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연합 기업 지속가능성 실사지침'(EUCSDDD)
지난 7월 25일 '유럽연합 기업 지속가능성 실사지침'(EU Corporate Sustainability Due Diligence Directive)이 발효되었다. 이에 따라 2년 안에 EU 회원국은 자국 실정에 맞게 관련법을 제정해야 한다. EU 지침의 핵심은 대기업에게 본사와 자회사의 운영과 활동사슬(chain of activity) 하에 있는 협력업체(business partners)의 사업에서 인권과 환경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활동을 예방하는 정책적 책임과 동시에 만약 문제가 발생할 경우 이를 시정하고 보상할 법률적 의무를 부과하는 것이다. EU 지침에 따르면 기업은 (1)인권과 환경을 중심으로 하는 책임경영 정책을 기업의 관리체제에 포함시키고 (2)실질적 부작용과 잠재적 부작용을 확인, 평가하고. (3)부정적 영향을 중지, 예방, 축소하고 (4)관련된 정책의 실행과 결과를 추적하고, (5)부정적 영향이 어떻게 해결되는지 의사소통을 하는 등의 실사(Due Diligence) 의무를 지니게 된다. 이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노동자와 협력업체 등 이해관계자와의 정보공유와 협의다. '유럽연합 기업 지속가능성 실사지침'이 말하는 인권과 환경에 대한 '부정적 영향'이 23명이 목숨을 잃은 아리셀 참사 같은 문제를 의미함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EU 지침을 위반한 기업에 대해서는 제재가 가해지는데, 벌금으로 전 세계 순매출액의 5% 이상이 부과되며, 기업명이 공개되고, 정부의 공공조달에서 납품이 배제된다.공공조달의 사회적 책임을 방기한 국방부
국방부 납품업체인 아리셀은 정부의 공공조달 정책으로 인권과 환경 문제에 대한 실사가 가능했다. 국가 재정의 최대 지출자인 국방부가 공공조달에서 글로벌 기준으로 자리잡은 '기업의 사회적 책임'(CSR)과 '환경, 사회, 지배구조(ESG)'에 조금이라도 민감했더라면 초보적인 수준에서라도 인권과 환경에 대한 조달 기준을 마련할 수 있었을 것이다. 국방부가 법무부와 고용노동부 등 관계부처와의 협력을 통해 공공조달 공급망에서 인권과 환경에 대한 부정적 영향을 확인, 평가, 조사, 시정하는 실사 체제를 갖췄더라면 아리셀 참사는 예방되었거나, 그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었을 것이다.아리셀의 모회사 에스코넥은 삼성의 협력업체
구속된 박순관은 아리셀 대표이사인 동시에 그 모회사인 에스코넥 대표이기도 하다. 에스코넥의 제품은 Galaxy S24 Ultra, Galaxy S24+, Galaxy 24, Galaxy Z Flip5, Galaxy Z Fold5, Galaxy S23 Ultra, Galaxy S23+, Galaxy Z Flip4, Galaxy Z Fold4, Galaxy Watch 5등의 부품으로 삼성에 공급된다. 에스코넥의 영어 이름은 'S Connect'인데, 회사명의 S가 삼성(Samsung)의 S가 아닐까 싶을 정도로 납품처가 삼성 중심이다. 2000년 1월 설립된 에스코넥의 핵심 경영진은 사내이사로 박순관(전 삼성시계 근무), 김치원(전 삼성시계 근무), 강동균(전 KPMG 공인회계사), 사외이사로 안홍기(전 국세청 근무, 현 김&장법률사무소 소속 세무사), 감사로 서정해(전 한국산업은행 경기본부장)가 있다. 자회사인 아리셀에서 "비용 절감을 위해 안전 시설을 소홀히 하고 불법파견 인력을 사용한" 이들 경영진에게 2024년 상반기 에스코넥이 지급한 보수는 9억5000만 원으로 1인당 평균 1억9000만 원에 달했다. 에스코넥에는 미등기임원도 8명이나 있는데, 이들에게 지급된 연간급여 총액은 6억6000만 원으로 1인당 평균 8200만 원을 넘었다.현실과 따로 노는 삼성전자의 '지속가능경영'
삼성전자는 '2023년 지속가능경영보고서'에서 "인권존중의 원칙과 실행 수준을 향상시키면서, 지역사회와의 나눔과 임직원 성장, 그리고 지속가능경영을 협력회사 전반에 지속 확산하기 위한 노력에도 매진하고 있다"고 썼다. 또한 "우리의 역량과 노하우를 협력회사에 공유하고 지원하는 차원에서, 2023년을 협력회사 ESG경영 원년으로 삼아 협력회사 대상 행동규범, 기후변화 대응, 자원순환, 노동인권 증진, 법 준수 등 지속가능경영 교육 지원 활동도 강화하고 있다"고 밝혔다. 그리고 "이해관계자와의 이해소통"을 설명한 대목에서는 "협력회사 중요 관심사와 주요 활동"으로 "환경안전보건 개선"과 "근로자 인권보호"와 "근로환경 책임관리"를 내세웠다. 삼성의 '지속가능경영보고서'에는 "친환경 소재로 만든 갤럭시S23"을 강조하면서 "재활용 소재를 적용해 친환경 가치를 높였습니다"라는 대목도 나온다. 그 "친환경 소재로 만든 갤럭시S23" 부품을 납부하던 협력업체 에스코넥의 자회사 아리셀에서 노동자 23명이 목숨을 잃었다.에스코넥 매출의 89%가 삼성에서
삼성전자의 '지속가능경영보고서'는 "이사회는 환경경영과 관련된 회사의 전략과 목표를 수립하고, 주요 활동을 감독하며, 특히 사외이사들로 구성된 지속가능경영위원회에서 정기적으로 활동을 검토합니다"고 밝히고 있다. 하지만, 아리셀 참사에서 보듯이 삼성은 기업의 지속가능경영의 핵심인 협력업체 노동자의 안전과 건강을 포함하는 전사 차원의 근로환경체계를 구축하는데 실패했다. 행동으로 실천할 의사는 없으면서 이미지 개선을 위해 말로만 인권과 환경 정책을 만들어 놓고, 빛 좋은 개살구 식의 보고서를 내는 삼성전자의 행태는 '사회적 세탁'(social washing)에 다름 아니다. 지난 8월 14일 금융위원회 한국거래소에 제출된 '에스코넥(종목코드0966340) 반기보고서'에 따르면, 에스코넥은 주식회사로 중소기업으로 분류되며, 4개의 관계사로 구성되어 있다. 모회사인 에스코넥을 중심으로 핸드폰 내외장부품을 제조판매하는 동관삼영전자, 에스코넥 BG VINA, 그리고 1차전지를 제조판매하는 아리셀과 이산화탄소 저감장치를 제조판매하는 에코하이테크가 활동을 하고 있다. 중국 동관과 베트남 박장에는 모두 삼성이 진출해 있다. 에스코넥의 총매출 1462억 원에서 참사가 발생한 아리셀이 차지하는 비중은 1.6%에 불과하다. 반면, 절대 비율인 89.41%가 삼성전자를 위한 핸드폰 부품업에서 창출되었다. 에스코넥의 반기보고서는 "핸드폰 금속부품은 핸드폰 제조업체의 생산계획에 의한 주문생산 방식이며, 30일 내외의 단기발주형식으로 주문을 받아 생산 및 납품을 하고 있다"고 밝히고 있다. "당사는 삼성전자와 거래관계를 구축하고 있으며 (…) 고객사로부터 혁신사례, 품질에 대한 우수성을 인정받아 2016년 품질최우수상, 2018년 고객사모델화 사업장 최우수상을 수상하는 등, 연구개발능력, 생산기술력 등 종합적인 측면에서 고객사의 요구에 부합할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노력하고 (…) 2012년 중국 동관, 2017년 베트남 하노이(박장)에 진출함으로써 고객사의 글로벌 제조전략에 적극 대응하고 있다"면서 삼성전자와의 긴밀한 관계를 부각시킨 대목도 눈길을 끈다.지속가능경영에 실패한 삼성
삼성전자는 <지속가능경영보고서 2023>에서 국제연합(UN)의 인권법인 '세계인권선언'. '시민적 및 정치적 권리에 관한 국제규약', '경제적, 사회적 및 문화적 권리에 관한 국제규약'과 국제노동기구(ILO)의 '일의 기본원칙과 권리에 대한 선언', 그리고 'OECD 다국적기업 가이드라인'을 존중한다고 밝히고 있다. 그리고 2023년 2월에는 'UN 기업과 인권 이행 원칙(UNGPs)'에 따른 인권 존중 의지를 분명히 밝히는 '글로벌 인권원칙'을 발표했다. 삼성이 '지속가능경영보고서'에서 약속한 대로 국제기준들을 "자체 사업장 임직원과 협력회사 근로자" 등 이해관계자에게 홍보 교육하고, 그 실현을 위해 협력업체를 점검하는 등 '제대로 된 주의와 관심'(due diligence)을 기울였다면, 삼성에 납품하는 에스코넥을 모기업으로 둔 아리셀 공장의 참극은 예방할 수 있었을지 모른다. 삼성은 보고서에서 "(인권과 환경)정책, 인권 실사, 피해자 구제, 투명한 공개, 이해관계자 소통, 거버넌스로 구성된 삼성전자 인권 프레임워크를 토대로 인권 존중을 실천한다"고 밝히고 있지만, 삼성의 공급망 거버넌스는 작동하지 않았고 삼성의 협력업체 정책은 집행되지 않았다.아리셀 참사의 몸통인 삼성과 국방부
대한민국에서 가장 많은 돈을 쓰는 국방부와 가장 돈을 많이 버는 삼성이 인권과 환경 문제에서 '사회적 세탁'을 하는 사이, 국가 공공조달과 대기업 공급망에 속한 노동시장 하층에서 대한민국 경제를 위해 헌신해온 23명의 노동자가 죽었다. 아리셀 소유주 박순관과 임원들은 당연히 중형에 처해져야 하지만, 사회구조의 측면에서 이들은 아리셀 참극의 깃털일 뿐 사회적 책무에 실패한 몸통이 따로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공권력의 행사가 몸통을 처리하는 데로 나아가지 않고 깃털만 처벌하는 데서 멈춘다면, 앞으로도 노동자의 떼죽음은 멈추지 않을 것임이 명약관화(明若觀火)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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