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일파로 평가받는 장덕수 <동아일보> 초대 주필을 설명하기 위해 별도의 상자 지문까지 실은 것에 대해 이미 한차례 '친일파 미화 논란'이 일어난 바 있다. 그 미화 내용마저도 사실과 다르다는 게 드러난 것이다.
친일 인사 장덕수 기술 부분, '팩트' 틀려
교학사 교과서 262쪽에 실린 '사료탐구 - 조선 청년 연합회의 결성'에는 장덕수가 쓴 글이 나온다.
천만고에 미증유하던 세계적 대풍운이 종식되자, 평화의 서광이 만천하에 두루 비치고, 자유의 새벽종이 전 세계에 크게 울려, 바야흐로 세계는 영원한 평화의 일대 낙원으로 개조하려고 진력하며, 인류가 신성한 자유의 행복민이 되려고 고심함은 현하 전 세계의 대세이며 전 인류의 소망이라(…)이와 같이 모든 불합리는 합리로 돌아오려한다. 이로 보건대 금일은 낡은 것을 버리고 새것을 세우려는 일대 과도기이며 대개조의 기운이다. - 장덕수, <동아일보>, 1920년 7월 12일
도움글 : 위 글은 장덕수가 3·1운동으로 구속되었던 민족 지도자들이 풀려나고 새로운 민족 운동이 다양하게 시도되는 시기에 조선 청년 연합회의 결성을 주창하며 쓴 글이다.
생각해 보기 : 이 글은 당시 시대 상황을 매우 낙관적이고 희망적으로 파악하고 있는데, 그 이유는 무엇일까?
▲ 인터넷 위키백과에 올라와 있는 장덕수 사진 ⓒ |
민족문제연구소는 "도움글 설명대로 조선청년연합회의 결성을 주장한 글은 따로 있다"며 "5월 26일 자 <동아일보> 사설인데, 사설은 무기명 기사이지만 주필이 주로 쓰기 때문에 장덕수의 글로 인정되고 있다"고 덧붙였다. 이는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서 확인할 수 있다. 민족문제연구소 측은 실제로 "장덕수가 조선청년회연합회 결성과 관련한 활동을 활발히 한 게 사실"이라고 설명했다.
문제는 장덕수가 썼다고 교과서에 명시된 글이 장덕수가 쓴 글이 아니라는 점이다. 민족문제연구소 측은 "이 글을 쓴 조우는 북청지역에서 청년운동, 노동운동, 신간회 활동을 하던 사람으로 1930년대 농민조합운동을 전개하던 중 체포돼 북청 경찰서 경찰들에게 고문을 당해 사망했다"고 설명했다. 결국 "다른 사람이 쓴 것인데 사료 확인도 없이 장덕수가 쓴 글로 제시하고 있다"는 것이다.
민족문제연구소는 "교학사 교과서는 특정 집단, 특정 인물을 과도하게, 또 지나치게 공적 중심의 미화만 하고 있다. 대표적으로 김성수, 이승만, 유치진의 서술이 그렇고 장덕수도 맥락상 사료탐구로 제시되는 것은 과도하다"고 주장했다. 민족문제연구소는 "이렇게 자신들이 미화하고 싶은 인물들을 과도하게 서술한 것도 문제이지만 과도한 서술 가운데는 기초적인 사실 확인도 하지 않아 오류투성이 서술이 많다"고 주장했다.
교학사-<동아일보>, 수상한 커넥션?
특정 언론사를 긍정적인 방향으로 부각하려 했다는 의혹도 제기됐다. 이들은 "장덕수 사진 설명에 '<동아일보> 초대 주필'이었다는 경력만 소개하고 있어 <동아일보>와의 연관성을 부각시켰다"고 주장했다.
실제 교학사는 경영 상태가 어려운데도 불구하고 동아일보 자회사 종합편성채널인 <채널A>에 투자를 하는 등 <동아일보>와 긴밀한 관계를 보여왔다. 지난 2일 민주당 김태년 의원은 교학사의 '2011 회계연도 외부 감사보고서'를 분석한 결과, 교학사가 2011년에 <채널A>의 주식 16만 주(8억 원)를 사들였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당시 교학사의 경영 상태는 수익성이 보장되지 않은 종편에 출자할 만큼 여유롭지 않았다는 게 김 의원 측의 설명이다. 교학사의 2010년, 2011년 부채비율은 각각 260%, 301%로 자본 잠식 상태였다. 교학사가 미화한 <동아일보> 관련 친일 인사는 장덕수 뿐이 아니다. 교학사는 동아일보 창간 사주인 김성수를 독립운동 인사로 미화해 비판을 받기도 했다. 김성수는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위원회'가 친일반민족행위자로 지목한 대표적 친일 인사다. 장덕수는 와세다대학에서 김성수와 함께 수학한 인사다.
장덕수와 관련해 역사학자 김기협 씨는 <프레시안>에 연재한 '해방일기'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관련기사 : 장덕수의 암살, 배후는 역시 김구?)
"1936년 귀국 후 장덕수는 동아일보사와 보성전문학교에서 해방 때까지 일하는데, 김성수 친일활동의 대리인 노릇이었다고 할 수 있다. '민족언론'과 '민족교육'을 표방하는 김성수로서 친일활동에 직접 나서기 껄끄러운 측면을 대신 맡아준 것이다. 해방 후 한민당 인사 중에서도 친일 행적이 가장 뚜렷한 사람이 장덕수였는데, 그의 친일행위가 극명했던 큰 까닭이 김성수를 감싸주는 대리인 역할에 있었다고 보인다. 미군정 하에서 장덕수는 김성수의 친미활동을 위한 대리인 역할을 다시 맡았다. 한민당 창당 때 그는 외무부장을 맡았는데, <설산 장덕수>에 그 역할이 그려져 있다."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