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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버려두라"면서 "해야 한다"는 모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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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내버려두라"면서 "해야 한다"는 모순 [밥&돈·2] '밥과 돈의 현실주의'로 '냅둬' 철학 극복해야
"경제가 잘 굴러가게 하는 최상의 방법은 시장의 행위자들을 내버려 두는 것이다. 따라서 최상의 경제 정책은 시장에 대한 모든 규제를 없애는 것이다."

지난 200년 간 경제학자들은 이런 '자유방임주의' 경제원칙에 근거해, 구체적이고 미시적인 정책으로부터 추상적이고 거시적인 세계관의 차원에 이르기까지, 숱한 책과 논문들을 쏟아냈다. 이제 이런 책과 논문들은 대학 도서관과 지식인들의 카페와 정부 경제부처들을 가득 채울 수 있을 만큼 많이 쌓였다.

그래서인지 오늘날의 세상에서 자유방임주의 경제원칙은 경제학에 대한 기초소양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의심해마지 않는 절대 진리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이 원칙에 따르면, '시장'은 모든 사람들이 자신이 가진 지혜와 능력을 짜내 사익을 추구하기 위한 모임으로 성립된 곳이다. 그래서 이런 목적을 달성하는 데 필요하다면 도덕, 전통 또는 관습의 제약을 넘어서는 것이 무제한 허용된다.

이를 두고 누구는 "혼란"이니 "정신적 동물계"니 비판하면서 군기를 잡으려 들지만, 이렇게 정글처럼 보이는 북새통이야말로 시장이 자유와 효율성을 담보하는 장으로 기능할 수 있는 위대성의 근원이라는 것이다.

가슴으로는 도저히 납득이 안 되는 일들, 이를테면 인건비 몇 푼을 아끼자고 몇 년간 한솥밥 먹으며 일한 직원들 수백 명을 모조리 해고해 용역회사의 날품팔이로 만든 후 이들과 재계약을 맺는 일이 벌어진다고 해도, 이것이 살인과 같은 극악한 인륜 파괴가 아니라면, '그대로 내버려두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시장이 살아나고, 종국에는 사회 전체가 살아나는 비결이라는 것이다.

"돈이라는 우주의 척도"를 구현하기 원하는가?

문제는 이런 자유방임주의 경제원칙에 치명적인 논리적 결함이 있다는 것이다. '내버려두라'는 말은 경제정책의 독트린이 될 수 없다. '내버려두도록 정책을 펴라'는 주장 자체가 앞뒤가 맞지 않는 '부조리(absurdity)'이기 때문이다.

길거리에 거지들이 그득한데 그들이 기대어 선 백화점 건물 안에는 몇 백만 원에서 몇 천만 원을 호가하는 사치품들이 진열돼 있다. 이것은 그냥 '내버려두어야' 할 일이다.

그렇다면 경제체제를 작동시키기 위한 국민들의 활동이나 노동조건의 개선을 위한 노동조합의 활동은 어떤가? 이런 것들도 국민들과 노동자들이 "살인 같은 인륜 파괴가 아닌" 범위 내에서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각자의 지혜를 짜내" 만들어낸 것이 아닌가. 그러니 이것들도 '그대로 내버려두어야" 할 대상이 아닌가?

그런데 '모든 것을 내버려두라'던 자유방임주의 경제원칙은 국가 규제나 노동조합의 활동에 대해서만큼은 유독 '적극적으로 개입해 철폐하거나 억압해야 한다'는 정반대의 원리로 탈바꿈한다!

이 패러독스는 단순한 말장난이 아니다. '내버려두라'는 원칙을 정책 원리라고 우길 때 필연적으로 나타나는 논리적 모순의 발현이다.

'내버려두라'는 철학을 가장 잘 체현하고 있는 것은 개(犬)들과 이들을 스승으로 삼은 그리스 견유주의자들이다. 그들이 언제 온 세상을 들쑤시고 다니며 "이것을 철폐하라"거나 "저것을 금지하라"고 핏대를 세우던가. 그들은 그저 주어진 대로의 세상을 받아들이고 그 안에서 자신의 행복을 추구할 뿐이다.

이는 복잡한 정치·사회 문제에 끼어들지 않고 그저 자기 앞가림이나 잘 하고 돈벌이에 골몰하는, 대다수의 우리 서민 '속물들'이 이미 몸소 실천하고 있는 바이기도 하다.

그래서 궁금해진다. '내버려두라'고 믿는 이들이 어째서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하자', '이것을 금지하자', '저것을 철폐하자'는 주장을 끝도 없이 쏟아내는 것일까. 왜 노동자 파업은 '하지 말라'고 하면서, 숱한 반대를 무릅쓰고 자유무역협정(FTA)을 '하자'고 하는 것일까?

내버려두라는 그들은 정작 왜 그리 말이 많은가? '내버려두게 하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무엇인가 해야 한다'는 건 대체 무슨 말장난인가? 이쯤 되면 이런 말장난을 하는 사람들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개들이 지향하는 '모든 것이 그대로 내버려두어진 상태'가 아니라 '대단히 독특한 어떤 질서'라는 것을 눈치챌 수 있다.

미국의 소설가 아인 란드가 일찍이 그려냈던 바, 그 질서는 "돈이라고 하는 우주의 척도"에 따라 만물과 만사가 줄을 서는 세상이다. 이 세상에서는 노조가 금지되고, 기업은 완전한 영리활동의 자유를 누리고, 금융은 수익성만을 좇아 어디로든 오갈 수 있고, 부자는 높은 세금을 물어야 할 일이 없다.

그러면 '낫'을 '낫'이라고 부를 일이지, 즉 '돈이 지배하는 세상을 만들자'고 솔직하게 말할 것이지, 왜 사람 헷갈리게 '자유방임' 같은 복잡한 말로 신비화하려 드는가.

"개량보다는 굶주림이 낫다"?

자본주의 체제의 문제점을 끝도 없이 지적하는 한 친구가 있었다. 그는 규제 등을 통해 자본의 횡포를 일부 막는다고 해서 자본주의 체제 자체를 극복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강조하곤 했다.

'화폐'를 통한 상품의 교환, 이를 통해 화폐가 스스로 증식하는 '자본'으로 변하게 돼 있는, 그래서 인간과 자연이 모두 상품으로 변해 돈 가진 자에 의해 한없이 휘둘리게 돼 있는 이 체제의 작동원리가 문제라는 것이다.

따라서 이런저런 '개량적'인 정책으로 이런 모순을 은폐하는 것은 기만일 뿐이며, 피억압 민중들이 근본적이고도 혁명적인 체제 타파를 위해 행동하는 것만이 문제의 해결책이라는 것이다.

내 주변만 하더라도, 보이느니 하루의 노동에 때 묻고 지친 사람들이요 들리느니 고달픈 살림살이에 찌든 이야기일 때가 많다. 그러니 그 친구의 이야기에 짐짓 귀가 기울어지기도 한다. 그런데 그 친구가 항상 언급하는 "근본적이고도 혁명적인 체제 타파"는 언제쯤 가능한 것인가?

서민과 농민과 노동자들, 즉 피억압 민중들이 체제의 모순을 각성하고 다 같이 일어설 때에만 가능하다고 한다. 그렇다면, 그런 각성의 순간이 올 때까지 그들은 지금처럼 계속 고달프게 굶고 살아야 하는 것인가. 혁명적인 체제 타파 이외에, '바로 지금, 바로 여기'의 상황을 개선할만한 노력을 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놀랍게도 그 친구는 아직도 "개량보다는 굶는 쪽이 낫다"고 한다. 쓸데없이 개량을 시도하면 민중들의 계급의식만 무뎌진다는 것이다. 그는 요새는 아예 "차라리 끔찍한 경제공황, 즉 자본주의의 위기를 기다리자"고 말하기도 한다. 그 편이 사람들이 자본주의 체제의 모순을 깨달을 때까지 겪어야 할 고통의 시간을 줄여준다는 것이다.

그렇게 경제공황이 벌어지면 무너지는 가정은 누구의 가정인가? 직장을 잃게 되는 사람은 누구인가? 그로 인한 고통은 얼마나 오래 갈까? 이런 질문들은 그의 안중엔 없는 것 같다.

그 친구의 주장을 처음 들은 지도 어언 20년이 지났다. 그 기간 동안 우리에게는 세계화, 외환위기, FTA 등 파란만장한 사건들이 지나갔다. 그 와중에 숱한 사람들이 노숙자나 졸부가 되었고, 이혼이나 실직을 당하기도 했다. 나는 종종 그가 이런 사람들의 '하찮은' 고통에 일말의 관심이나 있는지 궁금해지곤 한다.

'밥과 돈'은 현실주의를 갈망한다

일본의 소설가 시바료타로는 태평양전쟁 당시 전차병이었다고 한다. 일왕의 항복 선언으로 패전을 맞게 된 순간, 그가 느낀 것은 일본 지배층들에 대한 끓어오르는 분노였다.

'팔굉일우'가 어쩌고 '신무천황의 자손'이 어쩌고 하는, 온갖 요설과 망상과 수사 속에서 그들은 자신들이 무슨 일을 벌이는지도 모르고 전쟁을 벌였고, 그 결과 숱한 사람들이 희생됐으며, 그렇게 온갖 우여곡절을 겪고 난 결과는 패전이라는 어처구니없는 현실이었던 것이다.

그 "입만 살아 있는" 엘리트들에 비해, 시바료타로가 뼈아프게 아쉬워했던 것은 "현실주의"였다. 그것도 탱크의 묵직한 중량감이 대표하는, 질량과 속도와 에너지와 화력으로 이뤄진 "전차병의 현실주의"였다.

그래서 그 전차병은 나이가 들어 문필가로서의 경륜이 깊어질수록, 허위와 착각의 광상으로 얼룩진 소화 시절의 일본을 넘어서서, "전차병의 현실주의"로 차근차근 나라를 건설해 마침내 러일전쟁의 승리를 이루었던 그 옛날 명치 시절의 일본을 그리워하게 됐다고 한다.

내가 보기엔 전차도 그다지 현실적인 물건은 아니다. '최소인원으로 최대살상'이라는 전쟁의 논리는 초현실적인 상황의 산물이다. 그러니 "전차병의 현실주의"가 찾아낸 이상이 고작 "백인들과 맞장을 뜨겠다"고 전 국민들을 몰아치던 명치 시절의 국가주의로 귀결된 것도 우연은 아닐 것이다.

탱크보다 전쟁보다 국가보다 더 현실적인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밥과 돈"이다. 탱크, 전쟁, 국가를 필요로 하지 않는 사람들도 많다. 또 이런 것들로 인해 이익보다는 피해를 보는 사람들이 더 많다.

하지만 밥과 돈을 필요로 하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은 본 적이 없다. 자유무역을 통한 경제성장과 도시인의 편익 증대를 운운하며 한미 FTA를 찬양하는 사람들 가운데 미국산 쇠고기와 유전자조작(GM) 농산물을 매일 주식으로 먹겠다는 사람을 본 적이 없다.

또한, 자본주의를 성토하면서 노동자가 주인이 되는 경제를 외치는 사람들 중에 철저하게 화폐경제와 단절돼 간디처럼 '물레 돌려 옷 지어 입는' 사람을 아직 만나본 적이 없다.

우리들 대다수에게 있어서, '밥과 돈'은 '변소와 손톱깎기'처럼 좋든 싫든 우리 삶의 한 부분으로 자리 잡은 것이다. 그래서 밥과 돈의 문제는 탱크보다 훨씬 더 절실하게 현실주의를 갈망한다.

'IMF 위기 터널' 다음엔 'FTA 터널'?

1997년 외환위기 이래로 10년 동안 우리 사회에서는 이 '밥과 돈'에 대한 이야기가 점점 더 경제 담론의 중심을 파고 들어왔다. 그런데 그런 담론들 가운데 진정으로 '밥과 돈의 투박한 현실주의'에 철두철미했던 이야기는 얼마나 있었나.

'경제성장'이나 '경쟁력 강화'와 같은 구호, 혹은 주문(呪文)을 몇 천만 명이 함께 외쳐대면 밥도 돈도 다 해결된다는 식의 이야기가 마치 논박불능의 과학이라도 되는 것처럼 보수언론과 주류 학자들과 보수 정치인들의 입을 통해 전파되고 있다.

그런데 "몇 년 만 참으면 밥도 돈도 다 해결될 것"이라던 약속, 외환위기 이후 '그들'이 금융체제를 마음대로 변화시키고 정리해고 등 온갖 엄혹한 조치를 취하면서 우리를 무마했던 그 약속은 실현되지 않았다.

우리가 지난 10년간 헤메 온 어두운 터널의 출구는 아직 먼빛으로나마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그들은 지난 10년의 부도수표에 대한 해명을 내놓기는커녕 이제 '동시다발적인 FTA'라는 또 하나의 어두운 터널로 우리들을 몰아세우고 있다.

이번에는 그 흔해빠진 장밋빛 통계수치조차 제대로 내놓지 않고, 근거도 논리도 박약한 "서비스산업의 업그레이드"이니 "금융강국으로의 발전"이니 하는 현란한 수사를 동원한다. 급기야는 "광개토대왕의 후예니까 괜찮아"라는 영화 제목과 같은 말까지 내놓는다.

'IMF 외환위기 10년'이라는 터널을 지나 이제 '동시다발적인 FTA'라는 새로운 터널을 앞에 둔 지금의 한국경제는 분명히 기로에 서있다.

이럴 때 가장 절실한 것은 소리 높여 구호를 외치고 깃발을 흔들어대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서 있는 발밑의 지형지물부터 차분하게 둘러보는 것이 아닐까. 즉, '밥과 돈의 현실주의'가 필요한 게 아닐까.

책임 있는 가장이라면 누구도 몇 마디 그럴듯한 말들에 현혹돼 가산을 모조리 어딘가에 '올인'하는 짓은 하지 않는다. 가장의 현실주의, 즉 '내 아이들을 먹이고 입히고 배우게 하려는 데 무엇이 필요한가'라는 소박한 질문과 나지막한 대답이 지금 절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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