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세가 흔들리고 사라져가는 사회의 중요한 출구 - 사회주택
최경호는 네덜란드에서 사회주택의 이론과 실제를 공부했고, 정당과 사회운동, 지방자치단체를 넘나들며 사회주택을 중심에 둔 주거 문제 해결을 모색해왔다. <어쩌면, 사회주택>은 그 활동의 결실인데, 이름에서 드러나듯이 사회주택이 무엇인지부터 차근차근 쉽게 설명해주면서 꼬이고 꼬인 한국의 주거 문제를 풀 실마리가 사회주택에 있음을 역설한다. 그런데 '사회주택'이란 무엇인가? 한국인이라면, '민간주택'이나 '공공주택'이라는 말에는 익숙해도 '사회주택'은 낯설어 할 것이다. <어쩌면, 사회주택>은 이 말이 도대체 무엇을 뜻하는지 밝히는 데 상당한 지면을 할애한다. 가장 도식적인 설명은 우리 입에 붙은 '민간주택', '공공주택'과 대비해 정의 내리는 것이다. 민간주택이란 개인이 소유하고 시장에서 매매되는 주택이다. 반면 공공주택은 국가나 지방자치단체가 투자하여 건설하고 소유 주체도 공공이며, 따라서 시장에서 상품으로 다뤄지지 않는다. 사회주택은 어쩌면 이 둘 사이 어딘가에 해당하는 주택 형태들을 아우르는 말이다. 이렇게 보면, 시장 거래보다는 안정적 주거를 목적으로 개인이나 국가가 아니라 결사체(협동조합 등)나 사회적기업이 소유, 관리하는 주택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대단히 일면적인 정의다. <어쩌면, 사회주택>은 한국에서도 2010년대부터 다양하게 시도되고 있는 사회주택 사례를 소개하면서 현실의 사회주택이 이런 단순한 정의가 연상시키는 것보다 훨씬 더 다양하고 역동적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가령 노후 지역 빈집이나 고시원을 사회적기업들이 리모델링하여 셰어하우스로 운영하는 사례가 있는가 하면, 한국토지주택공사(LH)가 매입하여 공공화한 주택을 위탁 받아 관리하는 사례가 있고, 협동조합이 공공으로부터 금융이나 토지를 지원받아(임대나 지분 공유) 아예 새 건물을 짓고 입주하는 사례도 있다. 이렇듯, '사회주택'이라고 하여 공공 당국이나 시장의 존재나 역할이 배제되는 것은 아니다. 국가나 시장과 구별되는 제3의 주체들, 즉 결사체나 사회적기업이 중심에 있기는 하지만, 국가나 시장과 교차하며 다양한 실험을 전개한다. 그래서 저자는 사회부문, 공공부문, 시장부문의 협력을 전제로 '사회주택'을 다음 같이 새롭게 정의한다. "호혜성을 바탕으로 공공의 지원을 활용하여 주거 선택권을 확장하는 주택."(<어쩌면, 사회주택> 66쪽) 여기에서 눈길이 가는 말은 무엇보다 "주거 선택권을 확장"한다는 것이다. 오늘날 대한민국에서 서민들이 느끼는 주거 문제의 핵심은 주거 선택권이 '없다' 혹은 '좁다'는 말로 요약될 수 있다. 2019년 현재 58%인 자가 보유 가구를 제외한 나머지는 민간주택을 전세로 임차하거나 월세 임차인이 돼 매달 임대료를 내야 한다(전체 가구의 34%). 민간임대주택의 대안이 되어야 할 공공임대주택은 물량이 한정돼 거주 가구가 8% 정도밖에 안 된다(2020년 국토교통부 주거실태조사). '자가', '(민간)전세', '(민간)월세', '공공임대', 이 네 범주가 한국에서 주거 선택지의 거의 전부다. 물론 이 중에서 가장 매력적인 선택지는 자가 소유일 것이다. 그러나 분주히 이동하는 현대인의 삶을 생각한다면, 자가를 보유하는 게 꼭 최적의 선택은 아니다. 게다가 최경호가 명쾌히 지적하듯이, 집은 애당초 '비싼' 물건이다. 부동산 가격은 유례없이 상승한 반면 소득은 정체, 하락하거나 불안정해진 신자유주의-이후 상황에서는 더욱 그렇다. 모름지기 살만한 사회라면, 이런 현실과 주거권 사이의 간극을 메울 다양한 대안을 구비해야 한다. 그러나 이제껏 한국 사회에서는 그 대안이 민간 전세나 월세 그리고 빈약한 공공임대주택뿐이었다. 그나마도 전세는 1995년에 30%였던 비중이 2019년에 15%로 반 토막 났다(<어쩌면, 사회주택> 16쪽). 그리고 그만큼 월세 비중이 늘어났다. 전세와 월세의 이런 교대가 과연 바람직한 일인지 아닌지에 관한 평가는 제쳐두더라도, 30여 년간 전세 물량과 가격이 끊임없이 요동치면서 전반적으로 하락하는 가운데 집을 둘러싼 한국인의 고통과 긴장이 가중된 것만은 분명하다. 그렇기에 <어쩌면, 사회주택>이 소개하는 사회주택의 현재진행형 실험들은 결코 겉만 번드르르한 유토피아적 사례로 다가오지 않는다. 네덜란드, 오스트리아, 덴마크처럼 한때 대도시 주거 문제로 고통 받던 땅 좁은 유럽 나라들이 사회주택 형태의 대안들로 우리가 성취하지 못한 주거 안정 수준을 달성했다 한들, 당장 우리 현실과 거리가 있다면 아무 의미도 없다. 그러나 민간임대주택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던 전세제도가 급격히 변화하는 와중에 있는 현재 한국 사회에서는 이야기가 달라진다. 격동하면서 사라져가는 전세의 몫을 대신할 새로운 주거 형태들이 절실히 필요하다. <어쩌면, 사회주택>은 '어쩌면'보다는 '확실히'라는 부사가 더 어울릴 힘찬 어조로, 사회주택이야말로 바로 그 답이라 제안한다.한국 자본주의의 과거와 미래를 응축한 '전세'와 '사회주택'
한데 내가 보기에 <어쩌면, 사회주택>은 단지 사회주택에 관한 훌륭한 입문서나 소개서만은 아니다. 저자는 사회주택이 필요한 한국 사회 현실을 드러내기 위해 제1장 "익숙하고도 낯선 주거 이야기"에서 전세제도 문제를 짚는다. 길지 않은 분량이고 간명한 문장인데도 나는 이 대목을 읽으며 한국만의 묘한 제도인 전세 임대를 참으로 쉽고도 탁월하게 정리했다는 느낌을 받았다. 전세제도에 관한 이 책의 설명을 내 나름대로 요약하면, "집값이 계속 오르기만 할 것이라는 전제 아래" "주택 수요자인 임차인이 조달해주는 자금을 바탕으로" "민간 임대인이 주택 공급에 따르는 리스크와 불로소득을 동시에 떠안는" 제도다. 이 문장만 봐도 이미 이상한 점이 한, 두 가지가 아니다. 가령 "집값이 계속 오르기만 한다"는 것은 2008년 이후 세계 어느 곳에서든 의심 받는 명제이며, <어쩌면, 사회주택>이 지적하듯이 누구보다 전세 임차인 자신이 "집값이 계속 오르기만 하면" 고통 받을 당사자다. 오늘날 우리는 이 모순을 실감하는 중이다. 그런데 이렇게 모순 덩어리인 제도가 어쨌든 한 세대 넘게 유지되며 이 나라 주거제도의 기둥 노릇을 해왔다. 여기에서 한국 자본주의의 성장 비밀이라고나 할 중요한 진실과 마주하게 된다. 당대의 상위 중간계급일 전세 임대인과 바로 그 밑 계층일 전세 임차인이 대도시 주택 공급 문제를 나눠 짊어짐으로써 모종의 동맹(동시에 갈등) 관계를 구축하는 가운데, 무대 뒤로 숨어 버린 주체가 있다. 그것은 전세제도가 왕성한 활약을 펼치던 그 시기에 자본주의 발전을 채근하느라 여념이 없던 '국가'다. 발전자본주의를 진두지휘하던 한국의 국가기구는 대도시 주택 공급이라는 성가신 난제를 전세제도를 통해 각 개인과 가구에 떠안긴 덕분에 다른 곳에 더 많은 자원과 역량을 쏟아 부을 수 있었다. 토지와 주거를 둘러싼 공공성(공개념)은 애당초 국가의 당연한 기능이라는 헌법상의 약속은 사문화됐고, 공공임대주택은 단지 특수한 집단만을 위해 최소한으로 공급하면 되는 물건으로 굳어졌다. 뒤늦게 전세보증금대출제도를 통해 공공이 전세제도에 개입했지만, 이는 전세 임대인의 투자(투기)를 도움으로써 임차인의 주거권을 실현한다는 전세제도의 모순을 더욱 부추기는 결과만 낳았다. 이런 양상은 비단 주거 영역에만 한정되지 않는다. 모든 영역에서 한국 자본주의가 마침내 도달한 최종 지점이기도 하다. 국가는 끝없는 성장만이 답이라 부르짖으면서, 시민의 권리들을 보장해야 한다는 무거운 책임을 방기한다. 시민들은 온갖 부조리한 계약 관계를 통해 자기 권리를 알아서 챙겨야 하며, 오랫동안 이에 익숙해진 탓에 다른 대안이 있다는, 혹은 다른 대안을 찾아야 한다는 생각 자체를 낯설어 한다. 이런 국가와 시민 개인 사이에는 사실상 사회라는 매개 영역이 거의 없다시피 하다. '사회'가 있다면, 그것은 오직 각자도생의 싸움터일 뿐이다. <어쩌면, 사회 주택>이 '사회'주택의 의미를 해명하고 설득하기 위해 그토록 많은 지면을 할애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저자는 '사회'를 실감하지 못하는 독자들에게 애써 '사회'주택을 제안하고 있는 것이다.사회가 주택을 만들고, 주택이 사회를 만든다
그러나 책을 끝까지 읽다 보면, 우리는 어느새 저자의 도저한 낙관주의에 가슴을 열게 된다. "에필로그"는 다음 같은, 단순하지만 인상적인 문구로 시작한다. "사회가 주택을 만들고, 주택이 사회를 만든다." '사회'를 실감하지 못하는 이들에게 '사회'주택을 설파하는 게 난제이기는 해도, 돌려 생각해보면 이런 동료시민들 사이에서 '사회'를 복구할 길은 다름 아닌 '사회'주택 같은 실험을 끊임없이 시도하는 것뿐이다. 사회주택을 짓고 나누고 가꾸는 과정에서 한국인은 개인이 아니라 결사체의 일원으로 국가나 시장과 관계 맺을 수 있음을 경험하고, 참여와 숙의, 협상과 합의라는 낯선 과정에 좀 더 익숙해질 것이다. 한 마디로, '사회'를 실감하기 시작할 것이다. <어쩌면, 사회주택>은 이런 과제를 단지 당위로만 제시하지 않는다. 한국 사회가 당면한 크나큰 위기, 즉 기후급변과 고령화나 감염병 빈발에 따른 돌봄위기에서, 사회주택에 대한 관심과 필요, 의지와 행동이 늘어날 수밖에 없는 기회와 가능성을 본다. 좁은 의미의 주거 문제, 아니 '부동산' 문제에만 시야를 좁히고 기존 가격과 물량의 숫자들 속에서만 헤맨다면, 이런 기회와 가능성을 놓칠 수 있다. 시야를 주거 영역을 넘어 더 넓혀야만 비로소 주거 영역에 필요한 해법을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그러고 보니 <어쩌면, 사회주택>은 누구나 어렵지 않게 손에 들고 상쾌하게 완독할 수 있을 그 분량과 문장, 접근법의 미덕에 어울리지 않게, 어쩌면 상당히 무거운 답을 숨겨놓은 책일지 모르겠다. "사회 같은 것은 없다"던 마거릿 대처의 저 유명한 말에 대한 자신감 넘치는 답 말이다. 이 책을 읽은 이들에게 떠오를 그 답은, "그렇다면 사회는 '발명'돼야 한다"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전에 익숙하지 않았던 방식으로 집을 지으며 사회를 다시 만들어야 한다. 마치 사회를 다시 세우는 것처럼 집을 짓고, 그렇게 집을 짓듯이 사회를 다시 세워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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