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은행이 지난 달 발표한 입시 관련 보고서가 당시 제법 화제가 됐다. 국가 통화정책을 담당하는 기관이 입시 문제를 다루니 이상했던 데다, 그 내용이 -비록 우리 모두 아는 사실이라손 쳐도- 제법 충격적이었다.
보고서의 골자는 대학 서열을 결정하는 요인의 75퍼센트가 부모의 재력이었고, 실제 공부에 관한 학생의 잠재력은 고작 8퍼센트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서울 거주 학생과 비거주 학생의 서울대 진학률에도 큰 차이가 났고, 서울 안에서도 강남과 비강남의 진학률에 커다란 격차가 발생했는데, 핵심 요인은 결국 부모 재력으로 학생에게 투입하는 사교육의 양과 질이었다는 게 한은의 분석이었다.
한국의 입시 체제가 문제라는 이야기는 이미 사십여 년 전에도 언론이 제기해 온 일이지만, 그 긴 시간 동안 입시 경쟁과 그에 따르는 사교육 열풍을 막을 방법은 없었다. 그야말로 지옥과 같은 입시 경쟁을 거쳐야 하니 청소년이 활발히 취미 생활을 하고 잠재력을 닦으며 사색과 사랑에 빠지는 풍경은 한국 학교에는 없다.
오백여 년 전 조선에서도 교육, 곧 입시 교육은 사회적 문제였다. 과거 급제를 위해서는 상상을 초월하는 공부량을 소화해야만 했다. <조선, 시험지옥에 빠지다>(이한 지음, 위즈덤하우스)는 조선의 과거 입시 경쟁이 어느 정도로 치열했는지를 보여주는 책이다.
조선은 현재 한국과 다른 신분제 사회였지만 과거를 통한 문은 열려 있었다. 양반이라도 '제대로 된 양반'이 되려면 과거의 벽을 넘어야만 했다. 입신양명하고 출세하려면 과거 급제가 필수였다. 문제는 과거 준비가 여간 힘든 게 아니었다는 데 있다. 지금의 우리 입시 교육도 명함을 못 내밀 정도로 살인적인 수준의 준비를 해야만 했다.
과거 급제를 위한 주요 필독서로 사서(논어, 맹자, 중용, 대학)와 삼경(시경, 서경, 주역)이 꼽힌다. 입시생(앞으로 과거 준비생을 '입시생'으로 칭함)은 사서삼경을 '통째로 외워야 했다.' 다음으로 송나라 학자 사마광이 쓴 <자치통감>을 외워야 했다. <자치통감>은 총 294권으로 되어 있다. 이것으로도 완벽한 준비는 아니다. 더 공부하려면 한나라의 사마천이 쓴 <사기>도 외워야 했다. 다행히 <사기>의 분량은 130권(!)에 불과했다.
이 책들을 줄줄 외려면 제법 많은 기초 공부가 필요하다. 우선 한자에 통달해야 한다. 외국어이니 한자 문법과 단어도 익혀야 한다. 읽을줄만 알면 안 된다. 이해해야 외워지는 법이니 각 책의 문제의식과 주제에 통달해야 한다. 입시 이전 기초 교육서도 있다. <소학>, <대학>, <통감>(자치통감의 요약본)이다. 이 책의 내용도 머리에 집어넣어야 했다.
이러니 결국 입시 필수서를 종합하면 1천권은 가뿐히 넘는 분량이었다. 이 책들의 내용을 머릿속에 욱여넣어야 하니 다독, 곧 이런 입시서들을 수백번, 수천번 읽는 게 필수였다. 진주대첩의 명장 김시민의 손자 김득신은 <사기>와 같은 책은 수만 번, 나아가 1억 번 이상을 읽었다고는 하나 이는 도저히 믿기 힘든 수치이긴 하다. 세종도 다르지 않았다. 세종은 심지어 독서에 미친 사람이어서 왕위에 오른 후에도 새벽부터 일어나 책을 읽었다. 오죽했으면 상왕으로 물러난 태종이 다 큰 자식에게 이런 잔소리를 할 정도였다.
"과거를 보는 선비는 이와 같이 해야 되겠지마는, 임금이 왜 이렇게 괴롭게 하느냐."
글만 본다고 끝나는 게 아니다. 책의 내용을 조리있게 풀어내는 논술형 문제가 과거 문제였으니 논술 실력도 뛰어나야 했다. 심지어 과거는 글쓴이의 문체와 필체까지 평가했다. 글도 잘 써야 하니 글 잘 쓰기 준비도 해야 했다. 이 때문에 한석봉은 비싼 종이를 계속 살 수 없어 붓에 물을 적셔 글쓰기 연습을 했다.
이런 살인적인 입시를 통과해야 하니 장수생이 속출하는 게 당연했다. 최소 10년은 투자해야 하는 게 과거 입시 공부였다. 30년 만에 급제해도 인재 소리를 들었다. 말 그대로 죽기 직전까지 입시에 매달리는 사람도 많았다. 성종 때 선비 김효흥은 76세에, 고종 때 선비 박문규는 83세에, 철종 때 선비 김재봉은 90세에 과거 급제했다. 김효흥은 급제 이듬해에 숨을 거뒀다. 그야말로 평생 입시 공부만 하다 갔다.
개인의 노력으로만 정면 돌파하기란 불가능해 보인다. 그래서 조선 시대에도 입시 전문 학원이 즐비했다. 속세를 등진 선비가 옛 성현의 말씀을 따라 천하의 진리를 찾는 참된 공부 따위는 없었다. 오직 과거 급제를 위한 입시형 공부의 치열한 경쟁이 조선 사회에 넘쳤다.
원전 공부는 너무 힘드니 요즘으로 치면 참고서가 유행했다. 이를 초집이라고 하는데, 일종의 '시험 전 마지막 요점 정리' 책이었다. 출제 경향에 따라 계속 새로운 초집이 나왔다. 아울러 과거 급제자들의 답안지를 모은 책도 많았으니 전문 입시서 시장도 형성된 셈이다. 나중에는 "유생들이 초짐만 익히고 경서는 안 보니 문제"라는 이야기가 궁궐의 핵심 논의 사항이 되기도 했다.
당연히 당시도 한양이 입시 교육의 메카였다. 요즘도 비수도권 학생들이 방학을 이용해 서울 강남권에 거주하며 초단기 입시 과외를 받는데, 조선이라고 다르지 않았다. 요즘으로 치면 지역거점국립대인 향교에는 제대로 책이 갖춰지지 않은 경우도 많았다. 그러니 한양에 살지 않는 이라면 과거 준비를 위해 한양으로 가야 했다. 지금이야 기차, 버스가 있지만 당시는 한양에 가는 여정만 너무 고달팠다. 대표적인 사례가 영조 때 제주도 선비 장한철이다. 그는 제주도에서 열린 향시(초시)에 장원 급제해 다음 단계인 복시(생원시나 진사시) 준비를 위해 동료들과 한양으로 향했다(초시와 복시에 급제해야만 당시 조선 최고의 국립대인 성균관에 들어갈 수 있었다). 그런데 이 배가 태풍을 만났다가, 다음에는 해적을 만나는 난리를 겪은 끝에 류쿠(지금의 오키나와) 왕국까지 가버렸다. 이런 생고생 끝에 겨우 한양으로 온 이가 배에 오른 선비 29명 중 8명에 불과했다. 장한철은 다행히 한양에 돌아왔는데, 그만 과거에 낙방하고 말았다. 장한철은 자신의 경험담을 <표해록>이라는 책으로 남겼다.
이런 불공정 경쟁이 펼쳐지니 조선 후기로 갈수록 한양에 대대로 산 한양 출신들의 힘이 강해졌다. 대표적 세도정치가로 알려진 안동김씨, 반남박씨, 풍양조씨 등이 모두 한양에 오래 뿌리 내리고 산 집안이다. 저자에 따르면 한양과 비한양 간 입시 경쟁력에서 얼마나 큰 차이가 났는지 알 수 있다. 전체 문과 급제자의 61.5퍼센트가 한양과 경기도 출신이었다. 나머지 30퍼센트가량이 남쪽 지방, 즉 충청도와 경상도, 전라도 출신이었다. 북쪽 지방 출신은 완전히 찬밥 신세였다. 이 가운데 가장 큰 차별을 받은 지역이 평안도로 꼽힌다. 훗날 홍경래의 난이 일어난 곳이다.
과거 입시 준비를 학생 혼자서 할 수는 없다. 조선에도 사교육 기관이 넘쳤다. 대표적인 사례가 서당이다. 대부분 서당은 지방 양반들이 운영하는 사교육 기관이었다. 놀랍게도, 유학의 나라인 조선에서 절도 사교육 기관이었다. 수많은 선비가 절에서 숙식하면서 공부했다. 우리 옛날 고시생처럼 절에 들어가 독학하는 풍경이 아니었다. 선생이 있었다. 선생은 승려였다. 승려가 선비를 가르치는 유학의 나라가 조선이었던 셈이다.
명문가에서는 아예 입주 과외가 성행했다. 이런 입주 과외 선생을 '숙사'라고 했다. 권세 있는 양반 가문은 숙사를 초빙해 자녀에게 사교육을 시켰다. 대표적 사례가 정약용이다. 그는 전라도 강진에 유배간 당시 외가인 해남윤씨 가문 별장에 입주해 외가 친척들을 가르쳤다. 일제강점기 민족운동 단체 흥사단 단장을 지낸 김윤식도 입주 과외를 받았다.
입시 정보전도 활발했다. 돈 많은 가문 부모들은 새로운 입시 정보, 곧 언제 과거가 열린다더라, 이번에는 어디서 문제를 출시한다더라와 같은 고급 정보를 사러 돌아다녔으니, 입시 정보를 거래하는 사교육 시장도 판쳤다. 조선의 대표적 유학자로 알려진 이황이라고 다르지 않았다. 그가 관직에 있을 당시 아들에게 정기적으로 쓴 편지 내용은 최근 사회 이슈, 최신 출제 경향 등이었다. 이황부터 불공정 경쟁에 한 발 담갔던 셈이다.
당연히 잘 나가는 입시 전문 학원도 생겼다. 대표적인 사례가 고려 말 강경룡의 학원이다. 1305년 강경룡의 학원에서 공부한 학생 중 10여 명이 단체로 국자감시(조선의 소과)에 급제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 소식이 곧 온 백성에게 퍼지더니, 급기야 충렬왕의 귀에까지 들어갔다. 그런데 정작 강경룡은 벼슬을 지내지 않은 일개 선비였다. 강경룡의 명성이 얼마나 대단했던지, 백여 년이 지난 조선 세종 때까지도 그의 이름이 거론됐다.
조선 후기에도 유명한 입시 전문 선생이 있었다. 정학수라는 사람이다. 그가 서당을 열었는데 그에게 과외받기 위해 모여든 선비가 백여 명에 달했다. 그야말로 당시 손꼽히는 대형 학원이었다. 그런데 정학수의 신분이 좀 남다르다. 성균관의 반인, 곧 성균관에서 청소나 요리 등 허드렛일을 하는 천민이었다. 천민이 가르치는 학원에 선비들이 모여들었으니, 정학수가 얼마나 뛰어난 일타강사였는지 짐작할 수 있다.
이런 과도한 입시 경쟁의 끝은 좋지 않았다. 시간이 흐를수록 입시 비리가 점점 더 성행하니 나중에는 상상을 초월하는 대규모 입시 비리가 조직적으로 이뤄졌다. 입시생, 글을 짓는 거벽, 예쁜 글씨체로 답안지를 쓰는 사수, 잡일을 담당하는 노유와 선접, 이들을 가려줄 우산을 챙기는 수종, 참고서를 품에 넣어 숨긴 후 열어 보는 협서가 하나의 입시 팀을 이뤄 부정행위를 일삼았다. 이런 비리가 너무나 만연해 조선 후기 과거 때는 감독관이 이를 보고도 모른 체 했다. 마지막 과거에 응시했던 김구는 이런 풍경을 보고 탄식하기도 했다.
이런 입시 비리는 지도층 인사들에게서 더 심했다. 영조 때는 아예 가문(당파)을 따져 특정 가문 사람을 급제시켜야 한다는 요청이 어전에 올라올 지경이었다. 사회 지도층이 입시 불공정에 앞장서는 모습, 딱 지금 한국의 입시 경쟁과 다르지 않은 풍경이다. 상황이 이 정도니 과거가 나라를 망하게 한다는 탄식이 나왔다. 그리고 결국 조선은 무너졌다.
<조선, 시험지옥에 빠지다>에 나온 이야기가 너무 많아 다 옮기지 못할 지경이다. 당시 어머니들의 치맛바람, 그보다 더한 아버지들의 닦달을 보고 있노라면 헛웃음이 나오다 구슬픈 심정이 들기도 한다. 과거제를 처음 도입한 수, 당 때 사람들이 조선의 풍경을 봤다면 자긍심보다 충격을 받았을 것이다(공교롭게 과거제가 조선과 마찬가지로 뿌리내린 중국도 오늘날 치열한 입시 경쟁을 치른다). 이 책에 나온 옛 이야기를 조금만 바꾸면 모두 지금 한국의 풍경이다. 안타까운 심정으로 재미있는 이야기들을 읽은 기분이다. 부디, 우리는 이 입시 지옥에서 벗어날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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