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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노회찬의 말이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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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노회찬의 말이 그립다 [장석준 칼럼] <언제나, 노회찬 어록: 우리를 행복하게 한 그의 말들>(루아크, 2019)을 읽고
지난 두 달간 한국 사회는 유례없이 시끄러웠다. 조국, 검찰 개혁, 입시 공정성, 사모펀드, 세대 갈등 등등. 수많은 말들이 오갔다. 마치 누구든 한 마디라도 거들지 않으면 안 되는 것처럼 너도 나도 이야기를 토해냈다.

그런데 정작 말이 너무 적은 곳이 있었다. 정치권이다. 물론 선동의 언어는 결코 적지 않았다. 이쪽이든 저쪽이든 그런 언어는 넘쳐났다. 그러나 대중들 사이에 어지럽게 돌고 도는 말들에 길을 내주고 서로 부딪히기만 하는 이야기들을 새로운 지평으로 인도하는 언어는 찾아보기 힘들었다. 말의 홍수 속에 말다운 말의 가뭄이었다.

본래 좋은 정치가라면 반드시 해야 할 일 가운데 하나가 해설자의 역할이다. 난마처럼 얽힌 세상을 헤쳐 나갈 수 있도록 말로 된 지도를 그려 대중의 판단을 돕는 일이다. 그런데 지난 두 달 동안 이 나라에서는 이 임무를 제대로 수행할 줄 아는 좋은 정치가가 눈에 띄지 않았다. 심지어는 새로운 정치를 보여주겠다는 정의당 같은 곳에서마저 그랬다.

하필이면 이런 때에 고 노회찬 의원의 말들을 모은 책 한 권이 나왔다. 강상구 전 정의당 교육연수원장이 모으고 해설을 단 <언제나, 노회찬 어록: 우리를 행복하게 한 그의 말들>(루아크, 2019)이다. 이 책에 더없이 깔끔하게 정리된 그의 말들은 지금 한국 정치가 보여주는 초라하고 황량한 언어의 풍경과 대비돼 더욱 찬란하면서도 아프게 우리에게 다가온다.

상식으로 상식을 타파하다

실은 불과 몇 달 전에 이 지면에서 강상구 전 원장의 다른 책(<걷기만 하면 돼>, 루아크, 2019)을 다룬 적이 있다("한국이 녹색기본소득 발상지이자 최초 시행국이 된다면?: 기본소득이 기후행동과 만날 때", <프레시안> 2019년 5월 8일). 그럼에도 한 저자의 책을 잇달아 소개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언제나, 노회찬 어록>이 품은 언어가 현 상황에 던지는 의미가 크고 무겁기 때문이다.

책을 읽으며 우선 놀라는 것은 여기에 실린 노회찬의 말들과 통상적인 한국 정치 언어 사이의 너무도 먼 거리다. 하지만 노회찬이 수십 년에 걸쳐 남긴 그 풍성한 말들을 요령 있게 정리한 강상구의 솜씨 또한 놀랍다. 이 책에 5개 장으로 나뉘어 정리된 발언들만 읽어도 노회찬이 평생 공들였던 과제들을 빠짐없이 훑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중요한 인생 역정까지 일별할 수 있다. 아마도 편집자이자 해설자 역할을 맡은 강상구 자신 진보 정치가로서 정치 언어와 실천의 방향을 오랫동안 고심해왔기에 이런 결실을 낼 수 있었을 것이다.

이 책 덕분에 노회찬이 세상에 건넨 말들 중에서도 백미라 할 만한 대목들을 한꺼번에 접하고 보니, 없던 욕심이 생기기도 했다. 누구도 따라 할 수 없었던 그의 말들을 관통하는 숨은 공식 같은 것을 찾아낼 수 있을지 않을까 하는 욕심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봐도 그런 공식은 찾을 수 없었다. 그의 말들은 무슨 테크닉의 산물이 아니었다. 숱한 체험과 만남을 거듭하며 다져진 성찰에서 자연스레 흘러나오는 물줄기였다.

그럼에도 노회찬 정치 담론에서 빈번히 나타나는 몇 가지 공통 논리는 식별할 수 있었다. 가령 다음 발언을 보자.

"현행 선거법으로 트위터를 단속하는 것은 우주선을 발명해놓고 도로교통법을 적용하는 것만큼이나 한심한 일." (2010년 발언, <언제나, 노회찬 어록> 38쪽)

이 말에는 우리가 아주 당연시하는 상식이 깔려 있다. 세상이 바뀌면 그에 맞게 법률 체계도 바뀌어야 한다는 상식이다. 위 발언에서는 그것이 "우주선"에는 "도로교통법 적용"이 불가능하다는 예시로 나타난다. 여기까지는 우습지도 않고 별다른 의미도 없다. 그러나 또 다른 상식이 함께 언급되면서 둘이 서로 충돌할 때에 돌연 웃음과 깨달음이 작렬한다. 또 다른 상식이란 지금 대한민국에서는 트위터 정치 발언이 선거법 단속 대상이라는 것이다. 비슷한 사례를 하나 더 보자.

"열여섯에 만세운동을 주도한 유관순은 열여덟에 옥사했다. 열여섯에 만세운동에 나선 유관순 열사를 높이 받드는 사람일수록 열여섯은커녕 열여덟에 선거권 행사하는 것도 결사반대한다." (2004년, 226쪽)

유관순 열사가 고등학생 나이에 만세운동에 앞장섰다는 것도 상식이고, 대한민국에서는 만 열아홉 살이 돼야 참정권을 지닌다는 것도 상식이다. 하지만 두 상식이 맞부딪히니 "왜 그때의 유관순보다 두어 살이나 더 많은 열여덟 살이 투표를 하면 안 되지?"하는 물음으로 불똥이 튄다.

이렇듯 노회찬은 상식으로 상식을 깨뜨리는 발언을 자주 했다. 앞의 상식은 대개 교과서 속 상식이다. 현 체제가 민족사와 인류사의 모든 성취가 집약된 결실이며 헌법이 약속한 민주공화국임을 과시하며 가르치는 상식들 말이다. 반면 뒤의 상식은 우리가 실제로 일상을 살며 보고 듣고 겪는 상식이다. 돈 많고 힘 있는 이들이 강요하고 우리 스스로 묻지도 따지지도 않은 채 받아들이는 상식들이다.

노회찬은 교과서 속 상식을 새삼 살아 있는 진리로 만들어 이로써 일상의 상식을 타파하곤 했다. 그래서 듣는 이들의 상식이 재구성되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다. 다음 발언도 그런 사례 가운데 하나다.

"'수십 년간 땀 흘려서 농사를 지으면서 우리 사회에 기여한 점을 감안하여 감형한다'거나 '산업재해와 저임금에도 불구하고 수십 년간 땀 흘려 일하면서 이 나라 산업을 이만큼 발전시키는 데 기여한 공로가 있는 노동자이므로 감형을 한다', 이런 예를 본 적이 없습니다." (2004년, 103쪽)

흔히 재벌은 어떤 경제 범죄를 저지르든 "산업 발전에 이바지" 운운 하는 문구 아래 응분의 처벌을 피하곤 한다. 이게 한국 사회의 상식이다. 그런데 산업 발전에 이바지한 게 재벌만은 아니다. 노동자가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았다. 아무리 뇌가 재벌 찬양론으로 세척된 사람이라도 이 사실까지 부정하지는 못한다.

이제 이 두 상식을 대면시켜보자. 산업 발전에 기여한 데는 차이가 없는데 왜 한 쪽은 무슨 죄를 저지르든 용서를 받고 다른 쪽은 목소리만 좀 크게 내도 있는 죄 없는 죄 뒤집어쓰는가? 이런 두 상식의 충돌 앞에서는 기존 상식 체계라는 웅대한 건축물을 지키는 자들도 말문이 막히고 만다. 노회찬 정치 언어의 이런 측면에 주목하면, 그가 남긴 다음 발언이 새롭게 다가오게 된다.

"저야 교과서에서 배운 대로 살았을 뿐이에요. 그러니까 제 잘못은 없습니다. 교과서대로, 하라는 대로 하다 보니까 이렇게 돼버렸어요." (2015년, 61쪽)

하, 그러고 보니 교과서야말로 무서운 책이었다. 아니, 교과서 속 문구들을 그 발행자들에게 청구서로 갖다 댄 노회찬이 이를 천하에 가장 무서운 책으로 만들어 버렸다. 그래서 이런 서슬 퍼런 말도 나올 수 있었다.

"내 눈이 흙이 들어가기 전에 노조는 안 된다고 했지만, 눈에 흙이 들어간 지 오래됐죠." (2015년, 282쪽)

체제 '안'에서 종횡무진하던, '바깥'의 대변자


이것 말고도 눈에 들어오는 또 다른 중요한 논리가 있었다. 언론을 통해 우리 눈에 비친 노회찬의 대화 상대는 대개 다른 국회의원들이거나 그가 속해 있던 법제사법위원회 감사 대상인 법조인들 혹은 잘 알려진 언론인들이었다. 달리 말하면, 대한민국 기득권 체제에서도 가장 안쪽에 자리한 인물들이었다. 체제 '안'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그들과 대화하면서도 노회찬은 그들과는 전혀 다른 곳에 선 이들 중 한 사람으로서 발언했다. 기득권 체제의 ‘바깥’에서 살아가는 이들의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가령 이런 사람들이었다.

"6411번 버스라고 있습니다. (중략) 이분들은 태어날 때부터 이름이 있었지만, 그 이름으로 불리지 않습니다. 그냥 아주머니입니다. 그냥 청소하는 미화원일 뿐입니다. 한 달에 85만원 받는 이분들이야말로 투명인간입니다. 존재하되 그 존재를 우리가 느끼지 못하고 함께 살아가는 분들입니다." (2012년, 87-88쪽)

체제 '안' 사람들에게 '바깥' 사람들은 투명인간이다. 심지어는 가장 가까이에서 일하는데도 전혀 안 보이기까지 한다. 국회의원들의 사무 공간인 의원회관에서 일하는데도 이들은 국회의원들에게 투명인간이다. 다만 그 국회의원 가운데 적어도 한 사람만은 그렇지 않았다. 노회찬은 오히려 그 투명인간들의 대변자로 발언하려 했다.

"제가 있는 의원회관 5층을 청소하는 청소 노동자 중 한 분에게 여쭤보니 새벽 6시에서 오후 4시까지 일하면서 약 130만 원 가량의 월급을 받는다고 합니다. 주말에 특근까지 해야만 140만 원 조금 넘는 액수를 수령할 뿐입니다. 국회의원 세비를 반으로 줄이더라도 우리나라 노동자 평균 임금의 세 배, 최저임금의 다섯 배 가까운 액수입니다. 같이 삽시다. 그리고 같이 잘 삽시다." (2016년, 236-237쪽)

노회찬의 인상 깊은 발언들 가운데 상당수는 이렇게 체제 '안'에 진입해 활동하면서도 끊임없이 '바깥'의 대표자로 사고하고 발언하며 행동하려는 이만이 보일 수 있는 거리감 혹은 자유로움에서 나온 것이었다. '안'에서 활약하는 '바깥' 분자였기에 그는 체제가 적응을 강요하는 전통과 관성에 주눅 들지 않을 수 있었고, 오히려 이를 웃음거리로 만들 수 있었다. 2004년 원내 진출을 앞둔 상황에서 나온 다음 발언이 그런 사례다.

"라디오 토론이니 점잖게 진행될 줄 알았는데 시작부터 난투극이다. 5분도 채 되지 않아 서로 사과하라고 언성 높인다. 국민 앞에 고개를 들 처지도 아닌데 희대의 영웅처럼 큰소리다. <CBS>의 좁은 스튜디오가 동물원 우리처럼 느껴진다. 이러니 점잖고, 상식적이고, 순박한 사람들은 정치권을 꺼리지 않았는가. 그 정치권에 이제 민주노동당이 들어간다. 타잔이 되어야만 이 동물들을 다룰 수 있다." (2004년, 123쪽)

강대한 기성 정치권은 졸지에 ‘동물’이 되어 버렸고, 정치권에게 무시당하는 이들이 오히려 ‘타잔’이 됐다. ‘안’과 ‘바깥’을 이렇게 뒤집음으로써, 서민에게 출입이 금지된 귀족들의 밀실은 일망타진되어야 할 범죄자들의 소굴로 반전되어버린다. 노회찬이 정치 역정 초기만이 아니라 이후에도 줄곧 이런 논리를 구사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끝까지 자신이 선 자리를 기득권 ‘바깥’에서 찾았기 때문이다. 이 점만큼은 추호도 흔들림 없었음은 ‘초심’이라는 상투적 표현에 대한 그의 자신감 넘치는 답변에서 확인할 수 있다.

"초심이 흔들린 적은, 놀랍게도 없습니다. 그렇지 않고는 지금까지 올 수 없죠." (2012년, 81-82쪽)

그랬기에 그는 체제 ‘안’에서 가장 대접받는 이들 앞에서도 당당할 수 있었다. 그게 삼성 재벌이든 현직 대통령이든 말이다. 그가 무릎을 꿇는다면 이는 ‘바깥’에서 바라보는 모든 이들의 패배를 뜻하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개인이 아니라 국민을 대표해서 이 자리에 와 있습니다. 우리가 삼성그룹 이건희 회장을 '부를 자격이 없다'는 얘기는 바로 '우리 국민이, 우리가 대표하는 우리 국민이 삼성그룹 이건희 회장을 부를 자격이 없다'라는 얘기와 마찬가지이기 때문에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2006년, 91쪽)

어쩌면 노회찬의 모든 영광과 비극이 다 이 논리의 연장선에서 일관되게 실천한 탓이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는 생의 마지막에 국회의원 특권 폐지에 앞장서며 가장 빛나는 의정 활동을 펼쳐보였다. 이것이야말로 체제 ‘안’을 평정하는 ‘바깥’ 대표자의 거침없는 행보였다. 그러나 또한 그랬기에 그의 걸음은 돌연 멈춰야 했다. 체제 ‘안’의 가장 막강한 권력(삼성과 그 하수인들, 가령 검찰 ...)은 그들 곁에 다가온 ‘바깥’의 목소리를 그토록 참을 수 없었던 것이다. "우리를 행복하게 한 그의 말들"은 그렇게 무시무시한 말들이기도 했다.

"민주당과 자유한국당, 고생하셨습니다. 판을 갈 때가 이제 왔습니다."

이제 누가 이 무시무시한 말들을 감히 입 밖에 꺼내는 과업을 이어받을 것인가? 기득권 무리가 점령한 공간 ‘안’에서 ‘바깥’ 사람들을 대변할 이들은 누구인가? <언제나, 노회찬 어록>의 책장을 덮으며 누구든 이런 물음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촛불 광장의 동지들을 갈가리 찢어놓은 지난 몇 달을 거친 뒤이기에 더욱 그러하다. 그래서 그런지 책 마지막에 인용된 그의 발언은 마치 이 혼돈을 겪고 난 이들에게 들려주기 위해 준비된 유언 같기도 하다.

"대학 서열과 학력 차별이 없고 누구나 원하는 만큼 교육받을 수 있는 나라, 지방에서 태어나도 그곳에서 교육받고 취직하고 결혼하고 아이를 낳는 데 아무 불편함이 없는 나라, 비정규직이라는 이유로 차별받지 않는 나라, 인터넷 접속이 국민의 기본권으로 보장되는 나라, 그리고 무엇보다 모든 시민이 악기 하나쯤은 연주할 수 있는 나라." (381쪽)

요즘 들어 더욱 간절히 바라게 되는 우리 미래의 나라다. 그러나 한때 ‘바깥’에 누구보다 귀 기울이는 줄 알았던 이들이 가장 ‘안’쪽에 서 있음을 확인하게 된 지금, 촛불 광장에도 ‘안’과 ‘바깥’이 선명히 나뉘어 있음을 알게 된 지금, 저 나라는 어떻게 우리에게 다가올 수 있는가? 그가 "당당히 앞으로 나아가라"던 그 당까지 흔들리는 지금 말이다.

<언제나, 노회찬 어록>이 전하는 여러 장면들 가운데 이후 모든 이야기의 시원이 될 한 장면에서 나는 그 출구를 발견한다. 2004년 초 노무현 대통령 탄핵으로 총선 정국이 열린우리당 대 한나라당 양당 대결로 치달을 때에 당시 민주노동당 비례대표 후보 8번 노회찬은 이렇게 선포했다.

"한나라당과 민주당, 고생하셨습니다. 이제 퇴장하십시오. 50년 동안 썩은 판을 이제 갈아야 합니다. 50년 동안 똑같은 판에다 삼겹살 구워 먹으면 고기가 시커메집니다. 판을 갈 때가 이제 왔습니다." (2004년, 330쪽)

이런 언어가 그립다. 지금, 이런 말이 되살아나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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