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소년-시민이 만든 조례를, 의원들끼리 졸속과 편법으로 폐지
서울시의 경우, 주민조례청구로 발의된 폐지안이 지난 12월 서울행정법원이 집행정지 신청을 인용하며 시의회에 상정할 수 없게 됐다. 그러자 국민의힘 의원들이 폐지안을 발의해 4월 26일 여당 의원으로만 구성된 '서울특별시 인권·권익향상특별위원회(이하 인권특위)'를 열어 당일 본회의에 상정했고, 여당 의원만이 표결에 참여해 학생인권조례를 폐지했다. 명백한 졸속 날치기 표결이다. 애당초 국민의힘 의원으로만 구성된 인권특위가 "교섭단체 소속의원 수의 비율에 의하여 각 교섭단체 대표의원의 요청으로 의장과 협의한 후 본회의에서 선임 또는 개선한다"는 서울특별시의회 기본조례 제41조를 위반했다는 주장도 존재한다. 충청남도 학생인권조례 폐지 과정도 졸속 중의 졸속이었다. 주민조례청구를 통해 발의된 폐지안은 마찬가지로 법원이 집행정지 신청을 인용해 도의회에 상정할 수 없게 됐고, 그러자 충남도의회 의원들이 폐지안을 발의해 의결시켰다. 충청남도 교육청은 재의요구권을 행사했고, 국민의힘이 충남도의회 의원 3분의 2 이상을 차지하고 있기에 재표결에서도 가결이 될 것이라는 예상을 뒤집고 재표결에서 법안은 부결되었다. 그렇게 재표결에서조차 부결되었음에도 국민의힘은 다시 학생인권조례 폐지안을 발의해 의결시켰고, 재표결에서는 학생인권조례 폐지안만 무기명투표로 하기 위해 전자투표가 아닌 종이투표로 진행하는 치졸함을 보여주기도 했다. 학생인권조례는 그야말로 학생과 시민의 피, 땀, 눈물로 치열하게 만들어진 조례이다. 서울특별시 학생인권조례는 제정 당시 학생과 교사 등이 직접 발로 뛰며 주민조례청구 9만 8천여명의 서명을 받아 제정됐다. (현재는 주민발의 요건이 완화되었다.필자주.) 충청남도의 경우도 2020년 제정 당시 청소년단체 대표가 삭발을 하며 치열하게 학생인권조례를 만들어 내기도 했다. 제주도, 경기도 등 현재 학생인권조례가 제정되어있는 지역은 물론 부산, 경남, 강원 등 제정에 실패한 지역까지 학생인권조례는 학생, 교사, 학부모, 시민들의 치열한 요구로 아래에서부터 만들어진 민주적인 조례이다. 그런데 국민의힘 의원들의 독주와 독단, 꼼수와 날치기가 민주주의를 물거품으로 만들고 있다.'국힘만 바라는' 학생인권조례 폐지
학생인권조례가 폐지된 이후, 많은 교육주체들이 지속적으로 국민의힘을 규탄하고 있다. 지난 5월 3일 학생들이 서울시의회 앞에서 24시간 농성을 하는 한편, 학생보호자, 교사의 폐지 반대 기자회견도 이어지고 있다. 교육청의 강력한 반대 의사도 있다. 충청남도 교육청의 재의요구권 행사는 물론, 조희연 서울시 교육감의 1인 시위, 72시간 농성, 재의요구권 행사 시사 등 교육청 차원의 반대도 거세다. 9인의 시·도 교육감이 서울특별시 학생인권조례 폐지 중단을 요구하기도 했다. 국내외 인권전문가들의 우려도 크다. 송두환 국가인권위원회 위원장은 지난해 12월 '학생인권조례 폐지를 재고해 달라'는 성명을 발표한 것에 이어 102주년 어린이날 성명에서 '학생인권조례 폐지는 유감'이라는 입장을 발표하기도 했다. 지난해 1월에는 유엔 인권이사회(HRC)에서 한국에 학생인권조례 폐지에 대해 '성소수자 차별을 금지한 국제 원칙을 어기는 시도'이며 ’서울특별시 학생인권조례 폐지가 다른 지역의 조례 폐지의 길을 열까 두렵다‘는 등 심각한 우려의 내용을 담은 서한을 한국에 보낸 바 있다. 야당 정치인들도 거세게 반대하고 있다. 진보 정당들은 "거대한 인권 퇴행이다", "학생인권조례 읽어는 봤는가?", "폐지할 것은 혐오다"라며 학생인권조례 폐지 반대 입장을 밝히고 있다. 민주당의 경우 선다윗 청년부대변인이 본인 SNS에 '학생인권조례 폐지, 국힘에 감사'라고 게시해 논란이 일었으나 당 차원에서는 학생인권조례 폐지를 반대하는 입장을 내놓기도 했다. 그 외에도 조국혁신당, 새진보연합 등에서도 학생인권조례에 대한 폐지 반대 입장을 밝혔다. 학생, 교사, 학생보호자와 시민사회, 교육청, 인권위, 유엔, 야당 정치인들까지 모두가 학생인권조례 폐지에 반대하고 폐지가 끼칠 영향을 우려하고 있지만, 국민의힘은 지난 총선의 패배로는 부족했는지 혐오세력의 지지를 얻기 위한 행보를 멈추지 않고 있다.학생인권 퇴행이 본격화될까 두렵다
앞서 언급한 유엔의 우려에서도 그렇듯 서울특별시의 영향력은 다른 지역에도 영향을 끼친다. 충남과 서울의 학생인권조례가 폐지된 이후 경기도 교육청은 '학교구성원의 권리와 책임에 관한 조례'의 입법을 예고하며 사실상 학생인권조례의 폐지를 추진하고 있다. 이후 광주에서도 광주 학생인권조례 폐지 주민조례청구가 광주시의회에 제출되기도 했다. 학생인권조례 폐지와 폐지 논의가 이어지자 실제 학교 현장에서도 학생인권 퇴행의 시작을 알리는 인권침해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 작년 12월 전라북도 전주 소재의 초등학교에서 교사가 학생을 쇠막대로 여러 차례 폭행한 사건이 있었다. 피멍이 들 정도였으나 가해 교사는 서이초 교사 사망사건을 빌미로 "이제 체벌해도 된다", "때릴 만 하니 때렸다"라고 발언해 공분을 사기도 했다. 서울의 한 중등학교에서는 학생인권조례 폐지 직후 교사가 2인씩 짝지어 반별로 불시에 두발과 복장 등 용의 검사를 실시해 논란이 되기도 했다. 학생인권조례가 폐지되기도 전부터 이런 흐름들이 등장하는데 '귀밑 6cm' 규정이나 얼차려 체벌 등 인권침해가 만연한 학교로 돌아가는 것도 과장이 아닐지 모른다.'교권' 보장을 위해 학생인권조례를 폐지했다는 허무맹랑한 주장
국민의힘은 학생인권조례의 폐지를 마치 교권을 보장하기 위한 것처럼 포장하고 있다. 하지만 이는 근거가 없는 허무맹랑한 주장이다. 통계적으로 봤을 때 학생인권조례는 교권 침해를 증가시키지 않는다. 지난해 7월 26일 한겨레의 보도에서는 2017년부터 2021년까지 5년간 교권침해 비율을 비교했을 때, 학생인권조례가 있는 지역의 교권 침해 평균 비율은 교사 100명 당 0.5건인 반면 학생인권조례가 없는 지역의 교권침해 평균비율은 100명 당 0.54명으로 오히려 교권침해 비율이 높았다. 학생인권은 교사의 인권과 동행한다. 학생인권 침해가 일상이 되면 교사들은 학생인권을 침해하는 학교생활규정으로 인해 교문지도 등 학생단속 업무를 맡아야하고, 징계나 벌점 등으로 인한 행정업무 과중될 것이다. 앞서 언급한 서울의 중등학교 사례에서도 교사들이 용의검사에 동원되기도 했다. 무엇보다 학생인권의 기준이 명확히 세워지지 않아 무엇이 인권이고 무엇이 인권침해인지 알 방법이 부재하기 때문에 민원 등이 제기됐을 때, 소모적인 논쟁이 이어질 가능성도 높다. 결국 교사를 위해 학생인권조례를 폐지하자는 주장은 교사들의 목소리조차 듣지 않은 허무맹랑한 주장이다. 교권보호와 학생인권 보장이 충돌한다는 주장이 사실이라도 학생인권조례 폐지는 틀렸다. 학생과 교사의 인권이 영원히 투쟁하는 장으로서 학교가 존재한다면 학교의 구조를 근본적으로 생각해봐야 할 것이다. 결국 학생인권조례 폐지는 10년마다 학생이나 교사가 번갈아 가며 편을 바꿔 들어주겠다는 얘기와 다름없다. 몇 년 뒤에 학생인권 침해 사건이 이슈가 되면 그제서야 부랴부랴 학생인권조례를 부활시킬 셈인가?우리는 진게 아니야
고등학교를 다니면서 충청남도와 제주도에 학생인권조례가 제정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조례가 없는 강원도에서 학교를 다녔지만 조례 제정 소식 자체는 많은 응원과 희망이 됐다. 그래서 응원과 희망을 돌려주고자 강원도 학생인권조례 제정운동에 함께하기도 했다. 비록 조례가 제정되지는 않았지만, 우리의 운동이 또다른 학생에게도 응원과 희망이 됐으리라 생각한다. 학생인권조례가 폐지되어도 간절했던 우리의 투쟁은 사라지지 않는다. 여전히 학생은 인권을 가진 주체적인 존재라는 점은 명백한 사실이다. 게다가 절차도 아직 남아있다. '우리는 진 게 아니야, 아직 못 이긴거야'라는 경남 학생인권조례 활동 기록집 제목처럼 학생인권조례의 폐지는 패배가 아니다. 오히려 학생인권 기본틀을 다지는 새로운 시작이 될 것이다. 조례만이 아니라 학생인권을 법적으로 보장하는 학생인권법의 필요성에 대한 공감대도 커지고 있다. 남아있는 기간 동안 끈질기게 폐지를 막아내고, 나아가 학생인권조례를 뛰어넘는 가열찬 투쟁으로 학생을 향한 차별과 폭력을 몰아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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