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과학>. 1992년 창간한 이 독특한 이름의 매체를 기억하는지. 그 직전인 1991년 말, 소련이 해체됐다. 같은 해 4월 말에는 강경대 폭행치사 사건이 있었다. 범민주 진영과 노태우 정권이 맞붙었지만, '강기훈 유서 대필 조작', 그리고 정원식 당시 국무총리 밀가루 세례 사건 등을 거치면서, 정국의 균형추는 오른쪽으로 확 쏠렸다. 민주진보 진영 전체가 우울한 분위기에 젖어 있을 때, 한 편에선 문화 담론이 번져갔다. 옛 소련 철학 교과서 등 전통적인 마르크스주의 저술에선, 문화는 상부구조로 분류된다. 물질/경제적 토대가 결정한다는 뜻이다. <문화/과학>은, 독특한 시도로 읽혔다. 유물론과 과학적 사회주의를 버리지 않으면서, 문화 활동의 독자적인 가치를 인정하는 길. 당연히 몹시 좁은 길이다. 그래도 1990년대 내내 꽤 많은 이들이 발을 들였고, 낯선 프랑스 철학자들의 이름 속에서 길을 잃었다.
<문화/과학>의 간판 역할을 한 사람이 강내희 전 중앙대학교 영어영문학과 교수다. 그는 정원식 총리 서리가 밀가루를 뒤집어 쓴 사진 한 장으로 1991년 정세가 바뀐 것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한 인터뷰에서 그는 "문화적 수단(밀가루 뒤집어 쓴 사진)에 의해 정세가 뒤바뀐다는 것을 깨닫고 비판적이고 분석적인 문화 부문의 대응이 있어야겠다"고 생각했다고 밝혔다. 그리고 <문화/과학>이 세상에 나왔다.
신자유주의 시대의 대안적인 학문전략
다시 27년이 지났다. 많은 이들에게 <문화/과학>은 여전히 낯선데, 문화산업은 아주 익숙하다. 문화는 자본의 논리가 더욱 적나라하게 반영되는 영역이 됐다. 하지만 문화/과학 편집위원회는 꾸준히 책을 내왔다. 최근에는 <문화/과학> 2019년 봄호(97호)가 출간됐다. 강 전 교수 역시 제 자리를 지켰다. 대학, 인문학, 문화 영역을 옥죄는 자본의 논리를 줄기차게 비판했다. 이는 다양한 학문과 문화를 아우르는 새로운 전략에 대한 고민으로 이어졌다. 1998년에 <지식생산 학문전략 대학개혁>을 통해 밑작업을 했다. 2003년에는 <교육개혁의 학문전략>을 냈다. 대학이 기업을 위한 훈련소 역할을 한다는, 흔한 비판에 그치지 않았다. 인간과 사회, 자연을 총체적으로 바라보는 시야를 여는, 대학과 학문, 문화의 고유 역할에 충실하려는 시도였다. 요컨대 교육과정 자체를 대안적으로 구성하려 했다. 그러자면, 기존 대학의 분과 학문 체계를 깨야 했다. 문과와 이과를 기계적으로 나눠서 반(反)지성주의를 체계적으로 조장하는 분과 학문 체계는 결국 자본과 권력의 이익에 복무한다. 신자유주의를 격렬히 비판했던 그가 '문화공학' 등 독특한 개념을 아주 일찍부터 제안했던 배경이다. 그러나 또 상황이 바뀌었다. 어느 순간, 학문간 통섭 등의 표현이 자본의 구호가 됐다. 대학은 더 황량해졌고, 학자들은 전공의 좁은 울타리 안에 더 깊이 몸을 파묻었다.
"대학교육은 살아 있는데 취업만 안 된다?…교육까지 죽었다!"
그리고 그는 정년을 맞아 대학을 떠났다. 오랫동안 품었던 새로운 대학에 대한 꿈을 대학 밖에서 실현하기로 했다. 그는 2015년 출범한 '지식순환협동조합(지순협) 대안대학' 학장을 맡고 있다. 2년제 비인가 대안대학이다. 졸업논문까지 써도 정규 학위가 나오지는 않는다. 그러므로 배우고 가르치는 열정은 더 진지하다. 서울시 은평구에 있는 지순협 대안대학에서 지난달 말에 그를 만났다. 강내희 학장의 첫 마디는 "대학의 죽음"이었다.
"미국, 유럽 등 선진국도 대학의 존재 조건은 아주 위태롭다. 대학에서 좋은 교육을 받고 나온 학생들이 일자리를 찾지 못한다. 대학의 위기다. 하지만 대학 교육까지 죽은 건 아니다. 취업과 무관한 분야 역시 교육은 제대로 이뤄진다. 한국은 다르다. 대학 졸업자가 단지 취업이 안 되는 문제만 있는 게 아니다. 학생에겐 졸업장만 의미가 있다. 비싼 등록금 때문에 아르바이트를 하느라 지친 몸으로 그저 버틸 뿐이다. 교육 내용에서 의미를 찾지 못한다. 교수들은 논문 실적을 채우는 데만 관심이 있다. 한국에선 대학과 대학 교육이 다 죽었다."
인문학 등 기초학문 전공자가 취업이 안 된다. 이는 세계 어디서나 마찬가지다. 그런데 대학에서 인문학을 치열하게 익혔는데 다만 취업이 안 되는 것, 그리고 이들 분야 학위만 있을 뿐 스스로도 의미를 못 찾고 제대로 배우지도 않은 것. 이 두 가지는 완전히 다르다는 설명이다.
"다른 교수의 강의 계획, 비판할 수 있어야 '학문 공동체'"
"정말 다양한 학생들이 들어왔다. 17세 소년부터 68세 노인까지 다양하다. 이들이 다 무사히 마친 것은 아니다. 중간에서 접은 이들도 많다. 그러나 과정을 마치고, 논문까지 쓴 이들은 종종 놀라운 성취를 한다. 방금 이야기한 17세 소년이 대표적이다. 어쩌면 '젊음의 힘'일 수 있다. 2년 동안 배운 내용으로 논문을 썼는데, 아주 다양한 지식을 잘 엮어냈다. 정규 학위를 주는 4년제 대학에 다니는 학생들이 그런 글을 쓸 수 있을까. 아니라고 본다. 이는 달리 말하면, 새로운 가능성이다. 대학이 교육과정을 잘 구성하면 얼마나 큰 효과를 낼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지순협 대안대학은 통섭 교육을 강조한다. 문과와 이과, 이론과 실무, 정신과 물질의 상투적인 구분을 넘어서려 한다. 지적호기심이 왕성한 시기, 한국 학교는 학생들에게 한 쪽 눈을 가리게 한다. 인문학을 택하면, 자연과학에 무지한 게 당연하다고 여긴다. 예컨대 역사를 공부하는 이는 인문대학 테두리 안에만 갇힌다. 세상과 자연에 대한 총체적 인식을 막는 구조다.
"(지순협 대안대학에서는) 인문학과 자연과학, 사회과학, 문화예술 등을 엮어서 가르친다. 역사와 진화론, 정치경제학을 함께 공부한다. 분과학문 테두리 안에 갇혀 있을 때는 볼 수 없었던 것을 보게 된다. 요즘 부상하는 '빅 히스토리' 같은 경우가 대표적이다."
통섭은 꼭 대안교육 영역에서만 강조하지 않는다. 경직된 분과학문 체계를 부수자거나, 문과-이과 구분을 깨자는 이야기는 제도권에서도 자주 나온다. 하지만 기존 대학의 시도는 한계가 분명했다. 다양한 지식이 시장의 요구에 맞춰 수렴하는 방식, 혹은 여러 전공을 물리적으로만 합치는 방식이다. 통섭교육을 강조하는 목소리 가운데 일부는 주로 기업에서 나온 탓도 있다. 예컨대 공학과 경영학을 함께 가르쳐야 한다는 식이다.
하지만 이와 다른 차원의 문제도 있다. 영문학 교수가 자기 시야를 넓히기 위해 물리학과 신입생 수업을 듣는 풍경은, 한국에서 거의 볼 수 없다. 다른 분야에 대한 편견을 교정할 기회가 없다. 이런 구조에서 '통섭', '융합' 등을 이야기하면, 결국 편견의 재생산에 그치기 십상이다. 반면, 자기 분야에선 봉건 영주나 다름없어서, 비판을 견디지 못한다. 대안대학은 이런 문화를 바꾸려 한다.
"일반 대학에선 강의 계획서를 교수끼리 공유하면서 토론하는 문화가 거의 없다. 같은 학과 안에서도 그렇다. '학문 공동체'가 될 수 없는 구조다. 우리는 다르다. 가르치는 이들이 서로의 강의 계획서에 대해 의견을 낸다. 전공이 다른 교수가 내 강의 계획서에 대해 수정 제안을 할 수 있어야 한다. 또 우리 학교에선 교수가 학생과 함께 수업을 듣는 일도 종종 있다. 제대로 된 '통섭', '학문 공동체'는 그래야 가능하다."
"시간강사 숙청, 대학은 왜 존재하나"
대안적인 학문 공동체는 강내희 학장이 기존 대학에 있을 때도 늘 꿈꿨던 것이다. <문화/과학> 지면 등을 통해서도 자주 드러난 생각이다. 하지만 대학 교육은 그의 바람과는 반대 방향으로 질주한다. 특히 현 정부 들어 시행된 강사법은 대학의 썩은 속살을 그대로 드러냈다. 대학들은 비정규직 교수의 처우를 개선하기보다, 그들을 내쫓는 것으로 대응했다. 이른바 시간강사, 비정규직이 교육을 주로 담당하는 구조에서 이는 교육의 질 저하로 이어진다.
"대학만큼 기득권 구조를 깨기 힘든 곳도 드물다. 개혁을 하려고 하면, 대학 재단 및 교육부가 가로막는다. 하지만 그 문제만 있는 게 아니다. 대학 안에도 구조적 문제가 있다. 각자 챙기는 밥그릇이 있고, 그걸 건드릴 수 없다. 그렇게 형성된 관행이 강력하다. 그 속에서 서로 간섭할 수 없다.
그러니까 어떻게 되나. 30대 나이 젊은 교수가 없어졌다. 기초학문 분야에선 그 나이에 교수가 못 된다. 새로운 자리가 나지 않기 때문이다. 40대 교수들은 어떤가. 논문 실적 채우기에 급급하다. 다른 분야를 돌아보거나 총체적인 고민을 할 여유가 전혀 없다. 이는 교수의 학벌이나 역량과는 관계없는 문제다. 그렇게 형식적으로 실적을 채우고 나서, 50대가 된 교수들은 어떤가. 그들은 이제 소진된 상태다.
연구가 아닌 교육은 어떤가. 제대로 가르치려면, 한 학기에 6학점 이상 강의할 수 없다. 교육을 잘 모르는 이들은 일주일에 고작 6시간 일하고 월급 받느냐고 한다. 그렇지 않다. 6학점이 한계다. 하지만 소수를 제외한 대부분 대학에서 6학점 강의하도록 요구한다. 제대로 된 교육을 하지 않는다고 전제해야 가능한 요구다.
게다가 강사법이 시행되면서, 곳곳에서 '시간강사 숙청'이 벌어졌다. 상당수 시간강사들은 자기 소득은 미미하고, 집안의 후원 혹은 배우자 소득으로 버틴다. 학문에 대한 끈을 놓을 수 없어서 그렇게 지내는 이들이 많다. 그렇게라도 강단에 설 기회가 사라진다면, 어떻게 될까. 직업적으로 학문을 하는 일에 대한 근본적인 회의가 들 수밖에 없다. 대학이 왜 존재하는지에 대한 의문이 생긴다."
"비슷한 열정을 공유하는 이들이 만나면…"
지순협 대안대학은 기존 대학에 대한 반성에서 시작했다. 하지만 한계와 답답함도 있다. 대안교육은 가르치는 내용뿐 아니라 방식까지 대안적이어야 한다.
까다로운 개념을 소화하는 일은 누구나 피곤하다. 기존 학교 교육 역시 이 문제를 풀지 못했다. 예컨대 중요한 수학 개념을 공 들여 이해하려 하지 않고, 딱 시험 문제를 풀 수 있는 수준에서 넘어가는 학생을 양산했다. 인식과 비판은 맞물려 있으므로, 적당히 외우거나 아는 척하고 넘어가는 구조에선 비판적 능력이 자라지 않는다. 비판과 민주주의 역시 맞물려 있으므로, 이는 보다 큰 차원의 위기다. 자기 머리로 생각해서 판단하고 실천하기보다, 다수에 휩쓸리고 소수를 조롱하는 이들이 자란다. 까다로운 개념과 싸우는 피곤한 훈련을, 자율적으로 하게 할 방법이 있을까. 기존 교육처럼 강요나 서열 경쟁 등을 동원하지 않는다면, 어떤 길이 있을까. 그게 어렵다. 강내희 학장도 인정했다.
"공부하는 버릇이 들지 않은 학생들이 있다. 일종의 자기 규율인데, 참 어렵다. 어떤 학생들은 그저 자기 요구만 쏟아내는 것이 진보적인, 혹은 대안적인 실천이라고 여긴다. 분명히 이런 문제가 있다. 하지만 조금씩 나아지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대신, 자발적인 열정을 지닌 학생들에겐 정말 좋은 환경이다. 그 역시 사실이다. 지순협 대안대학을 마치고, 일반 대학에 들어간 학생이 있다. 탁월한 지적 역량을 지닌 학생이다. 그런데 입학 일주일 만에 내게 전화했다. '학교 못 다니겠다'고 했다. 기존 대학의 교육과정이 지식에 대한 열정이나 창의적인 에너지를 잘 수용하지 못하는 것도 사실이다. 대안적인 교육과정을 만드는 것은 그래서 중요하다. 물론 교육내용뿐 아니라 방식까지 대안적인 길을 찾아야 한다."
다른 어려움도 있다. 대안교육 역시 인프라가 중요하다. 좋은 교수를 충분히 확보해야 한다. 그러자면, 지금보다는 학생이 늘어나야 한다.
"기존대학의 절반 수준 등록금인데, 그래도 학생 모집이 어렵다. 비인가 대학이라서 갖는 한계가 있다. 하지만 지순협 대안대학을 마친 이들은 만족도가 높다. 문화기획 실무자가 우리 학교에서 이론 공부를 더하고 나서 기획 역량을 키운 사례도 있다. 반대로 우리 학교에서 실무를 배운 이들도 있다. 문화기획 실무 경험 있는 교수들이 있다.
비슷한 열정을 공유하는 이들끼리 모여서 새로운 일을 도모하는 경험도 할 수 있다. 우리 학생들은 독립연구저널 <삼합>을 발간했다. 자유로운 연구 모임인 '삼색 불광파'를 만들기도 했다. 여기서 '삼(3)'은 적(마르크스주의, 노동), 녹(생태주의, 환경), 보라(페미니즘, 다양성)을 뜻한다. 학생들이 자율적인 연구 모임을 꾸리고 독립적인 매체를 내는 풍경은, 다른 대학에선 거의 사라졌다. 지순협 대안대학에 지원하는 이들이 늘어나길 바란다."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