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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요구 수용해 놓고, 한국 요구 관철한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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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요구 수용해 놓고, 한국 요구 관철한 것처럼" [한미FTA 뜯어보기 443 : FTA 현미경&망원경(1)] 투자자-국가 소송제, 6개의 더블토크(上)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협정이 타결됐다. 노무현 정부와 한나라당, 그리고 보수언론과 방송사는 앞 다퉈 한미 FTA 협상 결과를 극찬하고 있다. 심지어는 한미 FTA를 한국 사회로 끌어들인 김현종 외교통상부 통상교섭본부장을 '영웅'이라고 칭하기까지 한다.

다른 한편에서는 시민사회단체들과 일부 진보 성향의 지식인들이 한미 FTA 협상은 '역사상 최악의 퍼주기 협상'이었다고 비판하고 있다.

FTA 찬양의 목소리는 여기저기서 드높고, 비판의 목소리는 쇄국론자의 근거 없는 비난이나 진보진영 일부의 철없는 이상주의로 낙인 찍히는 분위기다.


이에 앞으로 <프레시안>의 경제 칼럼을 맡아 쓰게 될 필진들이 우선 지금까지 나온 한미 FTA 협상 결과를 '미시적으로' 들여다보고 그 '거시적인' 의미를 건져내는 작업을 하기로 했다. 한미 FTA의 본질을 가장 적확히 보여준다는 평가를 받는 '투자자-국가 소송제(ISD)' 관련 협상 결과에 대한 홍기빈 국제정치경제 칼럼니스트의 글로 그 문을 연다. <편집자>

'더블토크(double-talk)'라는 단어가 있다. 적당한 우리말 번역어가 없어 영어 표현을 그대로 쓰는 것을 양해하시기 바란다. 뭐라 말하고 있지만 '그 말의 들려오는 바의 뜻'과 '그 말의 뒤편에 담겨 있는 진짜 의미'가 전혀 달라서 듣는 사람을 기만하는 화법이다.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의 숱한 문제 중에서도 가장 핵심에 있는 투자자-국가 직접소송제(ISD, Investor-state dispute)를 놓고 지난 1년 간 정부와 어용 지식인들이 구사해 왔던 어법이 바로 이 '더블토크'다. 이들은 미국 측 협상단에나 구사해야 할 화법을 자신들이 마땅히 지키고, 그 이익을 대변해야 할 우리 국민들에게 퍼부어댄 것이다.

한미 FTA 협상이 일단락되어 협상안의 윤곽이 서서히 드러나고 있는 현재, ISD 관련 협상 타결 내용은 지난 1년간 지속된 이 '더블토크'의 새로운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실상으로는 미국의 표준안에 실려 있는 ISD의 내용을 그대로 따르면서도, 마치 한국 국민들의 의사가 대폭 반영돼 있는 것처럼 보이게 만든 것이다.

더블토크 1: ISD는 아무런 문제가 없는 '글로벌 스탠더드'다

먼저 지난 1년 동안 정부 관료들과 관변 지식인들이 ISD에 대한 우려가 터져 나올 때마다 이를 '무지와 오해의 소치'라고 무시하면서 내건 논리가 들여다보자. 최병일 이화여대 국제대학원 원장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투자자-국가 중재제도(ISD)'는 미국의 투자자는 물론이고 투기꾼에게까지 입법, 사법, 행정 전반에 걸쳐 국권을 내줄 위험이 있다. 정부의 공공정책권이 심각하게 제약당해 서민을 위한 양극화 해소나 복지정책 등도 우리 정부의 뜻대로 추진할 수 없다"는 천정배 의원의 말은 그가 법무장관을 지낸 인물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귀를 의심하게 한다. 제대로 된 율사라면 '투자자-국가 중재제도'가 공공성을 저해하면서까지 투기꾼의 부당한 이익을 보호하는 장치가 아니라는 것쯤은 알고 있다." (<조선일보>, 3월 29일자, '누구를 위한 단식인가')

이같은 발언은 최병일 교수가 국내 유수 대학의, 그것도 국제대학원의 교수라는 것을 믿을 수 없게 만든다. 인터넷에서 단 한 번만 검색해보아도 이 제도가 "공공성을 저해하면서까지 투기꾼의 부당한 이익을 보호할 위험이 크다"라고 경고하는, 전 세계 시민단체, 학자, 변호사, 심지어는 각종 국제기구에서 나온 수만 개의 글들을 접할 수 있다.

한 가지 예만 들자. 유엔 산하의 유엔무역개발회의(UNCTAD)에서 2004년 발간한 한 문건에서 칼 소방(Karl P. Sauvant) 투자기술기업개발국 국장은 이 제도의 잠재적 위험성을 지적하면서 앞으로 FTA나 BIT를 신규로 체결하는 나라들은 ISD 제도에 대해 "대단히 조심해야 한다"고 경고했다.

어째서 1999년 시애틀에 모여든 전 세계의 반세계화 운동가들은 이 제도를 환경과 공공성을 파괴하는 최악의 적으로 단죄했던 것인가. 어째서 호주 의회 보고서는 ISD야말로 "미국 투자자들에게 호주의 국가 주권을 넘는 부당한 권력을 안겨줄 위험이 있다"고 진단하고, 2004년 체결한 미국과의 FTA에서 이 제도를 근원적으로 제거해 버렸던가.

ISD의 위험성을 지적하고 나온 것은 이들만이 아니다. 바로 한미 FTA 협상의 상대국인 미국에서도 이 협정에서 ISD가 배제되어야 한다는 주장이 터져 나왔다.

전미주정부의회전국회의(National Conference of State Legislature) 산하 노동경제발전위원회(Labor and Economic Development Committee)는 지난 3월 20일 미 무역대표부(USTR)에 보낸 공식 서한에서 이 제도가 외국 투자자들의 권력을 부당하게 강화해 미국 주(州)정부의 입법 권력을 약화시킬 것이므로 반드시 한미 FTA에서 배제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나왔다. (<Inside US Trade>, 3월 20일자, 'U.S., Korea Faces Five Investment Issues in This Week's Negotiations')

"그러면 결국 한국 투자자들이 미국 국가 기구를 위축시킬 수 있다는 뜻이니 우리에게도 좋은 제도 아니냐"는 설익은 재치즉답은 사양한다.

'한국 투자자'들에게는 복음일지 모르겠으나, 투자의 양과 범위와 투자 상대국의 국민경제의 구조에서 차지하게 될 비중과 파괴력을 감안할 때 이 제도로 인한 최악의 피해자는 모두 한국의 일반 국민들이 될 수밖에 없다.

ISD의 위험성을 지적하고 이를 반드시 배제해야 한다는 목소리는 심지어 한국 정부 내부에서도 터져 나온 바 있다.

재정경제부, 법무부, 건설교통부 관료들은 지난해 8월 이 제도를 수용하게 될 경우 행정, 입법, 사법 전 부문에 걸쳐 국가의 권력이 심하게 위축당하고 거액의 분쟁에 휘말리는 등 걷잡을 수 없는 사태가 나올 수 있음을 지적하면서 통상교섭본부와 논쟁을 벌인 바 있다. (<프레시안>, 2월 1일, '통상교섭본부, 盧心 앞세워 "투자자-국가 소송제' 독주')
▲ 한미 FTA 협상이 타결된 2일, '한미 FTA 저지 범국민 운동본부'가 주최한 촛불주최에 참여한 시민들이 "협상 원천 무효"라고 외치고 있다. ⓒ연합뉴스

정부가 1년간 주장해 온 바가 겉과 속이 다른 '더블토크'에 불과하다는 부동의 증거는 다름 아닌 통상교섭본부의 행태 자체다.

한국 측은 2차 협상에서는 "수용(expropriation) 관련 분쟁을 국내구제절차에서 해결하자"고 요구했고, 3차 협상에서는 간접수용의 명확한 정의와 예외 예시를 요구했고, 4차 및 5차 협상에서는 토지 관리 및 이용, 일반 조세, 반독점 등을 간접 수용 예외 조항으로 넣자고 했고, 6차 및 7차 협상에서는 부동산 가격 안정화 정책, 일반 조세 등을 예외로 하자고 요구했다.

만약 최병일 교수의 말대로, 또 외통부 관료들의 말처럼 이 제도가 "지극히 안전하고 온당한 글로벌 스탠더드"라면 통상교섭본부는 어째서 중차대한 사안이 산적한 협상 과정에서, 그것도 미국 측으로부터 완전히 무시당하면서까지 이토록 길고 지루하게 이 제도에 매달렸단 말인가?

답은 간단하다. 정부도 이 제도의 위험성과 폭발성을 분명히 의식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부는 국민들에게는 이 제도는 당연한 것이며, 이 제도를 비판하는 자들은 모조리 무지와 편견에 가득 찬 이들이라고 주장해 왔다. 정부는 다른 한편으로는 그 비판자들이 그토록 목 놓아 지적했던 '간접수용'의 문제와 각종 공공정책의 자율성 등을 놓고 협상을 벌여 왔다.

완전한 무지 상태에 있는 것 보다는 나은 일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정부 관료이건 관변 지식인들이건 이제 더 이상 "이 제도는 아무런 문제가 없는 세계적 표준이다"라는 '더블토크'는 그만두라. 이는 시민들로부터 제기되는 비판과 참여를 원천적으로 봉쇄하고, FTA 진행과 내용을 독점하고자 하는 일부 세력의 기만행위에 불과하다.

더블토크 2: 부동산 정책을 미국 투자자의 분쟁 대상에서 제외하는 데 성공했다

정부와 관변 매체들은 지금 "우리 정부의 각종 부동산 정책을 미국 투자자의 분쟁 대상에서 제외시킬 것을 요구해 관철시켰다"고 홍보하고 있다.

그런데 외통부에서 배포한 보도자료에 따르면 정부가 실제로 제외시킨 부동산 정책이란 '부동산 가격 안정화 정책'이다. 이 둘은 과연 동일한 것인가?

여기서 잠깐, 여러 차례의 협상 과정에서 ISD와 부동산 정책과 관련하여 한국 측이 요구했던 내용의 변화 추이를 살펴보자. 한국 측은 3차 협상에서는 '부동산 계획'을 예외로 할 것을 요구했다가 거부당했고, 4차 협상에서는 '토지 관리 및 이용'을 요구했다가 거부당한 바 있다. 그리고 나서 최종적으로 얻어냈다는 것이 바로 '부동산 가격 안정화 정책'이다.

'부동산 가격 안정화 정책'이란 구체적으로 무엇을 뜻하는가? 심상정 민주노동당 의원에 따르면 이는 '부동산 가격의 등락이 금융시스템의 안정성을 해칠 위험을 막기 위해 정부가 취하는 금융 정책'을 뜻한다고 한다.

이런 금융 정책은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주택담보인정비율(LTB), 즉 부동산 구입을 위해 대출을 받을 경우 담보로 내놓는 자산과 대출액의 비율을 조정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투기과열지역에서의 부동산 대출 금리를 조정하는 것이다.

이것이 '부동산 정책'인가? 오히려 부동산 정책의 핵심은 바로 우리가 요구했다가 거부당했다고 알려진 것들, 즉 '부동산 계획'이나 '토지 관리 및 이용'에 관련된 제반의 국가 정책과 같은 것들이 아닌가. 그러니 이와 관련된 국가 정책들은 지금 고스란히 ISD의 분쟁 대상으로 남아 버린 것이 아닌가.

한정된 국토, 극심한 지역 간 불균형, 수도권 과밀화 등 우리의 상황을 생각해보라. 이런 상황을 관리하기 위해서는 합리적인 부동산 계획과 토지 관리 및 이용에 관련된 각종 정책과 규제들을 계속해서 쇄신하며 만들어나가는 것이 불가피하다.

그런데도 이제 그 정책들은, 많은 시민단체들과 지식인들이 그렇게도 우려했던 것처럼, 고스란히 ISD의 대상으로 남아버린 것이다.

반면 정부가 소위 '부동산 가격안정화 정책'이라고 부르는 LTB 조절이나 투기지역 금리조정 같은 것을 과연 '부동산 정책'이라고 볼 수 있는가. 이러한 정책들이 추구하는 본질적인 목적은 부동산의 계획과 관리 이용 자체에 개입하는 것이 아니다. 그저 부동산의 자산 가격 구조의 건전성이 흔들려 금융 시스템 전체를 불안정하게 만드는 사태를 방지하기 위한 거시경제 정책에서의 '금융 정책'에 가까운 것이다.

백번 양보해 '부동산 가격 안정화 정책'을 '부동산 정책'이라고 부른다고 하자. 이 두 가지 정책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얼마나 되는가. 그런데도 이를 놓고서 "부동산 정책을 지켜냈다"라고 홍보하고 있는가. 실로 대단한 '더블토크'다.

더블토크 3: 외환 세이프가드를 ISD 분쟁 대상에서 제외하는 데 성공했다

외환 세이프가드란 외환위기와 같이 급박한 사태가 벌어졌을 때 자본이동 통제와 같은 일종의 긴급조치를 취하는 것을 말한다. 법무부의 보도자료는 이것이 미국이 다른 나라들과 맺은 FTA 사상 처음으로 우리가 따낸 성과라고 대서특필하고 있다. 게다가 원래 6개월이었던 세이프가드 기간도 1년으로 연장하는 것을 인정받았다고 한다.

이는 성과라 할 만하다. 단, 외환 세이프가드 조치가 ISD 분쟁 대상에서 제외되는 기간이 '영구적'으로 돼 있다면 말이다.

한미 FTA 협상 막바지였던 4월 1일 밤 10시경에 나온 한 보도에 의하면 "미국은 금융 분야 일시 세이프가드 도입을 양보하는 대신, 세이프가드 발동 1년 후 투자자 피해나 발동내용에 따라 투자자-국가 간 소송의 대상으로 삼겠다는 입장을 굽히지 않고 있다." (<쿠키뉴스>, '신약 최저가 보장 수용, 개성제품 문제 추후논의').

정부는 이런 미국의 주장이 어떻게 처리됐는지에 대해 아직 밝히지 않고 있다. 그런데 이 주장이 실제로 관철됐다면, 세이프가드 정책은 ISD 분쟁 대상에서 제외된 것이 아니라 '1년간 유예'된 것일 뿐이다.

이것이 중요한 의미가 있는가? 그렇다. 이 조항이 지닌 실제 의미는 '미국 투자자들은 한국 정부의 세이프가드 조치로 손해를 본다고 해도 최소한 1년간은 ISD 분쟁을 시작할 수 없다'는 것에 불과하다.

'더블토크'는 항상 뒤집어 음미해야 그 실제 의미가 드러난다. 이는 곧 한국 정부가 세이프가드 조치를 취할 수는 있지만, 그로 인해 생겨날 수 있는 미국 투자자들의 손해와 불만을 1년 안에 해소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만약 그렇지 못한 채 1년이 지나게 될 경우, 미국 투자자들은 1년 전의 그 조치를 놓고서 ISD 분쟁을 시작할 수 있게 될 것이다. 따라서 6개월이나 1년이라는 기간이 문제가 아니다. 미국 투자자들이 ISD 분쟁을 시작하지 않고 '참아주는' 기간이 1년이라는 점이 중요한 것이다.

어떠한 세이프가드 조치를 취하건, 그 조치의 폭이나 사후처리 등은 모두 1년 내 미국 투자자들의 어떠한 불안도 해소할 수 있는 범위에 놓여 있어야 한다.

그런데 과연 그럴 수 있을까. 세이프가드가 발동될 정도의 위기 상황에서 자본 금융 시장에 취한 조치가 1년 안에 아무런 일도 없었던 것처럼 원래의 평온한 상태로 되돌아갈 수 있는 것일까.
▲ 한미 FTA의 주역들, '영웅'인가 '매국노'인가. 오른쪽부터 노무현 대통령, 권오규 경제부총리 겸 재정경제부 장관, 김현종 외교통상부 통상교섭본부장, 김종훈 한미 FTA 협상 수석대표. ⓒ연합뉴스

여기서 아르헨티나의 사례는 큰 시사점을 준다. 지난 2001년 심각한 외환위기에 몰린 아르헨티나 정부는 파국을 막기 위한 긴급조치를 취했다가 이를 문제 삼은 외국 투자자들에 의해 40건이 넘는 ISD 분쟁 더미에 올라앉게 됐다,

아르헨티나는 2005년에 최초로 판정 결과가 나온 사건 한 건에서만 미국 투자자들에게 1억3000만 달러를 물게 되는 등 시련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그 분쟁이 시작된 시점이다. 그 중 최소한 20건 이상의 분쟁이 시작된 것은 긴급조치가 취해진지 만 1년이 넘은 2003년이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정부는 '외환 세이프가드의 ISD 적용 제외 관철'을 홍보하기 전에 이런 미국 요구가 어떻게 됐는지에 대해 분명히 답해야 한다. 만약 미국 요구가 관철됐다면, 이는 결코 '제외'가 아니라 '1년 유예'일 뿐이다.

아르헨티나의 사례에 비추어 보았을 때, 이런 '1년 유예'란 거의 의미가 없다. 이렇게 전혀 뜻이 다른 두 개의 단어를 애매하게 섞어 쓰는 것 또는 핵심적인 두 측면 가운데 하나를 의도적으로 흐리는 것, 바로 이것이 고전적인 '더블토크' 기법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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