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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우리가 폴라니에 주목해야 하는 또 다른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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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우리가 폴라니에 주목해야 하는 또 다른 이유 [장석준 칼럼] <칼 폴라니: 왼편의 삶>을 읽고
칼 폴라니는 이제 우리에게도 낯선 사상가는 아니다. 2000년대 말, 미국발 금융위기가 전 세계를 강타할 때에 주저 <거대한 전환>이 제대로 된 국역본(홍기빈 옮김, 길, 2009)으로 나오면서 그는 급속히 유명 저자가 됐다. 그래서 요즘은 주류 경제학을 대체할 지식 체계의 개척자로 칼 마르크스나 존 메이너드 케인스 등과 함께 그의 이름을 거명해도 그다지 어색한 분위기가 되지는 않는다.

하지만 그의 삶만은 여전히 안개에 싸여 있었다. 유대계 헝가리인이었지만 20세기 유럽의 복잡한 역사 때문에 오스트리아와 영국을 전전하다 결국 미국에 정착해 <거대한 전환>을 집필했다는 사실 정도가 알려져 있을 뿐이었다. 두 세기 째 서로 논쟁하는 수많은 전기 작가들을 양산해온 마르크스의 삶이나 로버트 스키델스키가 지은 두꺼운 전기(<존 메이너드 케인스: 경제학자, 철학자, 정치가>, 고세훈 옮김, 후마니타스, 2009)가 나와 있는 케인스의 경우와는 너무 달랐다.

실은 이는 우리만의 사정은 아니었다. 전 세계적으로도 폴라니의 전기는 찾아보기 힘들었다. 그러다 2016년에야 내실 있는 전기가 한 권 나왔다(Karl Polanyi: A Life on the Left, Columbia University Press). 저자는 최근 가장 왕성하게 폴라니 사상을 연구하고 있는 영국 학자 개러스 데일인데, 흥미로운 것은 발행처가 폴라니가 만년에 교수로 재직한 미국 컬럼비아 대학이라는 점이다.

그리고 3년 뒤, 칼폴라니사회경제연구소의 기획으로 이 책 국역본이 나왔다. 우리말 제목은 <칼 폴라니: 왼편의 삶>(황성원 옮김, 홍기빈 감수, 마농지, 2019). 이로써 우리는 드디어 <거대한 전환>이라는 유명한 저작의 저자만이 아니라 평생에 걸쳐 민중해방운동의 신실한 동지이자 민주적 사회주의의 전망과 가능성을 탐색한 치열한 사상가이기도 했던 한 사람의 일생과 마주하게 됐다.

폴라니 전기이면서 동시에 20세기 좌파 사상의 파노라마

데일이 쓴 전기는 그간 접하기 힘들었던 폴라니 생애의 정보들을 마치 봇물처럼 토해낸다. 네 나라, 즉 헝가리, 오스트리아, 영국, 미국의 사상계에서 잇달아 활약한 인물의 궤적을 좇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런데 저자는 그 일을 해냈다. 덕분에 <거대한 전환> 저자의 삶에 대해 단편적인 정보들만 접한 탓에 생겼던 온갖 궁금증이 이 책 한 권으로 시원하게 풀릴 수 있었다.

가령 이런 의문들이다. 청년 시절에 급진부르주아당이라는 자유주의 정당의 창당을 주도했던 폴라니가 어떻게 1919년 사회주의 혁명으로 수립된 헝가리 평의회공화국에 참여하게 됐는가? 평생 사회주의자임을 자부했지만 마르크스주의를 이념으로 내건 정당에는 가입한 적 없는 그가 어떻게 헝가리 공산당 열혈당원 일로나 두친스카와 결혼하게 됐는가? 시장 자유주의를 불구대천의 적수로 여긴 그와, 신자유주의의 뿌리라고도 할 수 있는 몽펠르랭협회 회원이었던 동생 마이클 폴라니는 과연 서로를 어떻게 생각했던가? 만년의 폴라니는 1956년 헝가리 인민의 비극적인 민주화 봉기에 어떻게 반응했는가?

<칼 폴라니: 왼편의 삶>은 이런 물음에 충실히 답할 뿐만 아니라 그 과정에서 수많은 20세기의 빛나는 삶들을 소개한다. 베르톨트 브레히트의 시구마냥 "신발을 바꾸듯 나라를 바꾸"어야 했던 폴라니는 그러한 이주와 망명의 고단함을 믿기지 않을 정도로 폭 넓고 화려한 교우 관계로 해소했던 것만 같다. 그의 삶 한 자락을 이야기할 때마다 기라성 같은 동시대 인물들의 이름이 어지럽게 쏟아진다.

헝가리에서 보낸 젊은 시절을 소개하는 대목에서는 서구 마르크스주의의 거목 죄르지 루카치와 지식사회학 창시자 카를 만하임이 등장한다. 오스트리아 망명 시절 이야기에서는 오스트리아 마르스주의 학파의 오토 바우어, 루돌프 힐퍼딩이 나오고, 비프로이트 계열 정신분석학자 알프레트 아들러도 모습을 보인다. 영국으로 옮긴 뒤에는 당대 영국 좌파의 주요 이론가들인 G. D. H. 콜과 R. H. 토니, 해럴드 래스키가 폴라니 주위를 맴돌고, 아널드 토인비 같은 더 유명한 이름도 함께 한다. 마지막 거주지 미국에서는 에리히 프롬, 루이스 멈퍼드 등이 이 대열에 합류하며, 책 말미에는 E. P. 톰슨 같은 신세대 좌파 지식인까지 출연한다.

좌와 우를 가리지도 않는다. 비록 논적이기는 하지만, 20세기 시장지상주의의 교주 루트비히 폰 미제스가 나오고, 그의 사도 프리드리히 폰 하이에크도 나온다. 미국에 있을 무렵 지적 긴장 관계에 있었던 사회학자 탤컷 파슨스도 비슷한 사례로서 이 전기의 몇 쪽을 장식한다. 더 놀라운 사례는 경영학자 피터 드러커다. 너무도 유명한 이 경영학계의 구루는 폴라니의 적이 아니라 평생의 벗 가운데 한 사람으로 등장한다.

그래서 이 책은 폴라니의 전기로만 읽히지 않는다. 또한 흥미롭고 풍성한 지성사이기도 하다. '왼편의 삶'이라는 부제처럼 20세기 좌파 지성의 여러 흐름이 서로 만나고 엇갈리며 찬란한 이야기들을 만들어낸다. '좌파'라고 하면 흔히 떠올리는 정통 마르크스주의나 베른슈타인식 사회민주주의만이 아니다. 폴라니의 인생 역정을 따르다 보면, 마르크스주의 가운데에서도 다양한 비교조적 마르크스주의'들'과 조우하게 되고 마르크스주의에 포괄되지 않는 사회주의 사조들이 존재했다는 사실 또한 확인하게 된다.

명저 <거대한 전환>은 바로 이러한 다채로운 흐름들의 마주침을 통해 탄생한 작품이었다. 이 책이 통상적인 마르크스주의와 마찬가지로 시장 체제, 즉 자본주의를 비판하면서도 이와는 좀 다른 준거점에서 대안을 모색한다고 느껴지는 데는 다 이유가 있었다. 그 밑바닥에는 20세기의 비교조적 좌파 사상-운동들의 다성악(多聲樂)이 흐르고 있었다.

그런데 <칼 폴라니: 왼편의 삶>이 상세히 소개하는, 이런 다성악의 여러 선율 가운데에서도 특별히 내 머릿속을 계속 맴도는 한 가지 가락이 있다. 그것은 1920년대에 폴라니가 오스트리아 빈에서 많은 영향을 주고받은 평의회 사회주의 혹은 길드 사회주의다.

'길드 사회주의자'이자 '기능 민주주의자' 폴라니

폴라니가 빈에 체류할 무렵 이곳에서는 '붉은 빈' 실험이 진행되고 있었다. 오스트리아 사회민주노동당은 비록 중앙정부에서는 야당이었지만 빈에서는 압도적 우위의 다수당이었다. 사회민주노동당이 이끈 빈 시정부는 부유층에게 세금을 거둬 각종 복지 시설을 구비한 공공주택단지를 신축했다. 아직 전국에 걸쳐 복지국가를 수립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한 도시에 복지국가의 예고편을 건설한 것이다.

주목할 점은 복지 확충만이 아니었다. 오스트리아의 노동 현장에는 1918년 혁명을 거치며 노동자 평의회가 들어섰다. 이웃 나라 독일에서 사회민주당은 평의회의 존재와 역할을 무시했지만, 오스트리아의 자매정당은 제한된 수준에서나마 공장 내 평의회를 새로운 사회의 중요한 세포 중 하나로 인정했다. 그럼 이들 평의회를 어떻게 기존 노동조합이나 국가기구와 연결해 새 사회의 뼈와 근육으로 만들 것인가? 이에 관해 오스트리아 사회주의자들이 주로 참고한 이론은 영국의 길드 사회주의였다.

이런 지적-실천적 교차로의 한 복판에 장년의 망명객 칼 폴라니가 있었다. 그는 나중에 <거대한 전환>에서도 밝히듯이 '붉은 빈' 실험을 높이 평가했고, 오스트리아 동지들처럼 길드 사회주의에 주목했다. 길드 사회주의의 대표적 주창자인 G. D. H. 콜과는 영국 망명 이후 평생의 벗이 되기도 한다. 다양한 사회주의 조류들 가운데 폴라니가 평생 가장 지지한 흐름은 길드 사회주의였던 것이다.

길드 사회주의란 무엇인가? 이 지면에서 이를 상세히 소개하기는 어렵지만, 핵심은 역시 '길드(guilds)'라는 말에 있다. 비록 중세에서 이어받은 명칭이지만, 이 말이 가리키는 바는 재화 및 서비스 생산자 혹은 소비자 같은 현대적 경제 활동에 바탕을 둔 자치 결사체다. 노동자 평의회의 그 '평의회'와 다르지 않은 내용이다. 길드 사회주의자들은 자본주의 기업뿐만 아니라 국가 관료기구도 새 사회를 운영하는 주체일 수 없다고 보았다. 이들이 꿈꾼 사회는 노동자 길드, 소비자 길드 들이 서로 소통하고 협력하며 합의하는 체제였다.

길드 사회주의에 주목한 오스트리아 사회민주노동당 지도자 오토 바우어는 이런 체제에 '기능 민주주의'라는 또 다른 이름을 붙였다. 빈 시절에 폴라니는 이 기능 민주주의의 열렬한 옹호자였다. <칼 폴라니: 왼편의 삶>은 '붉은 빈'을 트집 잡고 나선 신자유주의의 개창자 미제스, 하이에크 등과 격렬한 논쟁을 벌이길 마다하지 않은 한창 때의 폴라니를 생생히 전한다. 이 논쟁을 전개하면서 그는 길드 사회주의자들과 오스트리아 이론가들이 모두 강조하는 '기능' 개념에 착목했다.

출발점은 사회가, 자유주의자들의 시각과는 달리, "개별기관들이 서로 통일성 있게 제 기능을 수행하는 하나의 유기체"(<칼 폴라니: 왼편의 삶> 134쪽)라는 것이다. 여기에서 '기능'이란 "생산, 소비, 우호적인 관계, 지식 생활, 그리고 이런 움직임의 활성화"(133쪽)를 뜻한다. 개인들은 이런 기능을 바탕으로 "노동조합, 협동조합, 교회, 공동체, 조직, 지방의회, 국가 같은 결사를 구성"(133쪽)하며 사회의 "기본적인 조화는 개별 삶의 기능들 사이에 존재한다"(134쪽).

시장이 삶의 다른 영역들을 모조리 지배하는 자본주의 체제에서는 이런 조화란 불가능하다. 이윤 극대화와 자본 축적이라는 한 가지 목표 아래 사회의 다른 모든 목표들이 종속되기 때문이다. 기능에 바탕을 둔 결사체들은 대개 해체되거나, 아니면 자본이 주도하는 생산-재생산 과정의 동원 대상이 되어 버린다.

폴라니의 영국인 친구들 중 한 사람인 기독교 사회주의자 R. H. 토니는 이런 상태를 '탈취사회'라 칭했다. 마침 토니의 우리말 전기도 폴라니 전기와 거의 같은 시점에 나왔는데(고세훈, <R. H. 토니: 삶, 사상, 기독교>, 아카넷, 2019), 토니 역시 탈취사회의 대안으로 '기능사회'를 제시한다. 그는 기능사회를 이렇게 묘사한다.

"한 사회가 부의 취득을 사회적 의무의 이행과 결부시키고, 보상을 서비스에 따라 배분하되 서비스를 수행치 않는 자에게는 거부하며, 사람의 소유가 아니라 그의 잠재력, 창조력, 성취를 중시한다면, 우린 그런 사회를 기능사회로 부를 수 있을 터인데, 그런 사회가 가장 강조하는 주제는 기능의 수행일 것이기 때문이다." (<R. H. 토니> 175-176쪽에서 재인용)

토니는 기능사회에서는 민주화된 국가, 주주의 지배권이 제거된 기업과 더불어, 경제적 이익 추구보다 훨씬 더 폭 넓은 사회적 전망 아래 움직이는 노동조합이 중요한 역할을 하리라 내다봤다. 이 사회에서는 사용자와 노동자의 공동 중앙기관이 모든 잉여 기금을 관리하며, 사회 전체의 이익을 위해 이를 재투자한다. 한 세대 뒤에 등장할 스웨덴 임노동자기금 구상을 연상시키는 구상이자, 길드 사회주의의 온건한 버전이라 하겠다.

아무튼 콜이든 토니든 폴라니든 이들에게 자본주의 '이후' 사회란 결코 '시장'의 자리를 '국가'로 대체하는 체제가 아니었다. 그렇다고 서민 가정의 구매력을 높이고 각종 복지 장치를 제공하면 문제가 다 해결되는 것도 아니었다. 자유로운 개인을 사회라는 유기체와 결합시킬 새로운 방식이 마련되어야만 했다. 생산, 소비, 여가와 같은 삶의 실질적인 영역들에서 시장이나 국가와는 다른 방식으로 개인과 사회를 연결할 대안 조직들이 반드시 필요했다. 폴라니나 토니가 '기능'이란 말로 뭉뚱그린 과제들을 담당할 민주적 결사체들이 성장해야만 하는 것이었다. 이것이 국가 사회주의와는 다른 방향에서 전개된 지난 세기 '이단적' 사회주의 조류들의 공통된 열망이자 원칙이었다.

지금 우리의 대안 논의에 던지는 폴라니의 메시지

100여 년 전의 이런 고민은 지금 우리의 대안 논의에도 빛을 밝혀준다. 요즘 탈신자유주의/자본주의 정책 논의의 뜨거운 쟁점 가운데 하나는 공공 서비스 확대가 먼저인가, 기본소득 도입이 먼저인가이다. 나는 한국 사회에서 공공부문이 더 늘어나고 보다 적극적인 역할을 해야 한다는 입장이며, 기본소득 역시 미래 사회의 필수 구성요소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국가의 역할 강화와 기본소득이라는 두 축만을 오가는 논쟁에는 그다지 공감할 수가 없다.

이런 식의 논쟁은 시장 자유주의를 비판하면서도 암암리에 자유주의의 인간관을 수용한다. 이런 논의는 마치 더 많은 공공 서비스를 맛보거나 기본소득을 두둑이 지급받고서 저마다 자신의 아파트나 원룸으로 돌아가기만 하면 누구든 행복한 삶에 도달하리라고 가정하는 듯 보인다. 그러나 이들 개인이 삶의 보람을 느끼고 자신의 인간됨을 확인할 통로를 사회가 마련하려고 노력하지 않는다면, 불행의 그림자는 결코 옅어지지 않을 것이다. '동료'라 불리든 '동지'라 불리든 아니면 '도반'이든 그런 존재가 곁에 없는 사회란 사회주의자가 뜨겁게 호소하는 그 '사회'일 수 없다.

더구나 우리가 발걸음을 떼려 하는 이곳은 다름 아닌 '한국' 사회다. 이 나라에서는 언제부터인가 대형 교회와 대기업 노동조합 빼고는 국가나 기업과 어깨를 나란히 할 만한 제3의 조직들이 멸종되어가고 있다. 이는 시장 독재가 낳은 또 다른 근본적 위기다.

폴라니는 이런 위기가 '존재'함을 확인하고 그 출구를 찾기 위해서도 반드시 참고하고 대화해야 할 사상가다. <거대한 전환>의 폴라니뿐만 아니라 그 이전과 이후의 폴라니 또한 그러하다. 보다 많은 이들이 <칼 폴라니: 왼편의 삶>에서 그러한 그의 여러 얼굴과 해후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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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석준 전환사회연구소 기획의원은 오랫동안 진보 정당 운동의 정책 및 교육 활동에 참여해왔으며, 자본주의 위기에 맞선 진보적 사회과학을 재구성하고자 글로벌정치경제연구소에서 연구 및 출간 사업을 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 <레프트 사이드 스토리 : 세계의 좌파는 세상을 어떻게 바꾸고 있나>, <사회주의>, <장석준의 적록 서재>, <신자유주의의 탄생 : 왜 우리는 신자유주의를 막을 수 없었나> 등이 있고, 옮긴 책으로 <국가 대 시장 : 지구 경제의 출현>, <안토니오 그람시 : 옥중수고 이전>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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