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이 동양의 희생으로 살아간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유럽 제국주의의 열강은 주로 동양 식민지를 희생시켜서 부유해졌지만, 동시에 식민지를 무장시켜 싸움을 가르쳤고, 그렇게 함으로써 서양은 동양에서 자신의 무덤을 파고 있다."(상기책 인용, 미기재시 동일)
러시아 혁명이 독특했던 것은 러시아나 소비에트 연방 소속의 민족만을 위한 혁명이 아니었다는 사실에 있다. 레닌은 1918년 5월 공산당 중앙위원회에서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사회주의의 이해, 세계 사회주의의 이해가 민족의 이해, 국가의 이해보다 고귀하다고 주장한다." 레닌이 주창한 민족자결권선언은 강력했다. 저자의 설명이다.
"10월 혁명이 없었다면, 유럽으로부터 식민지였던 곳의 민중들이 맞서서 일어났을까? 1919년 제국의 주인에 맞선 식민지의 봉기가 확산되었을까? 사드 자글룰 파샤(이집트 혁명가-필자 주)가 이끈 이집트봉기에서 조선의 3.1운동, 중국의 5.4운동까지, 그리고 다음해 영국의 지배에 맞선 이라크의 반란, 그 다음 3년후 전 세계에서 두 번째로 사회주의 국가를 창출한 1921년 몽골 혁명은 가능했을까? 소비에트 연방으로부터의 계급적 요구가 없었다면 1919년 인도국민회의는 결코 농민의 요구를 채택하지 않았을 것이다."
물론 미국의 우드로 윌슨도 민족자결을 이야기했다. 그런데 그의 정부는 1913년 멕시코, 1914년 니카라과, 1015년 하와이, 1916년 도미니카를 침공했다. 윌슨의 민족자결주의는 공허한 말장난에 지나지 않았다. 식민지 민중에게 양자의 차이는 명확했다. 신생 국가로서 소련은 자신들도 생존에 허덕일 때 왜 제3세계 지원에 열정적으로 매달렸던 것일까? 레닌이 서구 마르크스주의의 한계를 알았기 때문일 것이다. 서구마르크스주의는 역사의 주체를 노동조합을 중심으로 조직화된 산업노동자 즉 프롤레타리아라는 협소한 개념으로 바라보았다. 선진자본주의국가를 제외한다면 도시 거주 산업노동자는 소수에 불과했다. 레닌은 이것을 전체 노동자와 농업프롤레타리아의 결합으로 확장시켰다. 역사의 주체가 확장되었듯 투쟁도 더욱 확대된 지평 속에서 수행되어야 했다. 레닌에게서 혁명은 서구 산업노동자에서 비서구 식민지민중의 과업이 되었다.저자의 말이다. "필요한 것은 노동자와 농업프롤레타리아가 자신의 투쟁을 인류 전체를 위한 투쟁으로 이해하도록 의식을 확장하는 것이다. 노동자들은 자본의 제한적 한계 내에서 더 나은 거래를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훨씬 더 넓은 공산주의의 지평 내에서 더 나은 세계의 건설을 추구해야 한다고 레닌은 썼다." 레닌의 이런 생각은 이후에도 계속 이어졌다.
소련의 발전과 식민지민중에 대한 지원은 많은 사람들을 감동시켰다. 그 사람들 중에는 인도 수상이 되는 네루도 있었다. "네루는 '농민사회’가 빈곤에서 동료의식으로, 기아에서 포만으로 급속하게 이동한 능력에 감탄했다. 러시아가 네루의 관심을 끈 것은 인도와 소비에트 연방 둘 다 민중의 자유에 장애물인 빈곤과 문맹에 갇힌 농민 국가였기 때문이다." "1927년 네루를 더 놀라게 했던 것은 자신이 상상한 것보다 러시아에 빈곤이 더 적었을 뿐 아니라 그 지도부가 노동자·농민이었다는 사실이었다."
네루를 가장 사로잡은 것은 통계상의 수치가 아니라 문화적 풍요로운 사회생활의 모습이었다. "농민들은 자신의 신문, 농촌축제, 학술원과 요양원을 가지고 있다. 그들은 자신들의 도서관과 열람실, 여성클럽을 가지고 있다. 문맹퇴치협회와 상호부조협회는 어디에서나 찾아볼 수 있다. 그리고 선구자(전연방선구자조직)와 콤소몰(청년공산주의동맹) 등 청소년과 청년 조직들도 그러하다. 이 풍요로움, 이 부유함은 진보의 가장 휼륭한 척도였다." 인도, 중국과 비슷하던 러시아 사회가 단기간에 이룩한 성취였다.
이런 발전과 세계에 대한 지원을 배경으로 많은 식민지 지식인들이 소련 모델을 지향했다. 대표적인 인물이 마오쩌둥과 호찌민이었다. 책에는 제3세계에 대한 소련의 지원에 대해 많은 사례를 열거하고 있다. 이 부분은 필자가 쓴 칼럼 <우크라이나 다음은 한국일까>의 일부 내용으로 갈음하고자 한다. "촘스키는 자신의 책 <촘스키 은밀한 그러나 잔혹한>(노암 촘스키 지음, 권기대 옮긴, 베가북스 펴냄)에서 이렇게 단언한다. "소련제국은 자기네 식민국가들보다 오히려 더 가난했던 인류 역사상 최초의 제국이다." 소련이 얼마나 아낌없이 주는 나무였는지를 20세기 최고의 역사가로 불리는 에릭 홉스봄은 자신의 책 <극단의 시대 20세기 역사>(에릭 홉스봄 지음, 까치 펴냄)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혁명 운동들을 배반했다고 소련을 비판한 중국 공산주의 정부가 제3세계 해방운동에 대한 실질적인 지원의 면에서 소련에 필적할 만한 기록을 가지지 못했다는 것은 기묘한 일이다."
소비에트 연방을 기억하자는 저자의 주장에 보통의 한국인들은 당황할 것이다. 그러나 소련과 러시아에 대한 부정적 소식의 대부분은 근거가 부실한 것이다. 나치 언론인에 의해 퍼진 홀로도모르에서부터 푸틴의 호화별장, 부차학살 조작까지 서구 언론의 소련, 러시아에 대한 악의적 정보조작은 끝이 없다. 게다가 소련을 향한 평가는 지극히 까다롭다. 소련이 군사적으로 외국에 개입한 경우는 아프가니스탄 하나였다. 여성의 인권보장에 전향적이었던 개혁적 사회주의정권의 공식적 요청에 의한 파병이었다. 이들이 싸운 상대는 반개혁적이고 여성의 인권을 무시하던 종교적 보수세력이 모인 미국이 지원한 탈레반이었다. 미국이 사주한 인도네시아 학살에서만 100만명의 희생자가 발생했다. 소련과 미국은 비교의 대상조차 되질 않는다.프라샤드는 소련의 성취와 함께 한계도 인정한다. 저자는 러시아 혁명의 핵심 동력이었던 진정한 민주주의에 대한 대중의 참여와 열기가 줄어든 것을 소련 쇠퇴의 근원적 요인으로 본다. 공산당의 관료주의가 심화됨에 따라 민주주의적 열기는 식기 시작한다. 그 공간을 관료와 기회주의자들이 채웠다. 저자의 설명이다. "당이 반대를 억압하기 시작하자, 소비에트 정치의 풍부한 잠재력은 줄어들었고, 당의 입지는 취약해졌다. 당원들은 관료제의 기관원으로 전락했고, 당 정치활동은 국가의 행정 활동으로 변질됐다." "모든 권력을 프롤레타리아에게 이전한다면 우리 혁명은 무적이다"라고 말한 레닌의 충고는 지켜지지 않았다.
경제적, 문화적으로 번성하던 소련은 왜 공산당 관료국가가 되었을까? 이것에 대한 설명은 책에 보이지 않는다. 필자는 로자 룩셈부르크의 통찰을 배울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로자는 레닌의 중앙집권적 전위당 노선은 민주주의의 결여로 이어질 개연성이 크다고 보았으며 그 위험성을 경고했다. 마르크스주의에는 혁명 이후의 사회 설계도가 없다. 이것은 현재도 마찬가지다. 혁명가들은 혁명을 성공시키는 일에 몰입했지만 금방 자신들의 나침반이 작동하지 않음을 깨달았다. 정신적, 이념적 나침반이 없기에 정신적 긴장이 늦추어지고 사회는 관료주의에 빠진다. 필자는 중국의 문화대혁명이나 북한의 주체사상 모두 관료주의를 해결하려는 그들만의 시도였다고 생각한다. 물론 모두 실패로 귀결되었다. 저자는 소비에트 연방의 존재에 대해 다음과 같은 말로 애정을 보내며 책을 마무리한다."소련이 사라졌기 때문에 소련에 아무런 장점이 없었다고 볼 수는 없다. 소련은 우리에게 노동자와 농민의 국가가 존재할 수 있고, 그것이 단지 부자들이 아니라 막대한 인민 대중에게 유리한 정책을 창조할 수 있으며, 굶겨 죽이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을 치료하고 교육시킬 수 있다는 확신을 제공한다. 이것은 여전히 지켜야할 가치이다."
소비에트 연방에 대한 평가는 개인의 가치관마다 다를 수 있다. 그럼에도 한가지는 변하지 않을 것 같다. 소비에트 연방이 식민지 민중들에게는 빛나는 별이었다는 사실이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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