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장애인 학자가 이런 표현을 썼어요. 장애인으로 살아가는 것은 세상이 나의 댄스 플로어가 아니라는 걸 알게 되는 과정이다. 이 세상은 나를 표현하고 드러내고 자유롭게 탐구하고 말하기에 적합하지 않다는 거죠."
출근길 지하철에서 이동권 보장 시위를 벌이는 장애인들, 바쁜 출근길이라 짜증을 내며 욕하는 시민들, 이런 즉자적 분노를 정치적으로 이용하려고 장애인들에 대한 '혐오 발언'을 쏟아내는 일부 정치인들, 한국 사회의 일상이다.
국가인권위원회 등에서 일하던 장애인 변호사 김원영은 이제 무용수로 춤을 춘다. 공연을 하고, 비장애인들과 함께 무용 워크숍을 열어 자신의 몸을 어떻게 움직일 수 있는지, 이를 바라보는 타인들의 시선에 대해 탐구한다.
"장애인의 신체는 공공장소 어디에서나 크고 작은 소란의 진원지다. 장애는 기존의 사회적 규칙, 질서, 의례, 문화적 실천, 공공인프라 등과 어긋나기 쉬운 조건이자 상태다."(174쪽)
자신에게 '댄스 플로어'를 내주지 않은 세상에 맞서 무대 공연을 통해 '소란'을 일으키며 "아름다울 기회의 평등"을 주장하고 있는 김원영 작가가 쓴 <온전히 평등하고 지극히 차별적인>(문학동네 펴냄)은 무용가로서 그의 여정을 담고 있다.
김 작가는 <프레시안>과 인터뷰에서 '병신춤', '프릭(freak, 장애인 등 비정상적으로 여겨지는 몸을 가진 사람들을 통칭) 쇼'라는 공연의 역사 때문에 처음에는 자신의 작업에 대해 걱정이 많았다고 말했다. 사회는 장애인의 몸을 그 자체로 볼 거리로 만들고 소비해왔으며, 대중의 인식과 시선도 여기에 머무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동료들을 만나고 공연을 찾아온 관객들을 보면서 달라지게 됐다고 한다.
"좋은 무대는 가장 진실한 순간을 만든다. 좋은 공연자는 현실에 소란을 일으키고, 새로운 현실을 창안한다. 내가 어린 시절이라면, 이 흥미로운 예술가들은 기껏해야 '병신 육갑한다'는 비난을 들었을 것이다. 그들이 새로운 현실을 만들었다."(215쪽)
다음은 지난 29일 서울무용센터에서 진행한 김 작가와 인터뷰 주요 내용이다.
변호사에서 무용수가 되기까지
프레시안 : 차별은 위계가 포함된 용어로 사용됩니다. 제목에 차이가 아니라 차별이란 용어를 사용한 까닭이 있을까요? 차별이란 용어 자체의 탈정치화를 의도한 것인가요?
김원영 : 제가 볼 때 사람들이 다른 사람보다 뭔가를 잘하고 싶은 욕망들이 있는데 그런 욕망을 긍정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어요. 책에서 '탁월성'이란 표현을 썼습니다.
중증의 장애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도 내가 할 수 있는 아주 작은 일이라도 남보다 잘해서 선명한 존재가 되고자 분투하는 경향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것에 주목하는 것이 오히려 우리가 더 동등하게 사람들을 대우할 수 있는 길이 아닐까. 그래서 약간의 위험도 있고, 또 약간의 진실을 품고 있기도 한 차별이란 용어를 썼습니다.
프레시안 : 프롤로그에 이런 대목이 나옵니다.
"어느 날 장애인 무용수의 공연을 보았다. 처음 본 장애인 무용수의 움직임은 인상적이었으나 아름답지는 않았다. 이념만으로는 정당화할 수 명백한 '능력'의 차이가 장애인 무용수와 비장애인 무용수 사이에, 나와 비장애인 친구들 사이에 존재했다. 춤 따위에 관심을 가지기 보다는, 몸에 주의를 기울이기보다는, 언어와 규범의 세계에서 교양과 전문성으로 무장한 어른으로 살고자 애썼다." (6쪽)
이는 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해 변호사가 되고 장애인권운동을 했던 김 작가가 자신의 '몸'을 인식하는 방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몸'과 유리된 '언어/이성'의 세계의 한계를 깨닫게 된 결정적 순간, 계기가 있었나요?
김원영 : 제가 무용이라고 부를 수 있는 작업을 하게 된 것은 7, 8년 전인데 공연 작업에 대한 관심은 쭉 있었고, 어느 날 갑자기 계기가 있었던 건 아닙니다. 대학 다닐 때도 공연을 하고 싶었지만 할 수 없는 여건이었고, 그때는 장애인권동아리 활동 외에 다른 걸 하려는 생각이 어려웠고, 기회도 없었어요. 하지만 줄곧 무대 공연이라는 형식 속에서 사람들에게 그냥 대상화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보여주고 싶은 방식을 탐구해서 사회적으로 규정되는 것과는 다른 방식으로 나를 진실되게 보여주고 싶다는 욕망은 계속 있었어요.
그러다가 한국 사회에서도 장애 예술 영역이 좀 열리고 현대 무용 작업들을 접하게 되면서 내가 하고 싶은 것이 연극일 수도 있지만, 춤일 수도 있구나 이런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프레시안 : 변호사가 되기까지의 과정이 어떤 의미에선 장애가 있는 자신의 몸에 대한 부정이었다면, 무용수가 되는 과정은 자신의 장애, 몸에 대한 인정과 타인의 시선에 대한 인정과 이에 기반한 진정한 해방을 추구하는 과정이라고 보여집니다. 무용을 하면서 '몸'에 대한 인식이 어떻게 변화해 나갔나요?
김원영 : 그 이전에는 제 몸을 어떤 식으로든 가장하거나 무시하려는 태도가 있었어요. 그래서 건강 관리를 거의 안 했죠. 물리적 신체로서의 몸은 계속 신경을 안 쓰고, 그냥 정신적인 탁월함에 도달하고 싶다, 독특한 생각을 하고 싶다, 지적인 성취를 하고 싶다는 생각들만 한 거죠.
또 사람들이 얘기하는 몸 관리에 대한 얘기들은 저랑은 다 상관이 없어 보였어요. 요가, 조깅, 등산, 이런 건 저랑 아무 상관이 없는 얘기였고, 제가 할 수 있는 거는 커피나 에너지드링크를 왕창 먹어서 각성을 시키는 정도였죠.
지금은 제 몸이 저의 정신이나 마음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고, 이것이 구현된 산물이라는 걸 생생하게 느끼고 있기 때문에 과거와 비교해 신체 관리도 하게 되고, 몸의 가능성에 대해 탐구하는 것에도 관심이 많습니다. 그래서 지인을 통해 저에게 맞는 요가도 배우고 있습니다.
다른 속도와 방식을 가진 사람에겐 너무나 가혹한 한국 사회
프레시안 : 변호사에서 무용가가 되는 과정은 '평등'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사유의 과정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법 앞에서의 평등'을 넘어서 '온전한 평등'에 대한 추구라고 해석될 수 있습니다. 또 개인의 '차이'가 '불평등', '배제'로 이어지지 않을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한 모색이라고도 보여집니다. 이런 관점에서 현재 한국 사회는 어느 정도 수준이라고 보십니까?
"온전한 평등은 추상적 규범이나 이념으로서가 아니라 '능력'의 측면에서 지극히 차별적인 관계에 놓은 존재들이 상대의 '힘'을 존중하고 신뢰할 때 달성된다(…)그때 우리는 '법 앞의 평등'에만 머물지 않을 것이다. 각각의 차별적인 능력을 지닌 개인들이 서로의 동등한 힘에 주의를 기울일 때, 우리는 고유한 개인이 되면서도 더 큰 세계의 일부가 된다."(9-10쪽)
김원영 : 어려운 질문인데요. 한국 사회에서 '법 앞의 평등'도 아직 갈 길이 멀다고 할 수도 있죠. 법과 제도적인 측면에서 문제들이 많이 있고, 이걸 해결해 나가는 것도 너무 중요한 일이죠. 저는 한국 사회가 과거에 비해서는 나름대로 규범과 제도를 촘촘하게 만들어 가고 있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장애는 인지적인 부담을 일으키는 존재들 입니다. 내가 항상 보던 일상의 속도와 이미지들와 다른 존재가 등장하면 부담이 주어지잖아요. 한국 사람들은 너무 힘들고 바빠서 그 부담을 참지 못합니다. 단적으로 제가 한국에서 저상버스를 탄 적이 많지는 않는데, 탈 때마다 발판이 안 나오거나 늦게 나와요. 그러면 기사님이 내려서 자동 발판을 막 빼려고 하고, 시간이 흘러가면 반드시 버스 안에서 한숨 쉬는 소리가 들립니다.
저는 해외에 대한 환상이 전혀 없고 해외에 살아보지도 않았지만, 독일, 영국, 일본, 대만 등을 방문했을 때 대중교통을 탈 때 노인들이 보조기구를 끌고 천천히 타기도 하고, 상인들이 짐을 많이 들고 타기도 하고, 그럼 굉장히 운행이 느려지지만 다들 그냥 기다려요.
한국이 인구 밀도가 높고 속도도 굉장히 빠른 사회여서 우리 모두 다 너무 지쳐 있기 때문에 그렇게 예민한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공적인 장소에서 다른 속도와 방식을 가진 사람들이 한국에서 살기가 너무 어려워요. 이제는 물리적 인프라의 문제라기보다는 그런 사람들에 대한 시선이 너무 가혹합니다. 노키즈존 이슈도 마찬가지죠.
제가 계속 관심을 갖는 건 실제 물리적으로 어떻게 같이 살아갈 것인가 이 문제인 것 같아요. 춤은 물리적 공간에서 몸과 몸으로 만나는 거니까 그런 점에서 의미가 있다고 봅니다.
'장애인 시위'를 "비문명적 행동"이라 비난하는 여당 대표, 그러나…
프레시안 : 책에서 여당 당 대표(당시 이준석)이 '장애인 이동권 시위'를 "비문명적 행동"이라고 비판한 것에 대해 언급했습니다. 자본주의가 고도화되면서 사회구성원들을 모두 개별화, 개인화 시키면서 오히려 여성, 장애인, 성소수자, 노인 등 사회적 약자들에 대한 '폄훼', '혐오' 문제도 다시 불거지고 일부 정치권은 이를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있습니다. 이런 문제에 대해 어떻게 보시나요?
김원영 : 온라인에서만 보면 장애에 대해 풍요로운 담론들이 과거에 비해서 많이 생겨나고 있어요. 장애인 유튜버들도 많잖아요.사람들이 좋은 댓글도 달고, 이해는 굉장히 넓어졌어요.
근데 실제 살면서 견디지 못하는 거죠. '출근길 지하철 행동'이 이에 정면으로 맞서는 실천이죠. 근데 시위 영상을 보면 엄청나게 욕을 하는데, 또 한편으론 그 상황을 그냥 조용히 감내하거나 더 나가서 지지한다고 얘기하는 분들도 있더라구요. 10명이 욕을 한다고 했을 때, 진짜로 혐오하는 사람은 더 적을 거라고 생각해요. 이 분들이 퀴어축제에 도시락 싸들고 가서 욕하는 분들하곤 다르잖아요. 그냥 출근하다 만난 거고, 그 상황에 대한 즉각적인 반응인 거죠. 제가 책에서 반응과 대응의 구별을 얘기했는데, 이건 정말 감정적인 반응입니다. 저는 욕을 하는 분들이 10명이라면 9명은 감정적 반응인 분노이고, 1명 정도가 혐오가 아닐까 싶은데요, 분노한 사람들은 나중에 돌아가서 관련 뉴스를 찾아보고 장애인들의 상황에 대해 알게 되고 생각이 바뀔 수도 있습니다.
그 상황에서 10명이 화를 내고 5명이 침묵했다면, 그 5명의 힘이 훨씬 강한 거라는 생각이 들어요. 거기서 분노하지 않고 그 상황을 견디고 오히려 지지한다고 말한 사람들은 정말 적극적으로 힘을 실어주는 거니까요. 그렇게 본다면 우리 사회가 꼭 나쁘게 가는 것만은 아닐 수도 있다고 생각해요.
프레시안 : 우리 사회에서 여성이나 장애인의 몸은 쉽게 대상화, 타자화, 상품화 됩니다. 책에서도 '병신춤', '프릭쇼'를 언급하면서 장애의 몸이 소비되고 전시되는 것에 대한 고민을 밝혔는데요, 무용을 하면서 이에 대한 생각이나 고민이 바뀌었는지요?
김원영 : 프릭쇼나 병신춤의 전통이 있다는 걸 알고 있어서 오히려 아무 것도 할 수 없었어요. 단적인 예로 제가 휠체어에서 바닥으로 내려가서 뭔가를 하고 싶은데 못 하겠는 거예요.
그런데 무용을 하면서 개인적인 용기가 생기기도 했고, 동료 작업자들과 관객들을 만나면서 신뢰가 생기기도 했습니다. 예전에는 동료들이 '괜찮아, 안 이상해'라고 얘기해도 위로해주려고 하는 거짓말이라고 생각했어요. 관객들이 박수를 쳐줘도 힘들게 하니까 박수를 쳐준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워크숍이나 관객들과의 대화 등을 통해 많은 이야기를 하면서 어떻게 보면 제가 오히려 그런 시선에 가장 많이 사로잡혀 있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분명히 특정한 소수자들의 몸을 바라보는 전통적인 인식이 있고 사람들이 자동적으로 그런 반응을 많이 할 수밖에 없는 사회에 살고 있다 하더라도 그 중에 굉장히 주의 깊게 보는 사람들이 있어서 우리가 공연을 잘 만든다면 다르게 보일 수 있다라는 믿음이 생겼어요. 그래서 춤을 추는 것이 고유한 몸의 표현 방식으로 보이는 것을 찾아가는 과정이고, 매우 재미있기도 합니다.
아름다움이란 무엇인가? 장애인 무용수의 질문
프레시안 : 책에 시대를 앞서간 여러 무용가들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사도로 덩컨에게는 장애인 언니가 있었습니다. 니진스키도 정신장애 형이 있어서 자연스럽게 장애인 시설을 방문하면서 장애인들을 만났습니다. '병신춤'의 대가로 평가받은 공옥진도 자신들이 직접 만난 이들을 통해 춤을 완성시켰다고 합니다. 무엇이 아름다운 것인가에 대한 평가는 사람들의 인식에 따라 변합니다. 장애인 무용수의 작업은 이에 대한 질문이라고 생각됩니다.
김원영 : 아름다움이 큰 말이잖아요. 굉장히 복잡한 의미가 들어가 있고. 제가 2013년에 처음에 연극을 할 때 제 머릿속에는 비율과 대칭을 중시하는 고전주의적인 미 개념이 있었어요. 그때 제 생각에는 장애가 있는 이들을 어떻게 잘 연출을 하면 그들이 고전주의적 미의 이상에 부합할 수 있는 공연을 할 수 있다는 열망이 있었어요. 사실 그건 굉장히 무리한 시도였죠.
근데 시간이 좀 지나면서 제가 발견한 것은 선명도였던 것 같아요. 무대 위에서 선명성을 가질 수록 대칭이나 비율과 같은 전형성은 덜 중요해지더라구요. 다양한 장애인 극단들의 공연도 보면서 그 사람들이 정말 무대 위에서 눈빛부터 하나하나의 움직임의 질감이 정말 선명하게 존재했을 때, 좋은 공연이고 그들이 너무 아름답다는 생각을 하게 되더라구요.
아무리 혁신적인 이사도라 덩컨이라도 장애가 있는 신체에 대해 전제하지 못했는데, 지금 저희는 생각할 수 있게 됐죠. 연습할 때나 다른 분들의 공연을 보면서 저의 생각도 많이 넓어졌어요. 그 사람이 그 사람으로서 그 움직임의 의도와 이유들이 분명하고 그럼으로써 존재하는 이유가 분명해지면 분명해질수록 정말 아름답구나 이렇게 생각하게 됐죠.
프레시안 : 이는 책의 마지막에서 언급한 '잘 추는 춤'과 '좋은 춤'에 대한 개념과도 연결된 생각입니다. 설명 부탁드립니다.
김원영 : '좋은 춤'은 한 시대의 평가에 달려 있는 거죠. 이를테면 지금 뉴진스의 멤버들이라도 어떤 시대에 태어났으면 그들의 춤이 좋지 않다고 평가받을 수도 있죠. 지금 발레리노의 몸과 역량도 조선시대라면 전혀 다른 평가를 받을 수 있겠죠. 그러니까 좋은 춤은 약간 선물 같아요. 글쓰기도 마찬가지고, 어떤 시대에 내 글의 스타일과 역량이 맞으면 좋은 글이란 평가를 받죠. 내가 갖고 있는 성향과 재능이 그 시대가 좋다고 평가해주는 것과 맞아 떨어지는 것이니까 그건 내 인생의 선물처럼 찾아오는 것이고, 그 좋은 춤을 보는 관객들에게도 선물이죠.
'잘 춘 춤'은 내게 주어진 내 몸으로 할 수 있는 것들을 가장 잘할 때 구현된다고 생각됩니다. 법 철학자 로널드 드워킨은 '잘 살기'를 자신에게 주어진 인생을 하나의 가치 있는 무엇으로 여기고 최선을 다해 그 가치를 구현하는 삶이라고 했어요.
잘 춘 춤은 좋은 춤이 아닐 수도 있어요. 그 시대가 평가해주지 않으면 소용이 없는 것이죠. 마찬가지로 좋은 춤이 잘 춘 춤이 아닐 수도 있구요. 저는 이 두가지를 통합해서 사고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좋은 것을 의식하지 않고 잘하는 것만 생각하면 자기 도취에 빠지는 거죠. 더욱이 계란도 집고, 춤도 추는 테슬라 2세대 로봇이 등장한 시대에 인간 무용수의 춤이 언제까지 평가를 받을 수 있을까란 의문도 등장하고 있습니다.
그런 면에서 저는 우리가 그 춤을 잘 추려고 노력한 다양한 몸들을 좋은 춤이라고 평가할 수 있는 비평적인 시선들을 더 발명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자신에게 맡겨진 그 몸으로 책임을 다해 잘 추려는 사람들이 좋은 춤의 의미를 확장했고, 확장된 좋은 춤의 기준 속에서 더 잘 추는 사람들이 나타났으며, 그 사람들이 다시 좋은 춤이 무엇인지에 대한 우리 시대의 가치관을 재구성한다. 당당히 권리를 주장하고, 기꺼이 사랑하고, 마음껏 춤추더라도 당신과 나의 삶이 파멸할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온전히 평등하고, 지극히 차별적인 존재가 되어야 할 과제만이 우리 앞에 있다. (343쪽)
장애인에게도 '댄스 플로어'를 허하라
프레시안 : 우리가 타인을 어디서, 어떻게 만나느냐가 그 사람을 인식하고 평가하는데 영향을 미칩니다. 그런데 우리는 장애인을 병원이나 시설, 아니면 지하철의 시위 현장 등 매우 제한적인 공간에서 만납니다. 그런 점에서 무대 위의 장애인을 만나는 경험이 소중하고 장애인 무용수의 작업이 의미가 크다고 생각됩니다.
김원영 : 얼마 전에 읽은 글에서 미국 장애인 학자가 이런 표현을 썼어요. 장애인으로 살아가는 것은 세상이 나의 댄스 플로어가 아니라는 걸 알게 되는 것이라고. 물론 여기서 댄스 플로어는 굉장히 추상적인 비유죠. 장애인인 내가 춤을 추기에 적합한, 나를 표현하고 드러내고 자유롭게 탐구하고 말하기에 이 세상은 적합하지 않다는 거죠.
그렇기 때문에 춤, 공연을 한다는 것은 거꾸로 가는 거죠. 장애인들에게는 댄스 플로어가 아닌 세상에 대한 문제제기인 셈이고, 장애인들이 어떻게 움직일 수 있고, 그 움직임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에 관한 새로운 인식을 발명해 나가는 과정이죠. 그리고 이런 것들이 우리 사회의 일상에도 확산되기를 바랍니다.
나를 속박하는 각종 규범을 뛰어넘어 기꺼이 경이로운 순간의 일원이 되면서도, 객관적인 외부상황과 조건, 타인들의 존재를 의식하며 그 세계에 접속하는 춤은 고도의 기예(art)다. 이를 익히기 위해서는 훈련이 필요하다. 나는 뒤에서 이 기예에 도움이 되는 방법 하나를 제안할 것이다. 다만 그전에, 우리가 훈련하고자 하는 이 기예란 좋은 춤이나 개인의 경이로운 체험을 위한 조건에 그치지 않는, 매우 정치적이고 공동체적인 폭력을 예방하는 일과 관련되어 있음을 강조하고 싶다. (27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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