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의 저자이자 대표적 진보운동인, 정치인, 언론인이었던 홍세화 씨가 18일 서울 중랑구 녹색병원에서 별세했다. 향년 77세. 홍 씨는 작년 2월 전립선암 진단을 받은 후 투병생활을 이어왔다. 유족으로 부인 박만선 씨와 자녀 수현·용빈 씨가 있다. 빈소는 신촌 세브란스병원에 차려지며 장례는 '한겨레 사우장'으로 진행된다. 1947년 12월 서울 종로구에서 태어난 홍 씨는 1966년 서울대학교 공과대학 금속공학과에 입학했으나 이듬해 1967년 자퇴했다. 이후 다시 입시를 준비해 1969년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외교학과에 입학했다. 홍 씨는 대학 시절 연극반 활동 당시부터 민주화 운동에 뛰어들었다. 1977년 대학 졸업 후 무역회사에서 프랑스 상사원으로 재직하던 중 1979년 남민전(남조선민족해방전선) 사건에 연루된 그는 프랑스 파리에 망명 신청을 했고, 프랑스 정부가 이를 받아들여 줘 20년간 망명 생활을 했다. 당시 파리에서 택시기사 생활을 한 경험을 담아 1995년 출간된 책이 대중에게 프랑스의 '톨레랑스(관용)'를 알린 <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다. 책에서 그는 자신의 정치적 성향으로 인해 망명을 신청하게 된 자신의 사연을 프랑스인들이 이해하지 못했던 일화 등을 소개했다. 관련해 홍 씨는 "내가 국내에선 대단한 행동을 하고 있다고 믿었는데 프랑스에 와서 곰곰이 돌이켜보니 단지 저항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는 심경을 밝혔다. 독재 정권의 등장 여부에 따라 파리 동포 사회가 자신에게 보낸 시선이 달라졌다는 점, 프랑스에서 이방인으로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현실 등을 책은 이야기했다. 다른 한편으로 프랑스 사회의 관용과 일상에 스며든 민주주의 정신을 설명한 책은 국내에서 큰 화제를 낳았다. 홍 씨는 긴 망명 생활을 끝내고 2002년 1월 영구귀국했으며 곧바로 <한겨레>에 입사했다. 이후 2011년 <한겨레>가 발행한 <르몽드디플로마티크> 한국어판 편집인을 지내는 한편, 2015년부터는 비영리단체 장발장 은행의 은행장을 맡아 왔다. 한국 입국과 함께 그의 진보정치인 이력도 시작됐다. 홍 씨는 단순히 한국의 극우정당만 비판하던 인물이 아니었다. 민주당계는 물론, 진보진영 내 모순에도 그는 눈을 돌리지 않았다. 2002년 민주노동당에 입당한 그는 민주노동당이 자신의 성향과 맞지 않았다는 이유로 2008년 탈당했다. 2008년 홍 씨는 탈당의 변에서 "노무현 정권 창출에 성공한 세력이 청와대에서 '님을 위한 행진곡'을 합창하며 감격해했다. 그들에게 '님'은 '민중'이 아니라 '권력'이었다. 민주노동당도 마찬가지였다. 일하는 사람들의 민주노동당이 아니라 자아팽창자들의 권력의지의 전시장이었다"는 입장을 밝히며 민주노동당이 "이미 진보정당이 아닌" 상황이 됐다고 비판했다. 홍 씨는 당시 민주노동당 내 NL 세력을 특히 강하게 비판했다. 홍 씨는 그들을 두고 "미 제국에 맞서는 북한을 칭송하는 시각은 무엇보다 자신을 북한 권력과 일치시킬 뿐 북한 인민에게 일치시키지 않는 데서 비롯된다. 북한에 대한 인식상의 오류는 대개 여기서 온다. 얼마나 쉬운가. 자신은 이미 북한 인민이 아니니. 반미, 자주라는 '태양의 진리'만 외치면 된다"고 일갈했다.
이후 민주노동당이 분당하면서 홍 씨는 진보신당에 입당해 2011년 당 대표가 됐다. 이듬해 2012년 치러진 제19대 총선에서 그는 진보신당 비례대표 2번으로 출마했으나 낙선했다. 진보신당이 노동당으로 이어지면서 홍 씨는 노동당 고문을 지내 왔다. 문재인 정부를 향해서도 홍 씨는 비판의 날을 세웠다. 홍 씨는 2020년 <한겨레> 칼럼에서 문 전 대통령을 '임금님'에 빗댄 비판 글을 써 민주당 지지자들의 공격을 받기도 했다. 당시 글에서 홍 씨는 문 전 대통령을 두고 "자신감을 피력했을 때는 대통령이지만, 오늘 전혀 다른 결과 앞에서는 질문을 받지 않는 임금님이 된다. 당 대표 시절 지자체장의 잘못으로 선거를 다시 하게 될 때엔 후보를 내지 않겠다고, 또 페미니스트 대통령이 되겠다고 공언했지만, 서울특별시장·부산광역시장의 미투 문제와 부닥치면 임금님이 되어 침묵한다"고 꼬집었다. 2022년 <월간중앙>과 인터뷰에서 홍 씨는 국민의힘과 더불어민주당이 적대적 공생관계를 구축해 한국 진보의 길을 막고 있다고 양자를 비판하기도 했다. 인터뷰에서 홍 씨는 윤석열 대통령을 두고 윤 대통령이 외치는 '자유'는 "국민의힘의 전신인 자유당~민주자유당~자유한국당에 담긴 자유에서 멀지 않다"며 "그 자유는 공산세계로부터 지켜야 하는 자유세계라는 상상의 공동체에 바탕을 둔 것으로, 우리 현대사에서 학살, 구속, 고문 행위로 자유권의 기본인 신체의 자유를 이루 말할 수 없이 유린한 자유"라고 비판했다. 홍 씨는 한편으로 586세대를 비판하며 "(기성세대가 비판하는) 2030이 더 건전하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아울러 그는 한국이 가야 할 방향으로 기후위기에 대응하는 탈성장-사회 연대를 제시했다. 이는 그가 정치 생활을 하며 항상 강조한 방향이다. 홍 씨는 2016년 <프레시안> 칼럼에서는 한국 교육을 신랄하게 비판하기도 했다. 그는 글에서 "한국 사회에서의 견딤은 내게 '분노보다는 슬픔을, 슬픔보다는 쓸쓸함'을 요구한다. 그중에서도 가장 큰 쓸쓸함을 안겨 주는 것은 한국의 교육 현실"이라며 "노동자와 서민의 자식에게 한국의 교육은 그 황금 같은 시간을 온통 저당 잡힌 채, 없는 돈 들여가며 고생하지만 결국 기득권 세력에게 자발적으로 복종하는 바보 되기"일 뿐이라고 일갈했다. 아울러 홍 씨는 스웨덴 입양인의 말을 빌려 학생을 입시 기계로 키운 한국 현실을 두고 "한국 대학생들의 사회 문화적 인식의 수준은 스웨덴의 중학생 수준"이라고 개탄하기도 했다. 평생 진보의 길을 고민한 고인의 별세 소식에 많은 이와 정당, 사회단체가 안타까움을 표했다. 노동당은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 평등-생태-평화의 한국사회와 진보정당운동의 꿈을 놓지 않고 헌신하신 홍세화 고문님의 유지를 받들겠다"며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고 밝혔다. 정범구 전 주 독일 대사는 자신의 페이스북에 "어제 전화했을 때, 간병인이 대신 전화를 받을 때까지도 이리 빨리 떠나실 줄은 몰랐다"며 "모진 세월을, 늘 그 우수 젖은 깊은 눈길 아래 감추고, 다른 이들의 말을 그윽히 경청하던 형의 그 모습, 이젠 영영 뵐 수 없다"고 밝혔다. 사회단체 전쟁없는세상은 "홍세화 선생님은 병역거부운동과 전쟁없는세상의 든든한 후원자셨다"며 "기회주의에 눈 돌리지 않고도 세상의 평등과 평화, 인권과 진보를 위해서 고결한 방식으로 싸울 수 있다는 것을 몸소 보여주셔서 감사하다"고 추모의 글을 올렸다. 한겨레출판은 "나는 살아서 즐거운 '아웃사이더'이고 싶다. 시어질 때까지 수염 풀풀 날리는 척탄병이고 싶다"는 홍 씨의 글을 인용해 "한국 사회에 '똘레랑스'를 전했던 작가이자 언론인, 사회운동가인 홍세화 선생이 오늘 별세하셨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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