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 한 번 마주치지 못한 채 처방전 써줬으니 이만 나가보란 말을 들으면 내가 과연 아이돌 팬미팅 현장에 와 있었는지 혼란스러워진다. 고작 감기를 가지고 왜 더 세심하게 살피지 않느냐 민원을 제기하긴 겸연쩍다. 하지만 3분 진료를 몸소 겪고 나면 여러 의구심을 멈추기 어렵다. 먼저 들어가 한참을 나오지 않으시던 어르신은 과연 무슨 마법을 부린 것일까. 자연회복으로 면역력을 높이자는 큰 뜻을 알아채지 못한 것일 수도 있다. 그렇다면 의사는 대체 어떤 기준으로 환자를 보는 순서나 진료시간을 결정하는 것일까. 오늘은 의원에서 일하는 의사들이 가진 진료 태도가 환자의 의료이용에 미치는 영향을 분석한 논문을 소개한다. 국제학술지 <보건경제학>에 실린 이 연구는 지역사회에서 단독진료하는 덴마크 의사에 주목한다. 세금으로 보건의료체계를 운영하는 덴마크에서 의원을 개원한 의사들은 지역별 보건당국과 계약을 맺고 배정받은 환자를 진료한다. 의사가 환자를 선택할 순 없지만 배정인원이 최소 1600명을 넘으면 의사는 추가로 환자를 배정받을지 선택할 수 있다. 더 많은 환자를 진료하면 더 많은 보상을 얻을 수도 있지만, 2017년 기준 최소인원을 충족한 이후 추가 배정을 거부한 의사가 전체의 60%를 차지한다고 한다. 보건의료체계의 문지기 역할을 하는 이들 의사는 인두제와 행위별수가제를 혼합한 지불보상방식에 따르고 있다. 예를 들어, 배정받은 환자가 의원을 찾아오지 않더라도 의사는 환자 수에 비례해 기본급을 보장받는다. 2022년 기준 환자당 단가는 약 8000원이지만, 의료취약지이면 단가는 가산되고, 지속적이고 체계적인 관리가 필요한 만성질환자에게는 매달 추가금이 더해진다. 인두제의 핵심이 책임지는 환자의 수라면, 행위별수가제의 핵심은 제공하는 서비스의 양이다. 대다수 의사는 진료 중 제공하는 의료서비스에 따라 기본급에 준하거나 그 이상의 성과급을 얻는다. 이 성과급의 비율은 제도 초기 기본급과 비슷한 수준이었지만 매년 상승하고 있다고 한다. 아무리 돈을 잘 번다고 하지만, 혼자서 1600명의 환자를 담당한다는 것은 만만한 일이 아닐 것이다. 매일 방문하는 환자 수는 달라도 연례면담이나 이메일상담, 재택방문까지 다양한 서비스를 제공해야 한다면 시간과 체력을 잘 배분하는 것이 관건이다. 연구진은 덴마크의 의사가 환자의 건강 상태와 서비스 제공량 중 무엇을 우선해 진료하는가에 따라 환자의 의료접근성이 달라질 수 있다는 가설을 세웠다. 이 가설을 검증하기 위해서는 의사별 진료의 우선순위를 유형화한 다음, 해당 의사가 환자에게 제공한 서비스의 차이를 분석해야 한다. 진료의 우선순위는 2021년 덴마크일반의실태조사 자료를 활용해 유형화할 수 있었다. 전국 일반의 중 조사에 참여한 약 39%의 의사들은 자원이 제한되어 있다고 가정할 때, 환자의 건강 상태와 진료로 얻을 수 있는 효과가 다르다면 무엇을 기준으로 환자를 진료할지 개인적인 선호를 응답했다. 모름과 응답거부를 제외한 네 가지 선택지 중에선 환자의 건강 상태와 무관하게 가장 큰 효과를 얻을 환자를 진료하겠다는 응답이 71%로 가장 높았다. 연구진은 이를 ① 최대의 효용을 추구하는 공리주의적 태도로 유형화했다. 그 뒤를 이은 유형은 건강과 무관하게 모든 환자가 똑같은 효과를 얻을 수 있게 진료하겠다는 ② 효용의 평등주의, 진료로 얻을 효과와 무관하게 가장 아픈 사람을 진료해 환자집단의 불평등을 줄이겠다는 ③ 결과의 평등주의 태도였다. 건강 상태나 진료 효과와 상관없이 모든 환자에게 동등한 서비스를 제공하겠다는 ④ 기계적 중립을 지키겠다는 태도는 8%를 차지했다. 그리고 전체 응답자 중 남성 일반의들은 공리주의적인 태도를 보일 가능성이 컸지만, 여성 일반의에 비해 불건강한 환자들을 우선하는 태도가 덜했다. 설문조사 결과를 토대로 조사에 참여한 의사들과 그들이 진료한 환자들에 대한 행정자료를 결합한 자료가 구축됐다. 하지만 의원은 다양한 사람들이 다양한 이유로 찾는 공간이기 때문에 저자들은 그중에서도 체계적이고 지속적인 관리가 필요한 불건강 환자집단을 분류해야 했다. 덴마크의 일반의들은 의원에 찾아오는 환자들에게 제공하는 대면진료뿐 아니라 전화상담, 이메일상담, 만성질환자들을 위한 연례면담, 재택방문 등의 다양한 서비스를 제공한다는 특징을 토대로 연구진은 2가지 이상 만성질환을 진단받은 복합질환자에 주목했다. 그리고 대면진료에 비해 시간과 노동력이 많이 들어가는, 소위 품이 드는 서비스가 더 많이, 자주 필요로 할 가장 불건강한 환자집단으로 정신질환자와 복지급여를 받는 수급권자를 특정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의사의 진료태도는 환자군과 제공한 서비스 유형에 따라 민감하게 달라지진 않았다. 하지만 '자신에게 배정된 모든 환자에게 동등한 진료를 제공하겠다는 태도'를 보인 의사보다 '모름'과 '응답거부'를 선택했던 의사들에서 전화상담을 선호하는 양상은 일관적이었다. 전체의 21%를 차지한 이 의사들은 '2개 이상 복합만성질환을 가진 환자'와 그 중에서도 '가장 불건강한 환자'에게도 기계적 중립을 지키려는 의사에 비해 전화상담을 1~2회 많이 하는 경향을 보였다. 동시에 통계적으로 유의하진 않았지만, 연례면담이나 가정방문은 오히려 감소했다. 불건강할수록 의료서비스를 이용하기 쉽지 않다면 전화로 대체하는 '선도적'이고 '혁신적'인 태도가 돋보였다. 한편, 불건강한 환자를 우선 진료하겠다는 태도를 보였던 의사들은 기계적 중립을 복합만성질환자 전체와 복지급여를 받는 하위집단을 각각 3회, 4~5회 더 많이 만나고 있었다. 이들은 또한 정신질환을 가진 복합만성질환자들의 집을 직접 찾아가거나, 복지급여를 받는 복합만성질환자에게 대면진료, 이메일상담, 연례면담을 제공하는 횟수도 더 높았다. 이는 의료를 통해 모두가 건강하길 바라는 결과의 평등을 추구하는 의사들이 환자의 상태와 필요에 더 민감하게 반응하는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고 해석할 수 있다. 반대로 말하자면, 자원이 제한될수록 선뜻 제공하기 어려운 재택방문이나 연례면담 같은 서비스의 접근성은 이러한 서비스를 가장 필요로 하고, 가장 불건강한 환자들부터 저하될 위험이 크다는 사실을 시사한다. 마지막으로, 모든 환자가 건강 상태와 무관하게 똑같은 진료 효과를 얻을 수 있도록 진료하겠다는 의사들은 모두에게 동일한 서비스를 제공하겠다는 의사들과 진료양상이나 진료횟수에 유의한 차이를 보이지 않았다. 의사의 개인적 성향이 환자의 의료접근성에 미치는 영향을 다룬 연구결과를 설명하기 위해 연구진은 다양한 추가 분석을 수행했다. 하지만 결과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고, 특히 코로나19 유행 전후로도 결과의 일관성은 유지되었다. 어떤 서비스를 얼마나 제공할 것인가에 대한 의사결정은 개인의 성향이 아닌 경제적, 혹은 비경제적 유인구조에 따라 좌우될 가능성도 남아 있다. 하지만 오랜 기간 교육을 거쳐 매일 환자를 진료하는 의사가 추구하는 가치나 진료방식이 단기간에 바뀌기 어려운 것도 사실일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 진료현장을 떠나겠다고 선언하는 한국 의사들은 과연 무엇을 우선시하는 진료를 제공하고 있는 걸까?
*서지 정보
Oxholm, A. S., & Gyrd‐Hansen, D. (2024). Do physicians' attitudes toward prioritization predict poor‐health patients' access to care?. Health Economics.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