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 게임이 언제 어떤 식으로 유입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정확한 기록이나 자료가 없다. 대체로 1970년대 후반부터 <벽돌 깨기> 류의 게임기가 유입되어 다방이나 당구장 등지에 개별적으로 운영되다가 1970년대 말부터는 게임의 인기가 올라가면서 아예 전용 영업장이라 할 수 있는 전자오락실의 형태가 확산하기 시작했다고 보면 크게 틀리지 않을 것이다. 초창기에 게임은 전자오락이라 불렸는데, 당시에 꽤나 냉대를 받았다. 예컨대 "무분별한 오락실"들이 "어이없는 상혼"으로 아이들의 정서를 해치고 외화를 낭비하고 있다든가(조선일보, 1980년 9월 4일) "사행심을 조장"하면서 학생들의 주머니를 터는 "전자독버섯"이자 "청소년 탈선의 온상"(동아일보, 1980년 2월 21일)이라는 식의 신랄한 비난과 혹독한 질책을 받곤 했다. 이처럼 이 시기 전자오락실은 주로 '불량', '불법', '무허가' 등의 라벨이 붙으면서 단속과 규제의 대상이었다. 그러다 보니 전자오락 자체가 불량하고 불법적인 어떤 것인 양 여겨지게 되었다. 하지만 그 속사정은 좀 다른데, 전자오락실 단속과 규제가 원래는 전자오락 그 자체와는 무관하게 시작된 일이었기 때문이다.
글로벌 석유위기와 동네오락실
그 시발점은 1970년대에 전세계를 뒤덮었던 중동발 석유 파동 사태와 연관되어 있다. 당시 중공업 위주의 경제 성장 정책을 추진하던 한국은 큰 충격을 받게 되는데, 1970년대 전반에 걸쳐 높은 수준을 유지하던 경제성장률이 특히 2차 석유파동 발발 후 1980년에 -5.2%로 수직 낙하했고 물가상승률은 거의 30%를 기록했다 하니 가히 IMF 사태에 준하는 충격이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이 어려운 시기 정부의 정책은 한마디로 '덜 쓰고 아끼자'로 정리할 수 있는데, 네온사인 설치를 금지한다든가, 목욕탕을 강제 휴무시킨다든가, 유류세를 인상하는 등의 조치가 대표적이었다. 여기서 전자오락과 관련하여 주목할만한 부분은 상업적 대중오락시설을 의미하는 "유기장(遊技場)" 규제다. 1970년대 당시 주요 유기장들로는 당구장, 볼링장, 롤러스케이트장 등이 있었는데, 1973년 1차 석유파동이 발생하면서 "퇴폐 및 낭비풍조를 조장하고 에너지 절약시책에 역행하는" 이들 영업장에 대해 1974년부터 신규 허가 일체를 중지(할 뿐만 아니라 시설 확장도 금지)하는 강력한 규제 조치가 내려진다(경향신문, 1973년 12월 26일 7면). 이러한 규제 조치는 1975년에 다시 한 번 시행되었는데, 이는 1970년대 후반 빠르게 확산해갔던 전자오락실의 대부분이 처음부터 불법 무허가 시설로 전락하는 계기가 된다. 즉 전자오락이라는 오락형식 자체가 아직 한국 사회에 제대로 소개조차 되지 않았던 시점에 시행된 유기장 전반에 대한 규제 조치로 인해, 새로 등장한 전자오락에 처음부터 불법/무허가 오락이라는 낙인이 찍혀버린 셈이다. 사실 석유파동 사태가 아니었더라도 전자오락이 사회적으로 환영 받았을 것 같진 않다. 1950년대에 치열했던 내전을 겪고 궁핍했던 상황에서 온 국민이 잘 살아보자는 염원 하나로 국가 경제 발전에 총동원되던 가운데 나라의 앞날을 책임져야 할 아동과 청소년들이 전자오락 같은 불량 저질 오락에 용돈과 시간을 탕진하는 모양새를 당시 한국 사회가 곱게 봐주기 어려웠을 것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당시에 외래의 문화나 오락을 향락과 퇴폐의 주범으로 보던 사회적 분위기도 무시할 수 없다. 어찌됐든 전자오락 그 자체보다는 그것을 둘러싼 상황이나 조건이 그에 대한 인식을 좌우했다는 것은 분명하다.
한편 1980년대 초에 들어와 전자오락 정책에 변화가 생긴다. 당시 새로 집권한 전두환 정부는 처음에는 전자오락 규제를 강화했다. 폭압적 집권 탓에 성난 민심을 달래기 위해 상대적으로 대중문화 유화적이었음에도 전자오락에 대해서는 탄압이라 할 수 있을 만큼 강력한 단속 조치를 취했다. 공공의 적에 가까운 전자오락을 규제하는 것은 (과외금지나 통금해제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시시해 보이긴 하지만 어쨌든) 국민의 환심을 살 수 있는 조치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미 수요가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있던 상황에서 규제 정책으로만 일관하자 문방구나 만화방, 탁구장 등에서 몰래 전자오락기를 운영하는 불법 영업이 늘어가는 등 단속과 규제만으로는 통제가 불가능하다는 현실을 맞닥뜨린다. 그리하여 1982~83년에 걸쳐 대대적인 전자오락실 양성화 정책이 추진된다. 표면상 그 취지는 이미 전자오락이 확산할 대로 확산한 상황에서 아동과 청소년들이 즐길 수 있을 만큼 충분히 '교육적인' 건전오락으로 개선하자는 것이었다. 하지만 여기에는 당시 정보화를 국가적 비전으로 삼고 관련 분야에 적극 지원, 투자하려 했던 정부의 계산 또한 깔려 있었다. 1970년대 글로벌 석유파동을 겪고 난 서구 주요 국가의 산업구조 변동 속에서 수출 위주의 경제 구조를 가진 한국 또한 그에 빠르게 적응해야 했고, 이에 국가적으로 정보통신분야에 주목했던 것이다. 이러한 가운데 오랜 탄압에도 불구하고 "미국과 일본 다음 가는 기술 수준"을 갖추었고 "종사자는 60만 명"에 이른다는 전자오락 산업은 눈여겨볼만한 부문이었다(매일경제 1982년 12월 24일 7면). 그에 따라 야심차게 추진되었던 전자오락 양성화 정책은, 그러나 크게 실패하고 만다. 여러가지 원인이 복합적으로 작동한 결과였지만 근본적으로는 전자오락/게임이라는 매체에 대한 몰이해에서 비롯했다. 양성화에 실패한 전자오락은 불량오락이라는 멍에를 결국 벗지 못한다. 1990년대 들어와 새로 집권한 김영삼 정부 하에서 '전자오락'은 '게임'이라는 이름으로 만화, 애니메이션 등과 함께 주요 문화산업 부문으로서 조명받는다. 한 때 불량오락의 대명사였던 전자오락이 유망한 게임산업으로서 새롭게 조망되는 것은 바로 이때부터다.
불량오락과 유망산업 사이에서
1990년대 들어오면서 1980년대에 전자오락을 즐기며 자란 세대가 스스로 게임을 만들기 시작한다. 드디어 국산 게임이 개발되기 시작한 것이다. 이는 당시 글로벌 게임시장이 크게 성장하던 가운데 닌텐도나 세가 등의 일본 기업이 지배하던 그 시장에 도전장을 내밀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주는 것이기에 큰 주목을 받았다. 게다가 전자오락실에 있는 오락기 대부분이 일본산이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이 '왜색' 게임들이 아이들에게 미칠 문화적 영향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컸던 상황이었기에, 국산 게임은 왜색 게임에 대한 훌륭한 대항마가 될 것이라는 기대 또한 받게 되었다.
이와 같은 왜색 게임 vs. 국산 게임간 대치(?)는 한국 게임사에 있어 꽤 유의미한 대목이다. 이전까지 전자오락의 불량함으로 지적되던 (폭력성, 사행성 등을 포함하는) 비교육성 대신 게임의 왜색이 크게 부각되면서 그 반대항에 국산 게임이 배치되는 구도가 형성됐다. 이에 전자오락이 대중오락으로서 지닐만한 가치나 지향성이라는 문제가 산업적 가능성으로 치환되어버리는 결과로 이어졌다. 예컨대 이전까지는 "물체를 쏴 떨어뜨리는 것이나 도망가는 물체를 추격해서 부수는 등 폭력과 파괴를 줄거리"로 한다며 비판 받았던(동아일보 1986년 1월 14일 7면) 슈팅 장르의 게임에 대해 그것이 "우리 문화, 우리 시각을 바탕으로 만드는 '우리 것'"이기에 더 많이, 더 다양하게 나올 것을 독려하는 태도(한겨레 1992년 7월 1일 9면)로 바뀐 것이다. 정리하자면 처음부터 천대받았던 전자오락이 그 존재의 정당성을 '국산화'에서 발견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어떤 면에서 보면 '게임'이라는 새로운 이름도 결국 국산화에 따른 산업적 가능성이 증명되면서 얻게 된 것 같기도 하다("국산 전자오락"이라고 하면 어색하지만 "국산 게임"은 익숙하지 않은가!). 결과적으로 이와 같은 인식의 전환은 한국 게임의 산업적 발전에 기여했지만, 사회문화적으로 천대받던 '불량오락'의 그림자를 지우는 데까지는 이르지 못했다. 국산화 및 산업적 성장에 경도된 나머지 전자오락/게임의 대중적 오락으로서의 가치와 지향성에 대한 논의가 생략되어 버렸던 탓이다. 돌이켜보면 전자오락에 폭력성이나 사행성 등 '나쁜 오락/게임'을 성립시키는 조건은 상대적으로 명확했던 반면, '좋은 오락/게임'을 성립시키는 조건은 제대로 제시되거나 논의된 적이 없었던 것 같다. 그러니까, 전자오락의 시대가 오늘날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란 결국 '우리가 전자오락/게임을 충분히 이야기하지 않았다'인 셈이다. 오늘날 그 어느 시대보다도 게임에 관한 발화가 블로그, SNS, 온라인 커뮤니티 게시판 등지에서 넘쳐나고 있다는 점에서 전자오락 시대가 남긴 과제가 완료된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양적인 증가에 준하는 수준으로 질적 깊이나 다양성에 도달했는지를 생각해본다면 완료되었다 보기는 아무래도 어렵다. 수십년 전에 지나간 전자오락의 시대는 이렇게 오늘도 현재진행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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