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리는 기차에서 본 세상> 을 연재 하고 있는 자칭·타칭 '철도 덕후' 사회공공연구원 박흥수 철도 전문위원은 지난 1월 말에서 2월 초까지 태국 철도 답사를 다녀왔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죽음의 철도 노선으로 불렸던 시암 – 버마 철도 구간 중 현재 남아 있는 방콕 – 남톡 구간을 달리며 일본 제국주의의 대동아 공영이라는 미명 아래 벌어진 역사의 한 부분을 돌아보는 시간을 가졌다. 대동아공영권의 울타리를 철도로 달린 그 이야기를 <도쿄 야스쿠니에서 칸차나부리 죽음의 철도까지>라는 부제로 몇 차례에 나누어 소개한다.
칸차나부리를 향해 방콕 톤부리역을 출발할 때부터 역과 선로변 풍경을 유심히 살펴봤다. 톤부리 역에서 멀지 않은 사라야(Salaya) 역은 일본 시골 마을에 온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로 역사며 주변 건물이 일본풍이었다. 톤부리부터 사라야, 농 플라독 역까지 일본군이 조성한 대규모 보급 기지와 포로 수용소가 있었던 곳이었기에 그 흔적이 남아 있다. 일본이 대동아 공영을 표방하며 만든 인프라는 그 계획과 실행의 주체가 명확히 나누어져 있었다. 일찍부터 수탈한 조선을 시작으로 대만, 인도네시아, 말레시아, 싱가포르, 태국까지 일본의 대동아 제국을 건설한 이들은 가장 미약한 민중들이거나 전쟁 포로들이었다. 일본 군국주의가 설계한 프로그램에 따라 동아시아 곳곳의 철도와 광산, 논과 밭에서는 제국의 영광을 실현하기 위해 무고한 사람들이 소진됐다. 연합군 포로들과 조선인 포로 감시원들은 대동아 공영 실현을 위한 궁극적 목표인 인도로 가는 길에 던져졌다. 그 시작점은 쇼난(昭南)이었다. 쇼와의 남쪽 섬, 태평양 전쟁 시기 일본의 연호를 가져와 쇼난이라고 이름을 바꿔버린 싱가포르에서 시작된 비극은 철길을 타고 말레시아 반도를 지나 태국 반퐁, 칸차나부리를 거쳐 버마로 이어졌다가 다시 싱가포르로 수렴된다. 앞서 밝혔듯이 이번 여행은 리처드 플래너건의 <먼 북으로 가는 좁은 길(이하 좁은 길)>이라는 한 권의 소설에서 시작되었다. <좁은 길>은 죽음의 철도 공사 구간에서 호주군 포로들이 겪은 일을 담고 있다. 이 소설의 주인공 도리고 에번스 대령은 실제 호주 군의관으로 포로들을 지도했던 던롭 중령을 모델로 삼았다. <좁은 길>이 단지 포로들의 고통을 이야기하는데 그쳤다면 단 한 권의 독서로 끝났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좁은 길>에는 조선인 포로감시원 최상민이 등장하고 그가 싱가포르 창이 감옥에서 형장의 이슬로 사라질 때까지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또 일본군 고위 장교들은 전범 색출이 끝날 때까지 어떻게 몸을 숨겼다가 과거를 세탁한 후 잘 먹고 잘살게 되는지 보여준다. 조선인 청년 이야기는 책을 덮고 나서 다시 다른 책을 찾아 나서게 했다. 한 권의 책이 다른 책을 이어주는 일은 내가 좋아하는 독서 방법 중 하나인 파생 독서이다. 어떤 주제에 대해 계속 관심을 갖다 보면 이전에는 그냥 지나쳤을 책에도 눈길을 주거나 다시 한번 세심히 살필 수 있게 된다.
<좁은 길>이 이어준 에릭 로맥스의 <레일웨이 맨>은 칸차나부리 포로수용소를 경험한 실제 이야기이다. 일본군의 무지막지한 폭행과 고문을 적나라하게 고발하고 있다. 또 한 편으로는 용서에 대해 이야기한다. 피해자가 고통을 벗어나지 못한 상태에서 가해자가 느끼는 구원은 이율배반이다. 피해자는 신음하고 있는데 신으로부터 죄를 용서받았기에 천국에 갈 수 있다면, 그 천국은 누구를 위한 것인가? <좁은 길>은 1867년부터 1951년 사이에 일본 천왕을 위해 목숨을 바친 이백만 명 이상의 명단이 야스쿠니에 봉안되어 있으며, 이 신성한 신사에 봉안되는 것은 모든 사악한 행동을 면죄 받는다는 뜻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2차대전 당시 설혹 죄를 지었더라도 야스쿠니를 통해 용서를 받고 거듭났으므로 굳이 피해자에 대해 사과나 용서를 빌 필요가 없어진다. 야스쿠니는 죄를 털어내는 편리한 창구인 셈이다. 칸차나부리 죽음의 철도 박물관 기념품 샵에 진열된 오토 크리프트의 <버마철도 – 시각적 회상>을 집어든 것도 파생 독서 자기장에 포착된 결과이다. 더구나 표지그림의 주인공이 조선인 포로감시원이라는 사실을 알고는 책이 이어주는 지평의 확장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책과 자료들을 접한 뒤 돌아보는 칸차나부리는 더이상 단순한 관광지가 아니었다. 칸차나부리 콰이강변 남쪽 도로의 이름은 리버콰이로드이다. 이 길을 따라 포로들의 막사가 줄지어 있었다. 영국군 포로 에릭 로맥스, 호주군 의사 에드워드 던롭 중령, 하이랜더 부대원 알리스테어 어쿼트, 네덜란드 군 오토 크리프트, 포로 감시원 이학래를 포함해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린 수많은 청춘들이 걸었던 길이었다. 어둠이 깔린 리버콰이로드를 걷다가 길이 끝나는 곳에 놓여 있는 콰이강의 다리 위로 올라갔다. 강변 클럽에서 새어 나온 음악 소리는 먼 거리를 날아온 탓에 힘 빠진 단색 소음이 되어 여행자를 쓸쓸하게 했다. 달빛이 강물에 흔들렸지만 전쟁 후 재건된 다리는 굳건히 서 있었다. 아치형 철골을 얹은 다리는 시멘트 교각 위에서 말없이 강물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다리에 개미처럼 달라붙었던 사람들의 흔적도, 공습에 무너졌던 철골과 교각도 시간 속에 묻혀버렸다.
세계2차 대전은 어떤 전쟁이었을까? 일반적인 상식은 파시즘에 대항한 민주주의의 전쟁이다. 나치와 일본 군국주의의 침략 전쟁은 반인륜적 범죄 행위였다. 곳곳에서 국가주의가 횡행하고 이에 기반한 혐오를 바탕으로 대량 학살이 자행되었다. 정의로운 국가 미국은 연합국과 힘을 모아 독일과 이탈리아, 일본의 침략행위를 응징했다. 그런데 전전과 전후 동아시아에서 벌어진 일은 정의였을까? 인도와 버마를 영국이 통치하는 게 정의였을까? 인도차이나 반도를 프랑스가 차지하고 필리핀을 미국이 갖는 것이 정의로운 세계질서였을까? 한국 광복군이 인면전구공작대를 구성해 영국과 항일 공동작전을 벌인 곳은 버마였다. 반면 인도와 버마의 민족주의자들은 점령자 영국과 맞서 싸웠다. 싱가포르에서 일본에 항복한 포로 중에는 영국군이 지휘하는 인도군이 상당수 포함되어 있었다. 인도 독립운동 지도자 수바스 찬드라 보스는 이들을 설득해 2만 명을 인도국민군으로 편입시켜 영국과 맞서 싸우게 한다. 보스는 인도 국민군 병사들을 간디, 네루, 아자드(자유)라는 3개의 부대로 편성해 버마로 진격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광복군이 미 전략사무국(OSS)나 영국군으로부터 특수 훈련을 받았듯이 버마 민족주의자들은 일본군 특무기관 '미나미기관(南機關)'으로부터 군사훈련을 받았다. 타이완과 하이난섬(福建島)에서 훈련을 받은 아웅산과 30명의 청년 독립투사들은 버마군의 뿌리가 된다. 42년 12월 8일 일본이 동남아시아를 침공하자 버마 독립투사들은 버마인들을 규합해 12월 28일 버마 독립의용군을 창설했다. 이들은 일본군이 버마 수도 랑군 점령 작전을 펼칠 때 함께 한다. 일본군이 랑군으로 진입하자 버마인들과 독립군은 "버마인들의 버마"를 외치며 영국군을 몰아낸 일본군을 환영했다. 독립의용군은 일본군 주둔 직후 버마 방위군으로 재창설 되는데 버마 독립의 영웅 아웅산 청년 장군이 첫 열병식을 주관했다. 찬드라 보스는 영국으로부터 인도를 해방해 대동아공영을 실현하자는 일본의 대의에 공감했다. 인도의 보스와 버마의 아웅산은 해방군을 이끌고 동아시아전선의 분수령이 된 임팔전투에서도 일본군과 함께 했다. 그러나 일본인들의 버마 자치권 약속은 거짓이었다. 일본에게 버마 독립운동세력은 영국군을 몰아내는데 까지만 유용한 존재였다. 결국 아웅산 장군은 적이었던 영국군과 손잡고 항일 독립 전쟁을 벌인다. 인도와 버마를 침략한 영국은 선한 국가가 아니었다. 조지오웰은 인도 제국 경찰 소속으로 버마에 근무하던 중 영국의 제국주의 통치에 환멸을 느껴 영국으로 돌아간 뒤 사직서를 낸다. 인간의 양심을 가지고서는 인간이 다른 인간을 동물처럼 대하는 것을 견딜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조지오웰의 소설 <버마시절>은 인종적 편견과 문화적 우월감으로 식민지 민중 위에 군림하는 영국인의 모습을 보여준다. 이들 제국주의에 쩌든 자들이 내세우는 것은 <영국에 의한 세계 평화>였다. 대동아 공영과 다를 바 없는 것이었다. 영국에 의한 세계 평화나 대동아 공영을 지탱하는 기둥은 식민지의 값싼 노동력과 자원 수탈이었다. 식민지 목에 빨대를 꽂은 흡혈 자본주의를 평화나 공영으로 가린 것이었다. <버마시절> 첫 장면부터 등장하는 '우포킨'이란 자는 지역의 하급 치안 판사이다. 식민지 어디에나 존재하는 점령자들의 일원이 되고 싶은 버마인이다. 식민지 백성들은 침략자들과 또 그 침략자에 기대 수탈을 일삼는 같은 나라 사람들에 의해 이중의 고통을 받았다. 식민지배 청산은 압제자 앞에서 동포들을 괴롭혔던 자들에 대해 죄 값을 묻는 것이며 이들의 참회와 반성에서 시작될 수 있다.
2차대전이 끝나자 물러났던 프랑스는 베트남 종주권을 주장하며 군대를 보냈다. 인도네시아에서는 네덜란드가 소유권을 주장했다. 세계가 정의롭다면 종전 후 침략국들은 물러가야 했다. 인도네시아 독립영웅 코마루딘은 1948년 11월 네덜란드 군에 체포되어 수감된다. 코마루딘은 다음 해 8월 10일 시장에서 주민들이 보는 가운데 네덜란드 군에 의해 총살형에 처해진다. 코마루딘은 '야나가와 시치세이'라는 이름으로 자바에서 연합군 포로감시원으로 일한 조선인이었다. 일본이 패전하자 '야나가와'는 귀국을 거부하고 인도네시아 독립을 위한 무장 투쟁에 나섰다. 코마루딘의 공적은 이후 인도네시아 군의 고위 장성이 된 옛 동료들에 의해 밝혀졌다 인도네시아 정부는 코마루딘을 독립영웅으로 공식 인정해 자카르타 국립묘지에 안장했다. 야나가와 시치세이 였다가 코마루딘이 된 인도네시아 독립투사는 1919년 전주군 삼례면에서 태어난 양칠성이었다. 인도네시아는 일본 패전 후 4년간의 치열한 항쟁 끝에 1949년 네덜란드군을 몰아내고 독립을 쟁취했다. 20세기는 제국주의 시대였다. 선진 자본주의 국가들은 무력으로 다른 나라를 지배하고 상품 생산과 판매 시장으로 활용하며 부를 쌓았다. 뒤를 이어 산업화를 이루고 군사력을 키운 나라들이 세계 시장 쟁탈에 뛰어들었다. 이 과정에서 더 큰 이익을 얻기 위한 경쟁이 대동아 공영 같은 거짓 외피를 둘러싸고 세계를 전쟁으로 몰아넣었다. 서로를 살육할 이유가 없는 세계의 젊은이들이 고향을 떠나서 피의 제물이 되었다. 국가는 전쟁의 진짜 목적을 가리기 위해 성스러운 가면을 둘러쓴다. 군대가 칭송되고 받들어진다. 우리 군은 세계에서 제일 용감한 전사들이다. 정치인들과 장군들은 자신들의 군대가 최강이라고 떠벌린다. 멋진 제복을 입고 빛나는 총을 어깨에 맨 채 거리를 행진하는 군인들의 모습은 전쟁을 페스티벌로 착각하게 만든다. 쥐들이 들끓는 진흙 덩이 참호 속에서 굶주림과 공포에 떠는 실제 전장의 모습은 가려진다. 전쟁은 국가가 권장하는 애국심을 연료로 불타오른다. 레마르크의 소설 <서부전선 이상 없다>에서 담임 교사는 애국심을 강조하며 고등학생 제자들에게 자원을 촉구한다. 학생들은 열광하며 앞다퉈 입대 지원서를 낸다. 하지만 어린 학생들은 전장을 겪은 뒤 속았다는 사실을 깨닫고 가슴속 깊이 교사를 원망한다. 맹목적과 결합한 애국심은 종교적 맹신만큼 위험하다. 국가는 시민들을 통제하고 감시하려는 내재적 속성을 갖고 있다. 독재국가일수록 감시와 통제 욕망은 더 크게 발산된다. 베일에 싸인 정보기관은 국가안보에 따른 필요성이란 말로 정부에 반대하는 시민들을 적으로 제조해낸다. 독일의 게슈타포나 일본의 켐페이타이, 구소련의 KGB를 비롯한 비밀경찰들은 자신들의 존재 이유를 증명하기 위해서라도 무고한 사람을 적으로 만들어 냈다. 거짓과 왜곡의 프로파간다는 시민사회에 일상적 의심과 혐오를 심는다. 권력을 가진 자들은 시민들이 정부가 무서워 아무 말도 못 하는 사회를 안전한 사회라고 여기는 듯 하다. 민주주의가 왜곡되거나 무너지면 시민들은 국가의 프로파간다에 포섭된 채 꼭두각시가 된다. 그나마 보장된 시민들의 권리는 국가안보라는 이름 아래 조금씩 폐기된다. 천왕에게 열광했던 일본 국민들이나 히틀러에 환호했던 독일 시민들은 국가와 권력자들에게 장악당했던 좋은 본보기이다. 파시즘의 DNA를 가진 정치인들이나 전쟁 불사론자들에게는 시민들이 국적이나 출신, 또는 이런저런 차이를 따져 서로를 혐오하는 것처럼 좋은 일은 없을 것이다. 갈라치기는 좋은 득표 전략이 된다. 상대를 악마화하는 것이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단단히 해준다고 믿는 이들은 대결을 부추긴다. 이런 사람들이 중요한 결정을 내리는 자리에 서게 되면 비극은 새로운 시즌을 맞은 드라마처럼 다시 시작된다. 캘리포니아 버클리 대학을 졸업하고 1980년부터 2000년까지 도쿄 쓰다 대학교수로 지낸 더글러스 러미스(Douglas Lummis)는 군대가 국민을 보호한다는 상식은 사실과 다를 수도 있다고 했다. "1989년부터 1998년 사이에 지구촌에서 일어난 108건의 분쟁 가운데 92건이 내전이었습니다. 즉, 국가와 자국민과의 전쟁입니다." 세계의 많은 나라들은 자국 군대에 의해 무고한 시민들이 학살당한 역사를 갖고 있다. 지금도 미얀마에서는 군부독재정권이 시민들을 학살하고 있다. 이런 학살은 민주주의가 무너졌을 때 발생했다. 세계2차대전부터 많은 전쟁들이 준 교훈은 선한 시민들이 연대해서 건강한 민주주의로 국가의 폭주를 통제해야 한다는 것이다. 고난의 시기 어려운 사람들을 도운 주체는 권력자들이 아니라 국적을 불문한 양심 있는 보통 사람들 바로 이웃이었다. 민중들은 고통받는 이웃을 외면하지 않는다. 연해주에서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 당한 고려인들을 도운 이들은 고려인들의 딱한 사정에 함께 눈물 흘린 현지 주민들이었다. 조선인 청년들이 태국 사찰의 처마 밑에서 겨우 태양과 비를 피할 때 음식을 들고 달려온 이들은 일본도 태국 정부도 아니었다. 현지의 디아스포라 화교들이었다. 일본인 의사 이마이 도모후미 선생은 기꺼이 사재를 털어 살아갈 방도가 없었던 조선인 포로감시원 출신 청년들을 도왔다. 사람들은 국가와 인종, 종교를 넘어 어려운 사람을 기꺼이 도우려 나선다. 우리는 인간의 선한 의지에 대한 믿음을 잃지 말아야 한다. 국경을 넘어 평화를 꽃피우기 위해서도 시민들은 민주주의를 지켜내야 한다. 또 이 민주주의를 바탕으로 반성과 용서의 역사를 만들어 낸다면 세상은 그만큼 좋아질 것이다.
p.s. 방콕 시내를 달리는 전철은 서울에서 보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세계적인 K팝 그룹 BTS와 이름이 같은 방콕 전철은 칸차나부리를 오가며 탔던 낡은 열차와는 차원이 달랐다. BTS(Bangkok Transit System)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도 달랐다. 전철이 달리는 고가 철교 양옆으로 하늘을 가릴 듯 빽빽이 서 있는 고층빌딩들이 거인처럼 보였다. 거대 쇼핑몰 벽에는 고가품으로 치장한 모델들이 "너도 지갑을 열어"라는 표정으로 사람들을 내려다봤다. 맥도널드는 붐볐고 마트 계산대에서는 "삐빅" 바코드 인식 음이 끊이지 않았다. 도로는 주차장인 듯 차들로 가득했다. 갑자기 칸차나부리로 돌아가고 싶은 충동이 훅 일었다. 태국 서쪽 시골 마을에서 반바지에 샌들 차림으로 터덜터덜 걷고 싶었다. 정처 없이. <도쿄 야스쿠니에서 칸차나부리 죽음의 철도까지 – 태국 철도 기행> 연재를 마칩니다. 그동안 관심 있게 읽어 주신 독자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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