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19'가 강타하여 온 나라가 재난 극복에 정신이 없다. 중국, 한국, 일본 등 동아시아를넘어 유럽과 북미로도 퍼지는 형국이라 전세계적인 장기전이 되지 않을까 우려가 커지고 있다. 역병이 무서운 이유는 정체를 모르기 때문이다. 모르는 위협에 대해 인간은 본능적으로 공포로서 대응한다. 긴장을 극대화하여 최대한 방어 자세를 취하는 것이다. 이 와중에 걸러지지 않은 분노나 두려움을 타고 평소의 감정을 절제하지 못한 욕설과 원망이 인터넷을 채우고 있다. 휴대폰이나 미디어를 멀리하지 않으면 바이러스에 감염되기 전에 정신이 어떻게 되지 않을까 싶을 정도이다. 하필 이 어려운 시기에 <지식협동조합 좋은나라>가 매주 발간하는 이슈페이퍼가 300호를 맞게 되었다. 원래는 자축과 함께 그 간의 성과를 돌아보고 앞으로 나갈 방향도 다져보는 글을 계획했다. 하지만 아무래도 역병과의 싸움에 임하는 한국 사회의 특징과 과제에 관한 이야기를 거를 수 없을 것 같다.
아직 진행 중이라 코로나19로 인한 최종적인 피해가 어떻게 될지, 정부와 우리 사회가 그에 대응하는 것에 대한 평가를 어떻게 할 지 등은 지금 왈가왈부할 일이 아니다. 지금으로서는 일단 벌어지고 있는 사정에 초점을 맞추고 우리 사회가 동원할 수 있는 최선의 지혜와 방안을 모아 우선바이러스와의 전쟁을 이겨내야 할 것이다. 그런데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앞에서는 바이러스와의 전쟁을 치르고 있지만, 등 뒤에서는 다른 생각들 간의 전쟁이 한창이다. 내가 좋아하는 페친 한 분이 이런 글을 올렸다. “우리는 정말 나쁘다. 아픈데 싸움질이다.” 가슴 아픈 말이다.
우리는 왜 이렇게 나쁘게 되었을까? 나라를 덮친 역병과 싸우는 와중에서도 서로 욕설을 하고 저주를 퍼붓는 악마가 되었을까? 한국이라는 공동체가 산산조각이 나는 듯한 꼴을 매일 인터넷에서 보고 산다. 한국이라는 공동체가 있기는 했던 것일까? 분열하는 대한민국을 묶어주는 공동체의 끈은 있기나 한 것일까? 시장의 균형을 잡아주는 '보이지 않는 손'은 원래 보일 수가 없는 것이라던 어떤 경제학자가 있었다. 그런 손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결코 보일 수가 없다는 것이다. 한국이라는 공동체의 끈은 어떨까? 비단 이번 코로나바이러스 사태에만 나타나는 현상이 아니라 지난 이십년 사이 한국 사회의 적대적 분열은 도를 넘어 자해 수준에 이르고 있다. 대체 왜 그렇게 되었으며 어떤 방향에서 해결의 실마리를 구해야 할까?
이 글은 다음과 같은 점에 주목한다. 첫째, 한국 사회는 지난 이삼십년 사이에 과거에 비해 대단한 규모로 다원화의 길을 걸어왔으며 원심력과 구심력이 이전 세대와는 전혀 다른 수준으로 팽창하였다. 둘째, 한국의 성공적 근대화에는 포용적인 정치경제제도의 도입과 실행이 중요한 변인으로 작용했다. 그러나 포용성은 양극화 심화로 약화되거나 깨지고 있으며 집단적 적대가 그 자리를 파고드는 중이다. 셋째, 포용성이 선순환의 제도화를 통해 공고해 지지 않으면 착취적 방식이 언제든 파고들 수 있고, 국가의 실패를 초래할 수 있다. 넷째, 불안하고 부당한 사회에서는 포퓰리즘적 극단주의가 발호하고 민주주의는 합법적으로 전도될 수 있다. 한국 사회의 분열 양상은 이를 부추김과 동시에 이에 의해 휘둘리는 실정에 있다. 다섯째, 정보미디어기술환경의 급변은 정보의 생산과 유통, 소비를 이전과 다른 차원으로 변화시키고 있다. 인터넷과 소셜미디어의 광범위한 확산은 앞의 네번째 현상을 가속화 시킨다. 극단주의의 발호와 민주주의의 전도는 항상 우리 곁에 있는 두려운 가능성이다. (필자)
가치의 모노크롬 사회를 벗어나는 한국
한국은 90년대 들어 경제 규모로는 세계 10대 국가에 포함 되었다. 얼마 되지 않은 일이다. 80년대나 90년대에 태어난 세대에게는 한국이 마치 언제나 이랬던 게 아닌가 싶을 수도 있는 반면, 그 이전 세대에게는 기분 좋은 어색함이다. 가지게 되어 자랑스럽지만 어떻게 누릴 수 있는 것인지는 아직 잘 모르는 뭔가를 가진 셈이다. 경제 성장은 사회의 밀도와 복잡도를 끌어 올렸고 가치와 경험이 빠른 속도로 다양해지는 가운데 이분법적 사고는 어울리지 않는 낡은 외투가 되었다. 아버지 세대의 가치관으로부터 뛰쳐나오려는 원심력은 점점 커지고 이를 당기는 구심력은 적절한 언어를 찾지 못하고 있다. 독재-반독재, 민주-비민주, 친미-반미, 용공-반공 등으로는 재단할 수 없는, 또 재단해서도 안 되는 세상이 온 것이다. 정치적 스펙트럼도 이에 따라 분열하고 있다. 조국 사태는 이를 간단히 드러내는 대표적인 사례이다.
조국 사태라는 구체적인 사례를 두고 이를 받아들이는 방식과 판단하는 기준에서 ‘우리’라고 부르는 집단 내에도 ‘차이’가 있다는 것을 분명히 알게 된 것이다. 금수저와 흙수저의 대립인 줄 알았는데 우리 편에도 금수저가 있고 상대편에도 흙수저가 있다는 것을 받아들여야 할 시간이 왔다. 하지만 현실 정치의 관성은 새로운 틀을 짤 능력도 시간도 없다. 아버지 시대의 논리가 현실 다양성을 가리고 다시 군림하며 진영간 전쟁으로 상황을 정리하려 든다.
포용성이 떨어진 포용국가
<국가는 왜 실패하는가>라는 저서로 일약 국제적 명성을 얻은 MIT의 대런 애쓰모글루 교수와 하버드의 제임스 로빈슨 교수는 역사적으로 망하는 국가와 흥하는 국가를 설명하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변수가 제도라고 주장한다. 착취적 정치경제제도를 가진 국가는 망하고 포용적 정치경제제도를 발전시킨 나라는 흥한다는 것이다. 인류사 수천년을 종횡무진 들락거리며 펼치는 이야기로서 일리도 있고 흥미진진하다. 한국은 성공국가의 대명사로 이 책에서 빈번하게 인용된다. 그들의 주장은 남한을 북한에 비교하거나 가나에 비교할 때 별로 나무랄 것이 없다. 대다수의 남미, 아프리카, 중동 등 국가들과 비교해서 한국의 성공을 포용적 정치경제제도의 안착과 승리로 이야기 할 수 있다. 오늘날에도 여러 곳에서 국가가 실패하는 가장 큰 이유는 착취적 제도에 있다고 저자들은 말한다.
하지만 시야를 한정하여 지난 이십년간 한국의 변화를 들여다 본다면 한국의 정치경제체제가 더 높은 포용성을 실현했는지 확신할 수 없다. 북한에 비한다면 의심의 여지 없이 포용적이지만 양극화가 심화되고 부의 편중이 구조화되는 현상을 포용적이라고 하기는 어렵다. 대학을 갓 졸업한 직장 초년생이 월급을 백오십에서 이백만원 정도 받아서 월세로 오륙십만원, 식비로 오십만원, 그리고 교통비로 십여만원, 전화료 등 기초적인 생활 유지비를 감당하고 나면 데이트 비용도 걱정스러운 현실이다. 저축은 언제하며 결혼은 또 언제 할 수 있을까? 원래 가진 재산이 없다면 이 사람이 경제적 자립과 안정을 누릴 수 있는 시기는 영원히 오지 않는 신기루가 될 지도 모른다. 정부는 포용국가를 기치로 내걸었지만 최저임금 인상을 제외하면 어떤 방식의 포용을 추진하고 있는 지 알 수가 없다. 최저임금 인상마저도 서민들 간에 살베기라는 부작용이 심각하여 과연 얼마나 실효성을 낼 지 걱정인 상태이다.
포용의 상실은 경제적 격차의 심화를 통해서만 드러나는 것이 아니다. 정치가 도덕주의와 원리주의로 흘러가면 권력과 이익으로부터 배제되는 사람들은 끝없이 늘어난다. 다양성이 증가하고 국가간 장벽이 낮아지는 글로벌 사회라면 더욱 그렇다. 사회와 시민들은 다양한 가치를 좇아 빠르게 팽창하고 있는데 정치권력과 엘리트들이 자신들의 신앙에 갇혀 모르쇠로 일관하는 것을 의지와 집념이라고 착각하면 곤란하다. 그들만의 리그라는 말을 듣지 않으려면 자신들이 갇힌 좁은 이념의 감옥에서 나와야 한다.
압축근대화란 수사일 뿐
거시적 입장에서 한국이 획득한 포용적 정치경제제도는 주로 경제발전이나 압축근대화 등의 표현으로 이해되어 왔다. 경제 발전과 정치적 민주화는 한국이 지난 반세기동안 이룬 위대한 업적임에 이론이 있을 수 없다. 압축근대화라는 과장된 포장으로 마치 이룰 것은 모두 이루고 서구를 따라 잡았다는 듯한 착시를 스스로 즐기기도 했지만, ‘압축근대화’란 그저 비유적 수사일 뿐 아직 한국 사회가 안고 있는 숙제는 크고 깊다. 근대의 완성은 산업화의 성공에서 끝나지 않는다. 경제적 근대화, 정치적 근대화, 문화적 근대화 등이 각각 궤를 달리하며 함께 달려 간다. 발전만 하면 다 되는 줄 알았는데 한국의 경제제도는 양극화를 고착하고, 정치제도는 비 타협적 승자독식으로 적대적 싸움이 되었다. 정책의 수립과 실행을 통한 정치 세력 간 경합이 아니라 상대방을 악마화하고 제거의 대상으로 호명하는 전쟁이 되어 버린 것이다.
내가 잘하면 국민의 지지를 얻어 권력을 가져오고 내 친구가 잘 하면 그가 권력을 가져가는 방식의 게임에서 경합자들은 서로를 죽이는 대상으로 상정하지 않는다. 스포츠에서 기량에 따라, 때로는 운에 따라, 이길 때도 있고 질 때도 있는 것과 같다. 더 열심히 준비해서 다음에 이기면 된다. 하지만 정치적 경쟁자를 제거해야 하는 적으로 간주하고 전쟁을 벌이면 정치는 사라지고 남는 것은 민주주의의 몰락이다.
오늘날 한국의 정치가 스포츠와 같이 치루어지는지 아니면 전쟁이 되어가고 있는지는 어린 학생들도 알 지경이다. 서로 욕설을 해대며 정략적 이익에 골몰하는 모리배들 뿐만아니라 수많은 시민들이 인터넷에 욕설과 비방을 올리며 그것을 적극적 정치 참여로 착각하고 있다. 하버드의 정치학 교수들인 스티븐 레비츠키와 대니얼 지블랫은 <어떻게 민주주의는 무너지는가>라는 책을 통해 트럼프를 선출한 미국의 민주주의 시스템이 어떻게 위태로워지고 있는지를 분석한다. 이에 따르면 민주주의를 파괴하고 독재를 가져올 사람들이 보이는 행동들을 네 유형으로 분류할 수 있다.
한국은 지금 정치인들 뿐만 아니라 언론과 보통의 시민들마저도 자신이 지지하지 않는 정치인에 대해 혹은 일반인에 대해 수꼴이다 좌빨이다 격하하며 나라를 망쳐먹을 세력이라고 비난하기를 서슴지 않는다. 정치 지도자가 외국의 앞잡이라고 욕하는가 하면, 걸핏하면 명예훼손으로 상대를 고발하는 일이 다반사가 되었다.
전쟁을 그만두고 정치를 하라!
권력 경쟁을 진흙탕 싸움으로 끌어들이는 이 같은 행위는 결국 권력을 잡으려는 과정에서 사회를 분열 시키고 공포와 적대감, 불신을 부추긴다. 이들이 동원하는 적대적인 표현은 즉각 부메랑이 되어 돌아오고 싸움에 동원되는 방법은 점점 더 극단적이 된다. 탄핵이나 대규모 시위, 혹은 쿠데타 등 극단적 방법을 동원하여 정권을 무너뜨리려고 한다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현상이 빈번히 쉽게 일어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하지만 과거와 크게 달라진 중요한 변인이 있다. 바로 정보의 생산, 유통, 소비 패턴이 근본적으로 변화한 것이다. 소수의 주류 매체에 의존하던 정보 생산과 유통은 이제 모바일 인터넷을 통해 누구나의 손바닥에서 쉽게 이루어진다. 국가적 장벽도 옛말이 된 지 오래고 언론사의 영향력도 갈수록 작아진다. 이러한 현상은 혁명적인 정보민주화 및 대중화의 실현이라고 이해된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소문과 억측, 가짜 뉴스로 인한 정보의 쓰레기장으로 전락하는가 하면, 비난과 욕설, 원망의 배설구가 되어 악취만 진동하는 싸움터를 만들었다는 비판도 있다. 지금 한국의 미디어와 인터넷은 어디에 가까운가? 객관적 사실과 진실을 찾아 토론과 숙고의 장을 열고 있는가? 아니면 정적을 때려 잡지 못해 자신의 입맛에 맞는 것이면 억측이든 추측이든 가짜 뉴스든 끌어대며 서로 죽어라 죽어라 고함을 지르는 광분의 전장터인가?
코로나바이러스로 뉴스가 도배되는 지금 "한낱 독감에 불과한 코로나보다 인포데믹이 훨씬 독한 피해를 입히는 상황"이라고 어느 페친이 개탄을 한다. "따라서 지금 때려잡아야 할 것은 코로나가 아니라 미치광이 언론"이라고 주장한다. 안타깝지만 일리 있는 주장이다. 정보 공간이 정략적 이해에 의해 너무나 심하게 왜곡되고 저질의 정보가 온라인을 가득 채운다. 정보는 공기와 같다. 오염된 공기가 가득 차면 아군도 적군도 결국은 모두 죽는다. 그렇다면 인포데믹스와의 전쟁은 어떻게 치를 것인가? 코로나든 뭐든 건강한 신체에 바이러스가 침입하기 어렵듯이 저질 정보에 대한 대처도 같은 원리로 풀 수 밖에 없다. 근거가 분명하고 믿을 수 있는 연구에 뿌리를 둔 정보를 가려보는 눈을 소비자들이 가져야 한다. 또 그런 정보가 더 많이 생성되어 그릇된 정보를 쓸어 내야 한다. 양화로 악화를 구축해야 하는 이 일이 결코 쉬울리가 없다.
한국사회는 지금 어떤 이슈가 되었든 상관없이 아군과 적군으로 나누어 대치하는 파당적 언론, 연구소, 지식인 모임들이 득세하고 있다. 사실에 근거하여 객관적이고 공정하게 이슈를 조명하고 문제를 분석하는 일은 뒷전이다. 지식협동조합 좋은나라는 이러한 문제의식을 토대로 지금까지 이슈페이퍼를 발간해 왔다. 놓칠 수 없는 중요한 주제에 대해 다양한 시각과 전문적 분석을 바탕으로 건강한 목소리를 내는 것이다. 앞으로도 이러한 자세는 변치 않을 것을 약속드린다.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