 상관들은 다시 부활해 전후 일본의 주요 요직을 차지하고 승승장구한다. 칸차나부리 콰이강의 다리 북쪽 건너편 강가엔 밤이면 환한 조명이 들어온다. 이곳에는 포로 수용소 캠프 구조물들이 있다. 포로 수용소(PRISONER OF WAR CAMP)라는 커다란 입 간판을 단 감시용 망루 밑에는 포장마차들이 늘어서 있다. 원래 포로들은 남쪽 강변을 따라 대규모로 조성된 캠프에 있었기 때문에 현재 있는 구조물은 관광객을 위해 지어진 것이다. 그나마 포로 수용소가 있었던 장소라는 것을 물리적으로 느낄 수 있는 상징물이다. 밤마다 달이 낮은 고도에서 밝게 빛났다. 1942년부터 45년까지 이곳에 있던 이들은 거의 모두 고향을 떠나온 사람들이었다. 그들에게 비친 달빛은 각자의 처지만큼 처량해 보였을 것이다. 그 처량한 신세들 사이에 조선인 청년들이 있었다. 태국의 일본군은 망연자실 상태에 빠졌다. 고위 장교들은 몸을 숨겼고 하급 장교나 하사관들은 조선인 포로감시원까지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이미 일본군 내에는 포로를 학대한 기억이 있는 사람들은 빨리 몸을 숨기라는 지시가 하달됐다. 물론 이 지시는 조선인 포로감시원들에게는 비밀이었다. 조선인 포로감시원들은 빨리 일본군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었으나 벗어난다 한들 마땅히 갈 곳도 없었다. 동남아시아 각지의 조선인 포로감시원들은 캠프를 마련해 모였다. 방콕에도 고려인회라는 캠프가 만들어졌다, 조선인들은 사찰 경내 건물의 처마 밑에서 잠을 자고 밥을 해 먹었다. 현지 화교들은 중국과 고려는 예부터 형제의 나라였다며 트럭에 음식물을 싣고 오는 등 조선인 포로 감시원들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다. 칸차나부리에서의 3박 4일 일정을 마치고 방콕으로 돌아가기 위해 콰이강의 다리 역에서 오전 6시 59분발 열차에 올랐다. 열차는 5분도 안 돼 다음 역인 칸차나부리 역에 도착해 승객을 태우고 다시 출발하다가 갑자기 정차를 하더니 후진을 하기 시작했다. 정차한 곳이 마침 건널목이어서 사고라도 났나 생각했지만 열차는 옆 선으로 선로를 바꿔 들어가고 있었다. 이곳에서 방콕 톤부리행 열차는 맨 뒤에 빈 객차 2량을 더 연결했다. 방콕에 가까워질수록 승객이 많아지는 모양이다. 승객을 객차에 태운 채 진행되는 연결 작업이 흥미로웠다. 연결된 두 객차의 공기호스가 체결되고 제동시험이 끝나자 열차는 다시 남쪽으로 달렸다. 건널목을 지날 때마다 등교하는 학생들이 열차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이렇게 평화로운 풍경을 품고 있던 철도가 전쟁의 소용돌이에 휩쓸렸을 때에는 광기와 공포를 실어나르는 장치였다. 방콕행 열차 안에서 79년 전 같은 길을 달렸던 조선 청년들을 생각했다. 패전 후 일본군은 더 이상 조선 군무원들을 챙기지 않았다. 청년들은 삶의 조건이 완전히 무너지는 현실과 조국이 해방됐다는 기쁨이 복합된 이상한 감정 상태에 놓였다. 이런 가운데 한시도 두려움을 걷어 낼 수 없었다. 일본군이 또다시 권리를 행사하려 들지 모르고 연합군이 조선인 포로 감시원을 어떻게 취급할지는 아무도 몰랐기 때문이다.
이학래는 방콕에서 조선으로의 귀국 날자를 기다렸다. 연합군 라디오 방송에서는 "연합군 포로를 학대한 자는 엄벌에 처한다."는 방송을 했으나 조선인 포로 감시병들 상당수는 포로를 학대했다는 인식이 없었다. 그렇게 사찰 생활이 계속되던 때 연합군측은 조선인들은 모두 9월 28일 고려인회에 모일 것을 통보한다. 조선인들이 고려인회에 모였을 때 자동소총으로 무장한 연합군이 둘러쌌다. 다음 날부터 "대면 지목"이 이루어졌다. 영국, 오스트레일리아, 네덜란드 순으로 6군데의 "대면소"가 생겼고 입장이 뒤바뀐 조선인 포로감시원들은 일렬로 이곳을 통과해야 했다. 대면소 마다 네댓 명의 포로들이 지나가는 조선인들을 관찰하다가 아는 얼굴을 골라냈다. 이렇게 이학래를 포함한 50여명의 포로 감시원이 추려졌고 모두 소지품을 빼앗긴 채 트럭에 실려 감옥으로 이송됐다. 이학래는 46년 4월 악명 높은 싱가포르 창이 감옥으로 이감됐다. 창이 감옥에서는 연합군에 의한 조선인 학대가 자행됐다. 일종의 앙갚음이었다. 곧 전범 재판이 시작되었다. 기소 내용은 어이없었다. 히로무라는 힌똑 수용소 소장으로 캠프 관리 장교였으며 부하의 폭행을 저지하지 않았다. 또 환자를 노동에 종사하게 했다는 3가지였다. 이학래는 "나는 군무원이다. 장교가 아닐 뿐 아니라 그런 권한도 없었다"라고 기소 내용을 부인했다. 하지만 재판 연락 연합군 장교는 "당신이 기소장을 받든 안 받든 이 기소장에 따라 재판한다"라고 통보했다. 그렇게 재판을 기다리던 이학래는 기소장이 각하되었다는 연락을 받았고 1946년 12월 26일 석방된다. 이듬해 1월 7일 싱가포르항에서 귀환선에 올라타서야 이학래는 드디어 고향으로 돌아간다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배는 항해 끝에 사이공 외해를 지나 홍콩에 도착했다. 홍콩 도착 다음 날 점심 설거지를 하고 있었는데 영국 장교가 세 명의 일본인 소환장을 들고 나타났다. 이학래는 3주 후 창이 형무소로 되 돌아와 중압감에 숨이 막히는 시간을 보낸다. 다시 진행된 재판에서 이학래는 교수형을 선고받는다. 전범이 된 조선 청년은 사형수가 되어 감옥 동료들이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는 것을 본다. 이학래와 같이 있었던 유일한 조선인 임영준은 사형 집행을 앞두고 "이학래씨가 감형되기를 기원합니다. 그리고 감형이 되어 나가면 하야시(林)라는 인간이 그렇게 나쁜 인간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려주십시오"라는 마지막 말을 남기고 형장으로 갔다. 1947년 11월 7일, 이학래는 자신이 호출되자 이제 생의 마지막 길을 가게 되는구나 생각했다. 하지만 연락장교로부터 들은 말은 20년으로 감형되었다는 사실이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이학래를 나쁜 놈이라고 일기에 썼던 호주군 포로 지도자 던롭 중령이 이학래 기소 진술서에 사인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전범처리위원회의 사인 재촉에도 던롭 중령은 이학래가 사형을 받을 정도의 중범죄자는 아니었다는 소신을 굽히지 않은 것이다. 죽음을 면한 이학래는 1948년 오트럼 형무소로 이송되었다가 1951년, 26세가 되던 해 전범 관리가 일본에 이관되는 것을 계기로 다른 죄수들과 함께 요코하마 항에 발을 내디뎠다. 처음 밟아보는 일본 땅이었다. 전범들은 모두 도쿄 이케부쿠로 역 동쪽의 스가모 형무소에 수감되었다. 수감된 일본인들은 출신 현에 따라 모임을 만들었고 조선인들은 따로 향수회를 조직했다. 스가모 형무소는 이전의 감옥과는 달리 자유스러운 분위기였다. 이학래는 평화그룹이라는 소내 공부 모임에 들어가 인문사회과학을 배우기 시작했다. 세계와 사회를 알아나간다는 희열이 이학래를 감쌌다. 이학래는 "스가모 대학"에서 다시 태어난다. 이때를 이학래는 전 인생을 통해 가장 열심히 공부했고 보람 있는 시간이었다고 회고한다.
"가고 싶어 간 것은 아니었지만, 그 교도소들은 저에게는 '국제 교양 대학'이었던 셈이었어요."
인문학을 공부한다는 것은 이 우주에서 나의 위치를 알아 가는 길이다. 나는 그저 하나의 객체가 아니라 역사와 환경 속에 존재한다. 종교나 사상, 국가의 이름으로 자행되는 악행에 맞서 내가 인간으로서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 또 어디로 가야 하는지 알려주는 나침반이 바로 인문학이다. 나라는 존재를 떠나 외부에서 나를 관찰하는 눈을 갖게 하는 인문학의 도달지점은 결국 휴머니즘이다. 이학래는 자신이 제국주의 전쟁 속에서 군국주의자들에 의해 희생당한 피해자임을 자각하게 된다. 이때부터 반드시 고향으로 돌아가야겠다는 생각 대신 일본의 사죄와 배상을 받아내야겠다는 각오를 다지게 된다. 조선인 전범들은 '동진회'를 조직하여 일본 정부에 조기 석방 및 차별금지와 제대로 된 사과와 보상을 요구하기 시작한다. 일본 정부는 1952년 <전상병자전몰자유족등원호법>을 정하여 태평양 전쟁에 참전했던 사람들에 대한 지원에 나섰다. 일본에서는 전범을 영웅시하는 분위기가 형성됐다. 스가모 전범 형무소에는 위문 물결이 일어 당대 유명 연예인과 프로야구 선수까지 위문 공연에 나섰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일본인에게만 국한된 것이었다. <원호법>은 국적조항을 만들어 적용 대상자를 일본인으로 국한했다. 일본이 패망했기에 조선인과 대만인 전범은 국적을 회복하게 되어 석방되어야 했다. 그러나 일본은 패전 당시 전범들의 국적이 일본인이었기에 교도소에서 형은 계속 살아야 하지만 실제 국적은 일본이 아니므로 원호와 보상은 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조선인 전범들은 동진회를 중심으로 법정 투쟁을 벌이고 정치계와 시민사회에 조선인 전범들의 기구한 운명을 알려냈다. 조선인 전범들을 혼신의 힘을 기울여 지원한 일본인들도 있었다. 의사였던 이마이 도모후미 선생은 스가모 형무소를 드나들다가 조선인 전범을 보고는 "왜 조선인이 구금되어 있는 걸까?"라는 의문을 갖고 이들의 사정을 알아보다가 일본이 "이런 엉터리 같은 일을 허용해도 되는 걸까"라는 생각에 생의 마지막까지 온 정성을 들여 조선인을 돕는다. 1956년과 57년에 걸쳐 전범들에 대한 가석방이 집행되면서 이학래를 비롯한 조선인 전범들도 세상으로 나온다. 그러나 아무것도 없는 조선인들은 당장 생계부터 해결해야 했다. 궁지에 몰린 조선인 석방자들에게 이마이 도모후미 선생은 사재를 저당 잡고 거금 200만엔을 마련해 택시회사 설립을 도운다. 이렇게 탄생한 택시 회사가 동진교통이었다. 이학래는 택시회사 일을 하면서도 일본 정부의 사죄와 "한국·조선인 BC급 전범자 보상 입법"을 추진하는 일에 힘을 쓴다. 또한 야스쿠니를 찾아가 동진회와 한국유족회의 이름으로 조선인 야스쿠니 신사 합사 철회를 요구하기도 했다. 야스쿠니에는 태평양 전쟁 중 일본군이나 군속으로 끌려갔다 숨진 조선인 2만 1천여 명이 합사되어 있다. 이 중에는 포로 감시원으로 있다가 전범으로 처형된 조선 청년들도 포함됐다. 1978년 도조 히데끼 등 14명의 A급 전범들이 비밀리에 합사되면서 야스쿠니는 태평양 전쟁의 영광을 기리는 장소가 되었다.
야스쿠니측은 전범은 연합군이 주도한 극동국제군사재판부의 주장일 뿐 야스쿠니에 안치된 영혼은 쇼와순난자(昭和殉難者), 즉 순교자라고 주장한다. 아시아 민중을 참혹한 전쟁에 몰아넣었던 책임자들이 영웅이 되어 안치된 곳에 조선인들은 유족도 모르게 강제로 합사당했다. 사실 전범들은 제대로 찾아내지도 못했고 그 결과 단죄도 할 수 없었다. A급 전범으로 인정된 소수의 전쟁 주도자들을 빼면 진짜 전범으로 처벌을 받아야 할 731부대에서 생체실험을 자행했던 일본군 고위 관계자도, 죽음의 철도 현장 곳곳에서 포로 학대를 진두지휘한 고위 장교들도 모두 손안에 든 묽은 진흙처럼 빠져나갔다. 이런 현실 속에서 영문도 모르고 일본의 전쟁 책임을 대신 짊어진 조선 젊은이들의 가혹한 운명은 누가 보상할 것인가? 게다가 자신의 뺨을 때려대며 능멸했던 일본군과 죽어서도 야스쿠니에 함께 있어야 하는 원혼은 어떻게 위로할 것인가? 1991년 이학래는 호주에서 열린 태국-버마 철도 심포지움에 방문해 자신이 관리하던 포로였던 던롭 중령을 만난다. 긴장감이 가득 찬 호주 국립대학 세미나실에서 전 군의관 던롭과 다른 다섯 명의 포로 앞에서 이학래는 머리 숙여 사죄한다. 분노가 풀리지 않는 눈길을 보낸 이도 있었지만 던롭은 이학래의 말을 지긋이 경청했다고 한다. 던롭은 이학래가 사형판결까지 받았다는 사실에 놀랐다. 던롭은 도마뱀으로 불렀던 이학래를 자신의 집으로 초청해 "당신에 관한 일은 이미 용서했습니다."라며 손을 맞잡았다. 17세에 사지로 끌려갔던 조선인 청년이 노인이 되어 일본 정부 당국이 해야 할 사죄를 대신했다. 한국인 BC급 전범 148명 중 23명은 사형을 당했다. 살아남은 이들은 10~12년여의 수감 생활 끝에 사회로 내동댕이쳐졌다. 사과도 보상도 없었다. 이학래는 2021년 3월 29일, 60년 세월을 일본 정부와 맞서 싸우다 세상을 떠났다. 조선인 BC급 전범 최후의 생존자였다. 조선인 전범 148명 중 129명이 포로 감시원이다. 부산 노구치 부대에서 동아시아에 배치된 포로 감시원은 3,016명인데 이 중에서 전범이 129명이나 나왔다. 이들은 일본군도 아닌 최말단 군무원 신분이었다. 난징학살, 싱가포르 학살, 생체실험 등 곳곳에서 전쟁범죄를 저지른 일본군 가운데 이만큼 높은 비율의 전범을 낸 부대는 없다. 일본은 처벌받아야 할 진짜 전범들 대신 가장 힘없는 조선인 포로 감시원들을 속죄양으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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