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중한 내 사랑, 당신과 십이 년은 빛으로의, 사랑으로의 여로였소. 내 감사의 마음은 당신은 알 것이오. 내 사랑도!-<밤으로의 긴 여로>(유진 오닐, 민승남 옮김, 민음사) <밤으로의 긴 여로>는 미국 현대 연극의 아버지로 불리는 유진 오닐(Eugene O'Neill, 1888~1953년)의 대표작이다. 이 작품은 오닐의 가족 이야기를 거의 그대로 담았다. 1953년 11월 27일, 65세에 보스턴의 한 호텔에서 오닐이 “빌어먹을 호텔 방에서 태어나 호텔 방에서 죽는군”이라고 탄식하며 쓸쓸히 죽음을 맞이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실제로 오닐은 떠돌이 연극배우 아버지 때문에 호텔 방에서 태어났고 자신도 부초처럼 살다가 탄식처럼 호텔 방에서 삶을 마감했다. <밤으로의 긴 여로>에서 메리가 한 다음의 대사는 보편적 언명이며 동시에 자신의 체험이라고 할 수 있다. “운명이 저렇게 만든 거지 저 아이 탓은 아닐 거야. 사람은 운명을 거역할 수 없으니까. 운명은 우리가 미처 깨닫지 못하는 사이에 손을 써서 우리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과는 거리가 먼 일들을 하게 만들지.” 불행한 개인사로 유명하다. 아버지 제임스 오닐은 가족과 함께 1848년 아일랜드 감자 대기근을 피해 미국으로 떠나온 이민자였다. 제임스 오닐의 아버지, 즉 유진의 할아버지는 미국에 온 지 1년 만에 아내와 자식들을 미국에 두고 조국으로 돌아갔고, 그곳에서 세상을 떠났다. 낯선 땅에 남겨진 가족이 어떤 곤궁에 처했을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뼈저린 가난 속에서 성장한 제임스는 연극 쪽에 재능을 발휘해 셰익스피어 전문 배우로 인정받지만 우연한 기회에 ‘몬테크리스토 백작’ 주인공을 연기해 부와 명성을 얻는다. 돈에 눈이 어두워진 제임스는 25년 동안 미국 전역을 돌며 6000회 이상 순회공연을 하며 셰익스피어와 거리가 먼 돈벌이 배우로 전락한다. 순회공연 중에 중산층 출신의 엘라 퀸랜을 만나 부부가 되고 유진 등 자녀를 낳았지만, 행복과는 거리가 먼 가정이 된다. <밤으로의 긴 여로>에서 그린 그대로이다. 미남 배우 제임스와 사랑에 빠져 수녀가 되겠다는 자신의 꿈을 접고 그와 결혼한 유진의 어머니는 싸구려 호텔을 전전하는 외롭고 불안정한 생활에 곧 염증을 느끼게 된다. 게다가 남편은 어릴 때 경험한 지독한 가난 때문에 가족에게 병적으로 인색하게 굴었다. 친정어머니에게 맡겨두었던 둘째 아들 에드먼드가 홍역으로 죽자, 자신과 남편과 홍역을 옮긴 큰아들 제이미를 원망하게 된다. 그러던 중 셋째 유진을 낳고 산후 통증이 가시지 않자 호텔의 주정뱅이 돌팔이 의사에게서 모르핀 주사를 맞게 된 후, 모르핀에 중독된다. 극에는 유진이 죽고 에드먼드가 셋째로 태어난 것으로 돼 있다. 오닐의 많은 작품 가운데 스스로 ‘피와 눈물로 점철된 오랜 슬픔의 연극’이라고 평한 <밤으로의 긴 여로>는 이러한 개인사를 직접적인 소재로 삼았다. 오닐의 자식 대에도 이런 비극이 고스란히 이어져 그는 질병까지 겹친 상태로 고통스러운 말년을 보냈다. 작가의 개인사가 온전히 녹아든 자전적 작품이어서 오닐은 자신의 사후 25년 안에 발표하지 말고 그 후에도 절대 무대에 올려서는 안 된다고 못박았다. "들어갈 때보다 10년은 늙은 듯한 수척한 모습으로, 때때로 울어서 눈이 빨갛게 부어서" 오닐이 작업실에서 나오곤 했다고 아내 칼로타는 전했다. 칼로타는 오닐의 세 번째 아내이다. 이 작품은 작가의 당부와 달리 사후 3년 뒤인 1956년에 초연(初演)·출간돼 그의 대표작이 됐다. 이 책을 두고는 작가의 개인사나 집필 동기와 함께 제목에 관한 해석이 많이 논의된다. 오닐의 작품을 포함하여 서구 문학엔 기독교의 맥락이 빈번하고 깊숙이 깔려 있어 번역문으로 그들의 문학을 접하는 우리 같은 이방인은 더욱더 그 맥락을 놓치기 쉽다. 이 책이 특히 더 그렇다. 제목 ‘밤으로의 긴 여로(Long Day's Journey into Night)’는, 구약성서 열왕기상 19장 4절의 “자기 자신은 광야로 들어가 하룻길쯤 가서”(개역개정)와 연관된다. 여기서 자기 자신은 구약성서의 대표적 인물 엘리야를 말하며 영어 성서는 “he himself went a day's journey into the wilderness”로 적혀 있다. ‘광야로의 하루의 여로(a day's journey into the wilderness)’가 ‘밤으로의 긴 여로(Long Day's Journey into Night)’로 살짝 바뀌었다. 성서의 상황을 설명하자면, 이스라엘 왕 아합(허먼 멜빌의 소설 <모비딕>의 선장 이름으로 사용된 이스라엘의 유명한 왕)과 아내 이세벨은 구약의 유명한 선지자 엘리야에 분노하여 “이세벨이 사신을 엘리야에게 보내어 이르되 내가 내일 이맘때(by tomorrow about this time)에는 반드시 네 생명을 저 사람들 중 한 사람의 생명과 같게 하리라”고 말한다. 즉 권력자(이세벨)로부터 “넌 24시간 안에 죽은 목슴이야”란 통첩을 받고 황망하게 도주하는 모습이 ‘광야로의 하루의 여로’에 담겼다. 하루(a day's journey) 안에 생사가 갈린다. 이후에 엘리야가 어떤 심적 고통을 겪는지는 성서에서 확인된다. 희곡의 ‘긴 하루(Long Day's Journey)’는 “피와 눈물로 작성된 슬픔”을 뚜렷하게 보여주고 구약성서에서 내보이는 고통의 맥락을 함께한다. 다만 조금 긍정적으로 해석하자면, <밤으로의 긴 여로>는 희망을 놓지는 않았다. 긴(Long)이란 수식어에도 불구하고 희곡 안의 시간은 아침부터 자정 무렵까지로, 성서의 하루(a day's journey)라는 시한에서 아직 시간을 남겨두었다. 새벽을 남겨두었기에 확고하게 절망적이지만 아직 희망의 문이 닫히지 않아 일말의 여지가 남은 상태이다. 인용문은 아내 칼로타에게 바친 제사이다. 원문으로 읽으면 조금 더 의미가 뚜렷해진다. These twelve years, Beloved One, have been a Journey into Light—into love. You know my gratitude. And my love! <밤으로의 긴 여로>가 텍스트상으로 열린 결말의 형식을 취하지만, 무엇보다 제사를 통해 희망을 열어놓았다는 생각이다. 오닐은 제사에서 (칼로타와 삶이) “빛으로의, 사랑으로의 여로였다”(a journey into light, love)고 말했다. 오닐이 밤(Night)이 아니라 빛(Light)이라고 대비하여 적은 것을 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꿈꾸기를 그치지 않았다고 해석해도 좋을까. 아주 낙관적으로 말하면, 밤으로 접어드는 게 명백할 때는 어떤 아침을 맞을지, 혹은 아침이 있을지조차 알 수 없지만, 만일 밤에서 일어난 모든 문제를 밤에 해결할 수 있다면 우리가 맞이할 아침은 빛으로 충만한 순간이 된다. 밤이 남아있다는 사실이 큰 위로일 수 있다. 물론 속수무책의 상황에 부닥쳤다면 밤은 그저 고통의 배가이거나 삶의 저주에 불과하다. 해가 뜨기 전까지 그 밤이 어떤 밤인지 모른다는 게 대인난(宽以待人難)을 닮은 인생살이의 묘미이자 고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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