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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장은 배를 버렸지만 작은 배는 꿋꿋하게 항해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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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장은 배를 버렸지만 작은 배는 꿋꿋하게 항해 중이다 [기고] 내가 진보신당을 지지하는 이유
나는 보았다. 천마산을 오를 때마다 물줄기가 바위를 깎아내는 장면들을 보았다. 물소리의 안내를 따라 더 깊은 계곡에 들어서면 숲 사이를 비집고 빛이 들어오는 곳에 양편이 포석정 형태로 깎인 큰 바위가 누워 있다. 끈질긴 조각가인 계곡물은 지금 갑자기 굳어버린 용처럼 얼음이 되어 있다.

나는 다짐했다. 2008년의 선택은 신생정당이 바람을 일으키고 정치적 발언권을 금세 획득하리라고 기대해서가 아니었다. 마음에 들고 믿음이 넘쳐 더 이상 고민할 필요가 없어서가 아니었다. 거칠기 짝이 없는 바다에 띄워진 작은 배에겐 험난한 항해가 예정되어 있었다. 그러나 들리지도 않을 조언을 조롱처럼 던지는 구경꾼이 아니라 같은 배에 올라 갑판 아래에서 말없이 노를 젓는 격군 하나 보태기 위함이었고, 설령 난파하더라도 함께 잠길 때 서로 위로하고 위로받겠다는 '참여와 책임'의 다짐이었다.

나는 기다렸다. 그런대로 살만해 정치참여도가 낮은 나라들과 달리 어느 편에서든 희망을 찾을 수 없는 포기상태에 가까운 이 사회는 불행하다. 자신의 윤리를 잃고 자본의 위세와 시장의 논리에 눌리고 물든 사회는 불행하다. 모두 함께 그러하다는 것은 위안인 동시에 치명적 위험이다. 모두가 길을 잃었다면 길을 잃었다는 것조차 모를 테니. 그 속에서 어느 선거의 마지막 날 유세에 나선 우리 후보를 보며 울컥했고, 후보의 이름만 남은 기표용지를 보고 울컥했으며, 부당하게 핍박받는 낙선자들을 보며 울컥했다. 그들이 지켜주지 못한 더 많은 사람들을 보며 울컥해야만 했다.

나는 안다. 정당 참여를 장신구 정도로 여기는 것처럼 보이는 이들은 '지금까지와는 다른' '제3의' '더 멋진' 선택을 기다리며 고르다가, 그 정당(혹은 정당화 움직임)이 가장 근사할 것 같은 순간에 참여했다고 알린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지금까지 해결 못한' '원점의' '더 어려운' 선택이라는 것을 뻔히 알면서 참여한다. 나를 대신하여 죽은 이들을 기억하며 걸어 들어가는 것이다. 실리 없는 투쟁조차 예방효과를 가진다고 믿고, 다수가 거대한 환상이라 일축해버리는 신념이 현실이 되길 바라기 때문이다. 희망이 현실을 이길 수 있을까 싶으면서도 현실이 바람(희망)이 되어 부는 날을 기다리기 때문이다.

우리는 배운다. 한류의 허울에 기고만장한 한국 방송과 일부 연예인의 무의식 속에 깊게 박힌 차별적 언행이 해외에서 역풍을 맞고 있다. 그런 의도는 없었다고 할 정도로 이 사회엔 개념이 없었다. 보수정당들이 쇄신이랍시고 내놓는 방식들은 정당정치의 기본을 지키지 못해 벌어진 일을 정당정치의 기본을 회피하는 방식으로 얼버무리는 것에 가깝다. 진보신당의 동지들은 만나고 대화하는 과정에서 자기 안의 차별의식과 습성을 끊임없이 검증하고 재인식한다. 진보신당은 정당 민주주의를 시도하고 있었다. 이렇게 '자율학교' 역할도 하고 있다. 나는 이 학교가 오래가길 바라고, 학생들이 더 많아지길 희망한다.

그래서 나는 믿는다. 몇 장의 잎이 떨어지고 가지가 흔들리기도 하였으나 뿌리와 줄기는 제 자리를 지켜냈다. 배를 버린 선장과 승무원들까지 있었지만 작은 배는 꿋꿋하게 항해 중이다. 머잖아 진보좌파정당의 역사가 어떠한 길로 향할지 판가름 날 것이다. 어쩌면 다시 눈물을 흘리게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날의 눈물은 다른 의미의 눈물이어야 한다. 이런 말을 한다. 나무뿌리는 바위를 뚫고 시냇물은 산을 가른다고. 그러나 그만한 시간이, 또한 기다림과 믿음을 아는 잔뿌리와 물방울이 있어야 가능하다. 가능성이 현실이 되리란 기다림으로 치열하게 현재의 꿈을 꾸는 것이 미래를 사는 삶이라면, 그렇게 큰 그림이 세워지면, 세세한 과정은 징검다리와 같은 것이라면, 삐뚤삐뚤 엇나가더라도 기어이 늪을 건널 것이다. 낮은 바람, 뜨거운 바람, 부드러운 바람이 얼음을 녹이고 바람을 현실로 만들리라 믿는다.

눈이 덜 녹은 모란공원의 비석들 사이에서 살짝 따스한 겨울햇살을 맡으며 색종이처럼 파랗고 차가운 하늘 아래에 섰던 날, 부끄럽지 않았다. 나는 진보신당 당원이다.

나도원

ⓒ나도원
음악평론가. 한국대중음악상 선정위원 및 장르분과장. 주요저서 『결국, 음악』 등. <100비트> 편집위원, <가슴> 편집인, <보다> 기획위원, <컬처뉴스> 대중음악전문기자, 문화체육관광부 국고지원예술행사 평가위원,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민중가요기본컨텐츠수집사업 채록연구원, 광명음악밸리축제(2005-2006) 프로그래머·매체기획팀장·진행감독 등으로 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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