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정신은 우리가 진실을 보는 것을 막기 위해 발달된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우리로 하여금 그 메커니즘을 직시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말이다. 정신은 우리 주변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우리가 절대 이해하지 못하게 만들어 주는 방어체계다. 우리 뇌의 용량이 어마어마하다지만, 정신의 주된 임무는 정보를 걸러내는 것이다. 지식의 무게를 모조리 짊어지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세상의 모든 입자는 고통으로 이루어져 있으므로.”
-<죽은 이들의 뼈 위로 쟁기를 끌어라>(올가 토카르추크, 최성은 옮김, 민음사)
계몽주의와 계몽주의를 계승한 근대성이 주지하듯 지구 규모로 작동하는 현대 사회의 기반이다. 이성과 합리성이 그 주춧돌이다. 지금의 세계를 만든 출발점인 계몽주의(啓蒙主義)는 빛이란 상징을 사용한다. 우리 말엔 직접적으로 드러나 있지 않다. 불어 뤼미에르(Lumières)는 단어로는 빛 자체이다. 영어도 빛(light)과 관련하지만, 빛 자체보다는 빛을 ‘끌어 들여오는(en)’ 행위에 초점을 맞췄다. 독일어(Aufklärung)는 단어 조성상 불어보다 영어에 가깝다. 마찬가지로 행위(auf)를 강조한다. 다만 빛을 직접 지시하지 않고 빛을 비춘 결과를 용어에 담았다. (빛을) 비추고 해명하여 투명하게 보여준다는 의미이다. 한국어는 빛이 아니라 어둠을 강조한다. 계몽은 어둠[蒙]을 밝히는[啓] 행위여서 살펴본 세 언어 중에선 독일어에 그나마 가깝다. 결과에 집중한다는 측면에서 계몽주의의 절대화에서 벗어날 가능성을 내포한다. 어둠을 밝혀서 투명하게 해명하는 것이 목적이기에, 빛 자체를 맹목적으로 떠받들지는 않을 것이라고 다소 낙관적인 전망을 결부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물론 꿈보다 해몽이다. 빛에만 집중하면 빛에 눈이 머는 것과 같은 효과가 일어난다. 빛 말고 다른 것을 보지 못한다. 어둠을 밝히긴커녕 어둠이 더 깊어진다고 말할 수 있다. 전일하고 총체적인 빛이 아니라면 빛의 등장은 어둠의 존재를 부각하고 더 두드러지게 만든다. 비유로서 전일하고 총체적인 빛이란 게 현실에서 불가능할 테지만, 만일 그런 빛이 존재한다고 하여도 전방위를 샅샅이 훑는 빛이 아니라면 그림자의 생성까지는 방지하지 못한다. 역설적으로 빛의 등장이 어둠을 깨웠다. 빛이 없을 때 어둠은 제 어둠을 알지 못했다. 인용문에서 소설의 화자가 하려는 말이 이러한 이야기일까. <죽은 이들의 뼈 위로 쟁기를 끌어라>는 폴란드를 대표하는 작가인 올가 토카르추크의 소설 중에서 대중적인 작품에 속한다. <방랑자들> <태고의 시간> 등과 비교해 주제의식이 뚜렷하고 서사가 간명하고 확고해 독자는 비교적 쉽게 소설을 이해할 수 있다. 토카르추크는 사회적 문제에 활발하고 적극적으로 의견을 표명하는 작가이다. 생태주의자로서 환경보호와 동물권 수호에 강경한 주장을 편다. 그에게 문학은 행동이다. “좋은 소설이란 그 외피가 스릴러든 로맨스든 상관없이 세상을 향해 지혜로운 질문을 던질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이 소설을 작가는 스스로 ‘도덕적 스릴러(moral thriller)’라고 규정했다. 스릴러의 기법으로 도덕적 문제를 제기한다는 뜻이겠다. ‘스릴러’란 표현은 통상 영화를 설명할 때 쓴다. 이 소설이 영화로도 만들어진 것을 볼 때 영화에서 말하는 스릴러를 염두에 두었음을 짐작할 수 있지만, 전통적인 소설 분류로는 추리소설이다. 순문학에서 살짝 비켜서 있다. 작가가 주장하는 도덕은 편파적인 도덕이다. 소설을 통해 동물권을 침해하는 수괴들에게 도덕적 징벌이 내려지는데 인간의 관점으론 과도하거나 편파적으로 느껴질 수 있다. 왜냐하면, 모피를 얻을 목적으로 여우를 대규모로 사육하고, 고기나 재미를 위해 사냥하는 경찰서장 신부 등 지역의 토호들을 주인공이 무참히 살해하기 때문이다. 소설의 종반부 반전을 통해 범인이 밝혀지는 대목에서 대다수 독자는 보편적 법감정과 괴리된다는 반응을 보일 법하다. 그들이 사악한 인물로 그려지긴 했지만, 비명횡사할 만한 잘못을 저질렀냐는 질문에 선뜻 동의하기 힘들어할 사람이 많을 것이다. 토카르추크는 여기서 더 보편적인 법감정을 내세운다. 참신하다는 반응과 기괴하다는 반응이 교차할 것이다. 즉 생명종 전체를 동일한 가치로 대하면, 살해당한 사람들은 학살자이다. 더구나 주인공이 딸이라고 부르는 자신의 개들을 죽인 자들이기에 정당한 복수이기도 하다. 계몽주의에 대한 반박이다. 계몽주의와 연이은 근대사회는 공장식 축산으로 인간 식생활에 전례 없는 풍요를 가져왔지만, 동물의 입장에선 아우슈비츠의 일상화가 열린 셈이다. 특정한 생명종에 의한 다른 생명종의 체계적이고 구조적인, 무엇보다 대대적인 착취가 만성적으로 자행된다. 사실 이런 야만은 지구 역사에서 한 번도 없었다. 동물이 복수할 것이라고 소설의 주인공은 말한다. 주인공은 단지 자신의 두 딸의 복수를 소설에서 했을 뿐이다. 소설에서 주인공이 <파우스트>의 ‘차가운 악마의 손(die kalte Teufelshand)’을 거론한다. 그의 도덕은 인간의 입장에선 악마의 도덕이다. 놀랍게도 소설은 연쇄살인범이 아무런 죄책감을 느끼지 않은 채 해피엔딩을 맞는 것으로 마무리한다. “문학은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믿는 작가의 강력한 문제의식이 대중성과 파격을 겨냥해 이 소설에서 독특한 내러티브로 구현됐다고 평가할 수 있겠다. 소설엔 윌리엄 블레이크의 시가 자주 등장하고 빈번하게 인용된다. 제목 또한 블레이크의 시 ‘지옥의 격언(Proverbs of Hell)’에서 가져왔다. “죽은 이들의 뼈 위로 쟁기를 끌어라(Drive your cart and your plow over the bones of the dead)”는 시구에서 ‘죽은 이들’이 누구인지 쟁기를 끄는 게 어떤 의미인지 생각할 거리를 준다. 2018년 노벨문학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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