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기차에만 존재하는 '국제 표준'
각 나라별로 '자동차산업(공업)협회' 같은 것이 조직되어서 자국 시장에서 자동차 판매량이 어느 정도인지, 승용차·상용차 혹은 세단·SUV 등 종류별로 얼마나 팔렸는지, 국내 생산차와 수입차별로 판매량 변화가 어떻게 발생하는지 집계를 하기 마련이다. 각국 정부에도 담당 부처와 부서가 있어서 자동차산업 동향을 면밀히 분석한다. 문제는 이런 협회들이 생산량·판매량 등의 통계치를 작성할 때 '국제 기준'이나 '국제 표준' 같은 것이 없다는 점이다. 어떤 나라는 경상용차(light commercial vehicle)를 하나의 카테고리에 넣기도 하고, 어떤 나라는 픽업트럭 생산·판매 통계를 별도로 작성한다. 상용차와 승용차를 나누는 기준도 천차만별이다. 기준과 표준이 모두 다르니 각국 자동차 판매량을 획일적으로 비교하는 것도 불가능하다. 세계자동차협회 같은 조직이 있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전기차는 이게 가능하다. 각국 정부가 가입해 있는 국제에너지기구(IEA)라는 꽤 공신력 있는 기구가 국제기준 내지 표준을 만들어 일률적으로 전기차 관련 통계수치를 발표하고 있기 때문이다.주춤하는 유럽·중국의 전기차 전환
차세대 전기차 시장, 동남아시아
미국의 경우 생각보다 전기차 판매량이 많지 않다. 중국과 유럽 시장에서 판매되는 전기차가 글로벌 총 판매량의 80%가 넘을 정도로 편중이 심하다. 이 대목에서 뭔가 이상하지 않은가? 세계 제1위와 2위 시장이 주춤거리고 있는데, 왜 글로벌 전기차 판매량 상승률은 그대로 유지되는 걸까? 대체 어느 시장이 중국·유럽의 멈칫거림을 보충해주고 있는 걸까. 아래 남미 주요 시장을 보면 이곳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브라질에서 전기차 판매량이 가파른 속도로 올라가고 있는 건 사실이지만, 브라질을 제외하면 아직 바닥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고, 남미 전체로 보면 시장점유율은 2%를 넘지 않는다. 그렇다면 어디일까.국제 무역분쟁이 낳은 풍선효과
그동안 세계경제와 무역질서는 주로 미국과 중국, 유럽이라는 3개의 핵심 경제권을 중심으로 돌아간다고 여겨졌다. 전통적인 제조업인 자동차산업도, 혁신기술인 AI(인공지능)나 빅테크산업도 모두 북반구에 위치한 이들 3개 경제권의 비중이 90%를 넘는다. 그러던 중 코로나19를 거치면서 '공급망(Supply Chain)' 확보가 주요 경제권의 핵심적 화두가 되었고, 자신의 경제권을 중심으로 완성된 공급망을 구축 아니 정확히 말하면 독점하려는 경향이 대두되었다. 내가 살아남기 위해 남을 죽여야 하는 무서운 게임이 시작된다. 공급망 독점 욕구는 다른 경제권을 절멸시켜야 한다는 무역분쟁의 씨앗이 되었고, 이는 현재 미국과 유럽이 각각 중국을 무너뜨리고 각자의 공급망을 완성하기 위해 동원가능한 모든 수단을 가동해 중국을 향한 무역분쟁을 제기하고 있다. 전기차를 핵심으로 한 자동차산업 부문만 예로 들어보자면, EU 집행위원회는 올해 7월 5일부터 중국산 수입 EV에 최대 17.4%~37.6%의 추가 잠정 관세를 부과한다고 발표하였다. 미국의 경우 이보다 앞선 올해 5월에 중국산 EV에 대해 관세를 100%로 인상하겠다고 밝혔다. 8월 1일부터 발효 예정이었던 관세 인상은 조사를 위해 잠정 연기된 상태이지만, 기존 트럼프 행정부가 부과했던 25%의 관세에 비해 무려 4배나 높은 규모이다.중국의 퇴로이자 우회로, 동남아 시장
중국은 2000년대 초반 자동차산업의 본격적인 발전이 이뤄지면서 얼마 지나지 않아 전기차로의 산업전환을 가장 빨리 착수한 나라이다. 한때 품질에 의문이 제기되긴 했으나 지난 10여 년 사이 글로벌 업체들과 견주어 손색이 없을 정도의 퀄리티를 확보해가고 있다. 문제는 중국 내에 확보한 엄청난 생산능력을 해소할 소비시장이다. 이미 중국 시장은 포화상태에 이르렀기에 주로 미국과 유럽시장으로 진출하는 길을 선택해왔다. 하지만 트럼프 행정부가 높은 관세를 부과하며 미-중 무역전쟁을 시작하였고, 최근에는 유럽으로의 수출장벽 역시 높아지게 된 것이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략전쟁으로 미국·유럽 자동차산업 자본이 러시아에서 철수하자, 중국업체들이 러시아로 진출해 반짝 이익을 챙기고는 있으나 러시아는 아직 매력적인 시장이 아니다. 여기서 중국 자동차산업 자본이 대안으로 선택한 지역이 바로 동남아 시장이다. 이 지역은 2가지 이유에서 중국 업체들이 플레이어로 뛰기 좋은 토양을 제공한다. 첫째, 미국과 유럽 자본이 많이 진출해 있지 않아 그들과 경쟁하지 않아도 않고, 미국과 유럽 영토가 아니기에 무역분쟁의 부담도 덜어낼 수 있다. 둘째, 동남아시아 시장 최고 강자는 토요타를 비롯한 일본 업체들인데, 이들은 전기차로의 전환에 매우 어려움을 겪고 있다. 즉, 전기차로 승부수를 던지면 일본 업체들과의 경쟁력에서 우위를 점할 수 있다. 동남아 진출로 중국 업체들이 챙길 수 있는 부수적인 이익도 2가지가 있다. 먼저 인도네시아에 매장된 엄청난 니켈을 비롯, 이 지역의 풍부한 자원을 활용할 수 있다. 글로벌 완성차업체들도 동남아 자원 활용을 위해 투자를 늘리는 실정 아니던가. 다음으로 동남아는 지리적으로 중국과 매우 가까워서 물류 비용을 절약할 수 있다는 장점도 있다. 자원의 풍부한 매장량 때문에도 동남아 각국 정부들은 자동차산업 생산 유치에 엄청난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아직 저발전된 시장, 하지만 풍부한 자원과 엄청난 인구로 폭발적인 시장 팽창이 가능한 동남아에서 중국은 유럽·미국과의 무역전쟁에서 입는 손해를 벌충하고 있는 것이다.미국 패권주의가 손 놓고 있진 않는다
지난 몇 년간 중국 업체들이 동남아에 공을 들인 결과, 적어도 전기차(EV) 시장에서만큼은 중국이 이 지역을 완전히 석권한 상태이다. 동남아에서 중국 브랜드의 EV 점유율은 무려 70%가 넘은 상황이며, 그 중에서도 비야디(BYD)는 무려 47%의 점유율을 자랑한다. 동남아 시장에서 판매되는 전기차 2대 중 1대는 BYD 브랜드 차량이라는 것이다. 지금까지는 중국 업체들이 주로 중국에서 생산해 동남아 시장으로 수출판매를 하는 방식이었다. 하지만 이 지역도 점차 자국 생산업체들에 대한 인센티브를 주는 방식으로 무역장벽을 높이기 시작하는 추세이다. 그래서 BYD는 자사 최초의 동남아 생산공장을 태국에 짓겠다고 발표한 상황이다. 이런 상황을 과연 미국과 유럽 업체들이 가만히 두고 보기만 할까? 미국·유럽 자본주의 체제의 지배자들은 다른 생태계, 특히 전기차 부문을 비롯해 세계경제 패권을 향해 떠오르고 있는 중국 생태계를 절멸시키진 못하더라도 최소한 손발은 꽁꽁 묶어놓아야만 미국·유럽 생태계가 살아남는다는 인식을 갖고 있다. 당연히 미국이 가장 먼저 나섰다. 다만 동남아 국가들을 미국이 직접 식민통치를 행하는 것은 아니기에, 중국 견제를 위해서는 다양한 포석과 그물망을 미리 깔아두는 것이 필요하다. 이를 위해 몇 년 동안 미국이 공을 들여 만들기 시작한 체제가 바로 '인도-태평양 경제 프레임워크(IPEF)'이다. 미국과 유럽, 그리고 중국의 세계경제 패권을 둘러싼 전쟁,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들 각자의 본토 대륙에서 무역장벽을 높이는 방식으로 이뤄지는 것으로만 알고 있다. 하지만 진짜 각축전은 동남아 시장에서 벌어지고 있다. 그 치열한 양상이 어떻게 전개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IPEF와 함께 다음 글에서 소개하도록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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